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 어떤 것이 대열반의 해탈 입니까?
스승 : 生死業(생사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
제자 : 어떤것이 생사업 입니까?
스승 :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업이다.
제자 : 스승님의 禪(선) 과 道(도)는 어떤 것입니까?
스승 : 선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배고프면 밥먹고 졸음이 오면 잠잔다.
이것이 나의 선이고 나의 도다.
제자 :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 모두가 도가 높고 참선을 많이 한
스승님과 같은 것입니까?
스승 : 나와 전혀 같지 않다.
제자 : 왜 그러 합니까?
스승 : 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지 않고 백 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잠 잘때도 잠자지 않고 천가지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와는 전혀 다르다.
도를 진정 아는 사람은 오고 가는 것이 모두 도이고
또 일상생활 그대로 깨달음이다.
한 용운 스님은 [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지 어떤 환경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선이라는 것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몸만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면 이것은 獨善(독선. 홀로 독)에 해당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며 그 실천을 강조한다
붓다가 말씀하신 자비의 실천은 조용한 산속에서 홀로 청정을 노래하며 오고가는 구름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잎에게 베풀라고 한게 아니고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베풀라고 가르치셨다.
따라서 자비의 종교인 불교에 있어서 자비를 실천 할려면 참선이란 고요한 곳에서도 해야 하지만
시끄러운 속에서도 해야 한다.
중국의 大慧(대혜) 선사는 [시끄러운 속에서 참선에 대한 힘을 얻으면 그것은 고요한 곳에서 얻는
것보다 백천만배 더 낫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시끄러울 때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것은 그 마음을 요란케 할 뿐이다] 라고 가르치셨다.
또한 대혜선사는 [선이라는 하는 것은 일상생활이 다 선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즉 선이라는 것이
무우 자르듯 잘라서 어떤 특정한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생활 그 자체 속에서 참선이
이루어지고 또 참선 속에서 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은 선대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있으면 그것은 올바른 선이 아니라는 가르침 이다.
즉 참선이라는 것은 고요히 앉아서 화두를 드는 것이라는 것에 집착을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나아가 앉아 있는 것만 제일 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모든 것을 물리 치려고 한다면 그곳에는
선의 妙用(묘용. 묘할 묘)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진리란 현상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상호 관계를 떠나서
있는게 아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의식을 현재라는 시간에 집중 시킬수만 있다면
올바른 선이 되는 것이다.
보통의 중생들은 언제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기억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불안등으로 몸과
마음이 뒤 흔들리고 있으며 또한 이로인해 항상 妄想(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현재라는
순간을 바로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간 것에 대한 집착이나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생각등으로
현재 바로 이 순간 자기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몸과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지 제대로 보고 느낄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 현재의 행위 속에 의식을 집중시키고 모든 잡념을
추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생활속의 올바른 참선인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일념으로
순수한 생각으로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망상은 끼어들지 못한다. 망상에 이끌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선 수행인 것이다.
절에가서 기도를 할 때 온갖 망상을 떨쳐 버리고 기도에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로써
내가 참선을 하는 것이며, 염불을 할 때 염불에만 정신을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요,
공부할 때 그 내용에만 정신을 집중한다면 공부하면서 참선 수행하는 것이다.
참선 공부를 많이 한 수행승일 수록 조용한 곳만 찾고 찾아 오는 사람이 싫다고 산속으로만
도망을 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참선 수행승이 아니다. 아무리 바깥이 시끄럽다 하더라도
시끄러운 소리에 관심두지 아니하고, 시끄러운 것을 조용하게 만들려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데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열중하다 보면 이것이 바로
시끄러운 곳에서 조용한 것을 항상 느낄수 있는 제일 좋은 참선 공부인 셈이다.
참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 나선다면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러한 공부는 불교 공부라기 보다는 정신 수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타종교의
사람들이 조용한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자비를 실천 할려면 중생들이 사는곳에 있어야 하고 중생들이 사는 곳은 시끄러운 곳이다.
그속에서 참선을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수행승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
볼 일이다.
참선만을 하는 것은 절대로 불교라고 말할 수 없다. 우선먼저 깨닫고 난 다음에 자비를
베풀려고 한다면 그와 반대로 만약에 못 깨닫고 그냥 죽는다면 꽁짜로 얻어 먹은
밥값을 어떻게 되돌려 줄 것인가. 차라리 자비를 베풀며 선행을 하여 선업을 쌓는 것이
보다 부처님의 법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일 것이다.
불교의 수행을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먼저 깨달은 다음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는 그 자체가
중생 교화이며 중생 교화가 곧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자라면
누구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위주로 삼취정계(三聚淨戒), 사섭법(四攝法), 육바라밀(六婆羅蜜)
등을 실천 하기를 요구한다.
불교 공부란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알아서 바르게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공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바른것인지 무엇이 바른 실천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구입하여도 운전할 줄 모르면 무용지물이며 오히려 섣부르게 운전 하다가는 교통신호만
위반하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사고만 날 뿐이다. 마찬가지로 불법을
만났어도 바르게 실천하는 방법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올바르지 않는 길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사람을 만나면 만나는 것으로 좋은 것이고 참선을 하면 참선하는 것으로 좋은 것이다.
이것이 싫다 저것이 좋다는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참선 수행승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수행승은 사람이 싫다며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기만 한다. 그 조용한 곳에서
신변잡기에 가까운 글이나 써대고 사람 만나지 않아서 좋다고 공공연하게 책에다 써댄다.
또한 어떤 수행승은 높은 도력이 있다고 해서 수많은 불자들이 친견코져 목이 빠져도
산속의 구름이나 흐르는 시냇물과 놀아 줄 지언정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의 세계에
내려와서 실천적 자비심을 베풀지 않는다.
不取不捨(불취불사)의 平常心(평상심)이라는 참선의 진정한 가르침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도 먼 수행승이 높은 경지의 참선 수행승인냥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가지고자 하는 마음도 초월하고 버릴려고 하는 마음도 초월해서 항상 마음이 한결같고
늘 청정하고 평온하여 어디에나 자연스럽게 응하는 것이 바로 참선의 진정한
가르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