|
에디터백성호
관심
(51) 예수의 무덤에서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나
성묘 교회 안에 있는 동굴 무덤을 나왔다. 아르메니안 교회의 성직자들이 성가를 부르며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시신을 눕혔다는 돌이 있었다. 놀라웠다. 저 위에 예수의 시신을 뉘었다니 말이다. 그 돌 위에 순례객들이 손을 얹거나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예수가 못 박힌 곳,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곳,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한 초월적 역사의 공간은 과연 어디일까.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한다. 예수의 무덤에 갔던 제자들의 목격담은 복음서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중앙포토
나는 눈을 감았다. 물음이 올라왔다. ‘예수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나. 예수의 부활은 또 무엇을 의미하나.’ 그 물음이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가 여기에 묻히든, 저기에 묻히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진정 어디일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가 묻힌 곳 말이다. 나는 그곳이 골고타라는 물리적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묻힌 곳, 그리고 되살아나는 곳. 그곳은 바로 ‘내 안’이다. 나의 가슴이다.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공간이다.
예수는 금요일 오후에 죽었다. 토요일은 안식일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주검이 놓인 무덤을 얼마나 찾아가고 싶었을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키느라 토요일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았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요일 아침이었다. 예수가 묻힌 위치를 아는 이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정도였다. 그들은 날이 밝자마자 향료를 가지고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섰을 때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복음서에 따르면 제자들이 예수의 동굴 무덤에 들어갔을 때 천사가 있었다는 대목도 있고, 텅 빈 무덤만 있었다는 대목도 있다. 백성호 기자
4복음서에는 그들이 목격한 무덤 속 광경이 기록돼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무덤 속에 예수의 시신은 없고,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한 젊은이가 앉아 있다고 적혀 있다. 그 젊은이는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고 말했다.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무덤에 천사가 나타나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고 말했다. 루카 복음서에는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나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라고 되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세 복음서에는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천사 혹은 천사로 보이는 어느 젊은이가 등장한다.
4복음서 가운데 가장 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서는 조금 다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아침 어둑어둑할 때 무덤을 찾아갔다. 입구를 막은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 텅 빈 무덤을 본 마리아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달려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20장 2절)
4복음서 중에서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목격담 중 요한복음서는 비교적 담담한 서술을 이어간다. 갈릴리 호수 위로 철새가 날고 있다. 백성호 기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달려갔다.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는 그대로 놓여 있었고, 예수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은 한쪽에 개어 놓았다.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본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요한복음서의 서술은 담담하다. 거기에는 ‘텅 빈 무덤’만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제자들이 무덤에 찾아갔을 때 천사를 만났다는 내용은 없다. 그들이 무덤에 갔을 때 그곳은 이미 텅 빈 상태였다고만 적혀 있다. 비어 있는 무덤을 확인하고 제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 막달레나만 그곳에 남았다. 그녀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안을 봤더니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좀 다르다. 천사의 등장에 약간의 시차가 있다.
짧은 생각
‘도마복음’은
외경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간단치 않은
복음서입니다.
왜냐고요?
‘도마복음’에 담긴
영성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감리교의 이현주 목사가
『토마복음 읽기』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목사는
틱낫한 스님의 어록을
풀이한 책을 내는 등
종교의 울타리를
관통하면서
진리를 묵상하는
영성가입니다.
짧은 어록의 모음으로
구성돼 있는
‘도마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르셨다.
누구든 이 말씀들의 풀이를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왜 그럴까요.
왜 이 말씀에 담긴
뜻을 풀어내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되는
걸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곳에서 나왔고,
그 말씀 속에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이치와 풍경이
이미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에서 나온
말씀 속에는
이미 ‘영원’이 담겨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맛보는 자에게는
죽음이 사라지고
영원만 남게 됩니다.
이 목사는
『토마복음 읽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네가 무엇을 본 게 아니라
그것이 네 눈에 보인 거다.
하지만
네가 보려는 마음 없이
눈을 감으면
밝은 태양인들 무슨 소용이랴?
눈을 떠라.
하지만 두리번거리지는 말라.
지금 네 눈에 들어오는
그게 그거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삶으로 살면
그것과 하나된 것이다.
생명을 보고
생명에 먹혀
생명으로 산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맛볼 수 있겠는가.”
내가 무엇을
보았다고 말할 때
‘나’는 여전히 있습니다.
‘나’가 없음을 깨칠 때
비로소
그것이 내 눈에 보이게 됩니다.
‘나’는 없고
‘그것’만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삶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그걸 통해
그것과 하나가 되니까요.
사도 바울은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놓고
말이 많습니다.
무조건 믿는
사람도 있고
심각한 논쟁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의
본질적 내용은
과연 뭘까요.
“생명을 보고
생명에 먹혀
생명으로 산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맛볼 수 있겠는가.”
저는 이 구절 속에
예수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생명을 보고
생명에 먹혀
생명으로 산 사람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나와 생명이
하나가 됐으니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가 된 겁니다.
생명으로
하나가 된 겁니다.
사람들은 다들
생(生)에서 사(死)로
넘어가지만,
생명 그 자체는
영원히
생명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결정적 메시지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생명을 보고
생명에 먹혀
생명으로 살아 보라.”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