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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시대
부르주아의 세계 에릭 홉스봄
은진씨 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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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속담에 “의복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희곡작가 네스트로이는 1840년에 [부적]이라는 작품을 통해 허영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했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가정이란 행복이라는 환상을 지키며 그것을 과시하고 행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적인 조화물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대표적으로 크리스마스 문화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 왕실의 후원으로 급속히 일반의 풍속이 된다. 이는 바깥세상의 추위와 가정 안의 따뜻함을 동시에 상징하기도 한다.
부르주아에게 물건이란 거기에 든 비용의 구현이다. 인격의 표현이며 이념과 현실이며 또 인간을 ‘변혁’시키기까지 하는 가치를 지녔다. 물건이 ’실하다’는 말은 기업가들에 최고의 찬사다. 바깥부분은 오직 기능적일 뿐이고 부르주아 세계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안쪽에만 장식이 되어 있다.
물질의 튼튼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이중성은 물질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분열을 표현한다.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구매할 수 있는 금전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또한 부르주아풍 실내란 피아노 없이는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없었다. 피아노 없는 부르주아 집안의 따님이란 어불성설이었다.
오로지 고상함만 추구한다는 것은 별로 수지맞는 일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성취의 추구와 물질적인 성취의 추구에는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고 결론짓기 보다는 전자가 후자의, 후자는 전자의 불가결한 기초기 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질과 정신의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위선을 의미했다.
위선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섹스의 경우다.
대표적이 사건은 1870년 중엽 퓨리터즘(엄격한 도덕 생활) 설교가였던 헨리 워드 비치스와 남녀동등권주의자이며 자유연애 신봉자 우드헐이라는 아름다운 여성과의 섹스 스캔들.
청교도 유권자들의 투표에 의존하는 저명한 정치가라든가 지방도시에서 명사 행세를 하는 대사업가이면서 동성연애를 즐기는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하면 위선이 단순한 허위인 것만은 아니었다.
미혼의 부르주아 여성에게는 순결을, 기혼의 여성에게는 정숙을 요구하면서 결혼 적령기에 달한 중산층 및 상류층 따님들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의 꽁무니를 모든 젊은 부르주아 남성들이 얼마든지 뒤쫓고, 기혼 부르주아 남성의 바람기는 얼마든지 용인되었던 것이다. 시회에서는 게임의 룰이 완전히 성립되어 있었다. 부르주아의 가정이나 재산에 타격이 가는 일이 없도록 분별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프로테스탄트의 나라들에서는 성적 자제와 정숙의 윤리는 남녀를 똑같이 구속되었다. 윤리 파계 당사자들도 개인적 고뇌로 괴로워했다. ‘존경할 만한‘ 노동자 계급이 이 시대의 지배적 문화가치를 채택했고, 당연히 부르주아적 가치의 추종자일 수밖에 없었다. 중산계급 하층의 수효가 커짐에 따라 부르주아적 도덕은 더 유효했다.
성병 감염률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프로이센에서 베를린 수도권의 성병 감염률이 높았고, 인구가 적은 도시나 촌락일수록 낮았다. 가정으로부터 격리된 미혼 남자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항만, 군부대,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소도시에서 최고조에 달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그 사회의 성도덕의 기준대로 살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없다. 미국의 소녀가 혼자서 혹은 남자 친구와 함께 외출하기 위해 양친의 허락을 받는다는 사실은 성도덕이 완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 당시의 성에 관한 행실이 오늘 날이 우리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영어의 ‘to make love'(사랑을 한다)라는 말이 성교와 동의어가 된 것은 우리 시대에 일이다.
그와 동시에 1860년대와 1870년대는 모든 제2차 성징(性徵)이 그로테스크하리만큼 강조되었던 시기다. 남성의 경우 머리와 수염이 강조되었고 여성의 경우 머리와 젖가슴, 허리와 엉덩이를 쪽머리용 가발이나 ‘파리 엉덩이’라 불리던 솜뭉치 따위로 엄청나게 부풀려 올렸다. 마네의 유명한 그림인 [풀밭 위의 식사](1863년)가 주는 충격은 남성의 옷차림과 여성의 나체가 이루는 대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성이 본질적으로 정신적 존재라고 부르주아 문명이 강조해 마지않는 바로 그 자체는 바로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선수권을 다투는 스포츠 경기 전에는 이성을 일시적으로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 듯이, 성공은 향락과 동시에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명은 본능적 충동의 억제 위에 존립하는 것이다. 중산계급의 사회적 욕망과 사회적 역할을 전통적으로 규제해온 온 ‘중용(中庸)의 덕목에 그다지도 열정적으로, 극단적으로 주장되어야만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중산계급 하층의 욕구에 관해서 그 대답은 간단하다.
노력이 가난한 남녀 혹은 그 자식들을 수렁에서 건져내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 위에 올려놓고 그 지위로 확실히 뿌리 내릴 수 있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프로테스탄트 국가와 청교도 국가들에서 한창 성행했던 전면적 금주운동은 대중적 알코올 중독을 아주 근절시키자는 운동도 아니고 줄여보자는 운동도 아니었다. 존경받을 수 없는 빈민들과 구별되는 개성을 가진 사람들의 계급을 명확히 준별하려는 운동이었을 뿐이다.
성적 청교도주의도 이와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적 체통이 지배적 위치에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만큼만 ‘부르주아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다.
부르주아의 성적 퓨리티니즘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가족’은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적 사회단위일 뿐만 아니라 재산 및 기업의 기본적 단위이기도 했다. 가족은 여성 플러스 재산(‘결혼 지참금’)의 교환제도에 의해서 다른 가족 단위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은 순결한 처녀여야 했다. 가족단위를 약화 시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용납될 수 없었다. 무절제한 육체적 사랑만큼 가족단위를 약화시키는 것도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무절제한 육체적 욕구는 ‘부부 사이’를 갈라놓아 공동의 자산을 낭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미 가난한 가족경제 생활도 아니고 상류사회와 격리된 것도 아닌데 금욕, 중용, 절제의 미덕이 부르주아적 성공의 현실과 충돌하는 이 시대에 긴장은 특히 더 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출이다. 일하지 않는 유한 부르주아지들의 수가 늘고 있는데 정치권력을 장악했건 안했건 간에 돈을 쓰는 일 이외에는 달리 그들의 성공을 과시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벼락부자라는 말이 곧바로 분별없는 낭비와 동의어가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귀족의 생활양식을 흉내 냈다. 그리고 계급의식이 강했던 크루프(Krupp) 등과 같은 루르이 대기업주들처럼 융커(Junker)라는 칭호를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성을 쌓고, 또 융커에 못지않은 그보다 웅장한 산업적 봉건제국을 구축하면서 어쨌든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낭비는 비청교도적이다. 특히 여성들이 그러했다.
18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극소수의 문제가(독일은 거의 없었고) 이제는 하나의 계급적 문제가 되었다. 재화의 취득과 지출을 윤리에 어긋남 없이 만족스럽게 결합시키는 일은 어려웠다.
유능한 후계자 확보 방법으로 딸들을 활용했다. 결혼으로 새로운 혈통을 실업계에 끌어들였다. - 뷔페르탈(Wuppertal)의 은행가인 프리드리히 빌헬하우스(Friedrich Wichelhaus 1810~1886년)의 경우는 아들 넷 중 오직 로베르트만이 은행가가 되고 나머지 세 아들은 지주와 학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두 딸은 모두 산업자본가와 결혼하였으며 그 중 한명은 엥겔스 집안의 사람이었다.
부르주아지가 충분한 재산을 모은 19세기 말엽 부르주아지는 과거의 축적을 쿠션 삼아 금전의 취득과 소비를 결부시키는 적어도 일시적인 정식을 발견해냈다 1914년까지 부르주아지에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화창한 계절‘ ’좋은 시절‘이었다. 19세기 3사분기에는 이러한 모순이 극에 달했다. 성문제는 바로 이 모순의 한 희생물이 되었다. 위선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노력과 향락은 공존했지만 서로 충돌했다.
2
청교도주의와 자본주의 사이.
이윤을 추구하며 경쟁하는 기업들로 구성된 경제, 고립된 개인의 노력, 권리와 기회균등과 자유를 지상의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사회가 어찌하여 이 모든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제도에 의존해야만 했던가?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단위인 핵가족은 가부장의 독제로 개인 예속적 위계질서제의 축소판 이었다.
흔들림 없는 지혜를 가지고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주인인 그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
지켜주는 자, 이끌어가는 자, 그리고 심판하는 자,
그는 영화를 쌓아 올린다.
철학자 마틴 터퍼 - “가정의 선량한 천사인 어머니, 아내, 여주인”
러스킨 - 여자가 할 일
1.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
2.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일
3. 가족들에게 제대로 옷을 입히는 일
4. 집안의 질서를 지키는 일
5. 가족을 가르치는 일
여자들은 지성이나 지식을 나타내서도 안 되고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찰스 킹슬리 - “착하고 상냥하되 영리한 아가씨가 되지 말지어다.” 아내에게 한가로움과 사치를 제공할 수 있는 남편의 능력을 남에게 과시해야 하는 부르주아적 아내의 새로운 기능은 집안일을 실제로 꾸려나갔던 옛 아내들의 기능과 상충되는 것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열등성이 현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현명한 여자라고? 현명이란 소중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현명하지는 말아야 하는 법. 왜냐하면 여자란 복종해야 하는 몸이요,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니까’
-주석-
자식들은 또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친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였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하고, 노래를 연습하고, 글짓기를 하고, 피아노를 두드렸던 것이다.’ 이상은 빅토리아 여왕의 부근인 앨버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짓들이었다.
이러한 예쁘고 무지한 백치와 같은 노예에게도 지배하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 하인들에 대한
‘숙녀’란 자신이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 그 명령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확립하는 존재로 정의되었다.
노동자 계급과 중산계급의 차이는 하인을 데리고 있는 사람과 하인으로 전락할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인은 여성이 압도적이었다. 이상적인 부르주아 가정은 위계적으로 상하의 계층이 있는 많은 여성들 위에 남자가 군림하여 이들 여자를 지배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여자 하인(혹은 드물게 남자 하인)과 고용주는 실제로는 전인적인 종속적 관계다. 하인은 무엇이든 엄격하게 규제 받았다. 가구도 없는 주인집 다락방에서 기거했으며 앞치마나 유니폼, 증명서는(좋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증명) 권력과 복종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 평생을 살다 간 간호원, 정원사가 있었는가 하면 그 100배도 넘는 많은 시골처녀들이 잠깐 하녀로 일하다가 떠나갔다.
중요한 점은 부르주아의 가족구조가 부르주아의 사회구조와 정면으로 모순되었다는 점이다.
가족 내부에서는 결코 자유라든가 기회, 금전적 관계와 개인적 이익추구 따위가 지배적이지 않았다. 가정은 전쟁의 세계 속에 있는 평화의 오아시스, 다시 말하면 전사의 휴식처였던 것이다.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이냐’에 대해서 영국 섬유제조업자와의 경쟁으로 곤경에 처한 그녀- 모트-보쉬부인-의 남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질 것이며, 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몹시 다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가정을 ‘기쁨이 깃든 곳’으로 또는 만족한 상태라고 인정할 수 없는 바깥세계에 대해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가정을 평화의 은유로 묘사한다. 반면 ‘생존경쟁’ 혹은 ‘적자생존’을 논하는 사람들의 입에는 자연히 싸움의 은유가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기조의 본질적인 불평등성은 부르주아적 가족제 속에서도 필연적으로 발현된다. 집단적, 제도적, 전통적인 불평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 우월성에서 나온다. 우월성은 화폐에 의하여 표현되었고, 화폐는 단지 교환관계를 나타내므로 사람의 사람에 대한 지배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 형태에 의하여 보완되어야만 했다. 가부장제적 가족구조 형태는 새로운 것이 아니나 논리적으로는 부르주아 사회가 이러한 가족제도를 파괴하거나 변혁시킬 것으로 기대할 만도 했던 터에 부르주아 사회의 고전적 국면은 오히려 강화하고 과장하기까지 했다.
이상형 부르주아 - 남성들이 만들어낸 이론은 때로는 병적인 것으로까지 발전하여 어린 신부를 손수 골라 키우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가정이 존재했으며 심지어 한결 더 강화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이 페미니스트 운동의 시작의 설명해주기도 한다.
부르주아 가정이란, 개개인이 큰 족벌 속의 한 핵심을 이루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 크루프 가문, 포사이트 가문, 따위의 대가족적 결합이 곧 그것들이니, 이러한 가문은 19세기 사회경제사의 그토록 많은 부분이 본질적으로 세습적 왕조들의 지배와 같은 성격을 띠게 했다. 과거 1세기 동안 하층계급(소상인, 독립수공업자 등을 포함)의 극히 일부만 사회적 상승을 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출세 길이 열려 있었지만 교육, 재산 그리고 중산계급과의 사회적 유대를 가진 가문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유리한 출발을 했던 것만을 틀림없는 일이다. 큰 가문 혹은 가문간의 인척, 친척간계의 경제적 이점은 아직도 대단한 것이다. 사업 내부만 보더라도 자본, 그리고 거래 기회,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경영자의 제공을 약속하는 것이다. 19세기 경영사에서는 가족적 제휴와 상호침투의 예가 대단히 많았다. 1851년 릴의 르페브르 가문, 1847년 지멘스 할스케, 돌푸스-미크를 창설한 돌푸스 등등
3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었던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정의는?
경제적으로 전형적인 부르주아지란 자본가였다.
자본의 소유자, 자산으로부터 소득을 얻는 자 또는 이윤을 얻는 기업가
1848년 보르도의 상위 150개 가문에 90명의 실업가(상인, 은행가, 상점주인 등) 45명의 부동산 소유자 및 이자 취득자, 그리고 15명의 자유로운 전문직 종사자(당시 자유로운 전문직도 물론 일종의 사기업이었다) 1860년에는 상위 450개 가문 중에서 이들 집단이 최대의 단일 집단이 된다.
19세기 후반에 스위스 연방평의회 구성원의 25~40퍼센트는 기업가 또는 이자 취득자가 차지하였다.(평의회 구성원의 20~30퍼센트는 은행, 철도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연방귀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비율은 20세기 보다 오히려 다소 놓은 것이다. 연방평의회 구성원의 15~25퍼센트는 법률가와 같은 자유전문직 종사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때는 50퍼센트에 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30퍼센트는 직업적인 ‘공인’(지사, 지방판사 그리고 이른바 치안판사)에 의해 점유했다. 19세기 중반 벨기에 의회의 자유주의파의 83퍼센트는 부르주아였다. 즉 16퍼센트는 실업가, 또 16퍼센트는 ‘자산가’, 15퍼센트는 ‘이자 취득자’, 18퍼센트는 직업적인 행정관, 42퍼센트는 자유 전문직 종사자, 즉 법률가와 약간의 의학 관계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정(지방도)은 당연히 그 고장의 부르주아 명사들이 지배했다. 정치권력의 상층부는 수구적 집단들이 차지하고 있다. 해도 프랑스에서는 1830년 이후, 독일에서는 1848년 이후로 부르주아지들이 시평의회, 시장직, 지방평의회 등 “하층 정치권력을 공략하여 이를 정복하였다.”
위에 열거한 실업가, 재산소유자, 자유전문직 종사자 및 고급행정관은 중산계급이다. 부르주아지 내부계급 ‘대’부르주아지, ‘중소’부르주아지로 구분했다. 소부르주아지는 사실상 이 계급 밖에 있는 계층과 구분하기 힘들었다.
부르주아는 귀족과 구분됐다. 귀족집단의 법률적, 사회적 폐쇄성과 특유의 계급의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프로이센에선 부르주아가 절대 귀족이 될 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제국과은 하층귀족 칭호를 자유롭게 쓰면서도 중산계급의 은행가 또는 유대인으로밖에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영국만이 은행가와 금융업자를 체계적으로 귀족층에 흡수 시켰다.
1870년대 이후까지도 독일이 산업자본가들은 자녀가 군에 복무하는 것을 꺼려했다. 실업가들은 소매 상점주와도 날카로운 선을 그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독립 수공업자 및 인들소상인들은 분명히 중산계층에 속했지만 부르주아지와 아무런 고통점이 없었다. 부유한 농민들도 화이트칼라도 부르주아지는 아니었다. 소상품 생산자 또는 판매자, 숙련공, 감독공 (근대적 의미에서 기술적 기간요원 구실) 넉넉히 집결하게 되어 부르주아의 저변의 한계가 애매했다. 그들 중에서 성고하면 그 지방 부르주아로 받아들여졌다.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의 주요 특징은 전통적인 출생, 신분과 무관한 집단이고 ‘아무개’라는 존재가 즉 사람들에게 명령하거나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재산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한 개인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됐다.
부르주아 정치의 고전적 형태는 소부르주아지를 포함한 하층계급의 대중정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들 자신이 곤경에 처하거나 이의를 제기 해야 될 때는 자신 개인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또는 영향력 행사를 부탁하는 것, 즉 시장, 대의원, 장관, 학교나 대학 동창, 친척 또는 사업상 알게 된 사람들과 한두 마디 말을 나누는 일이다.
특히 고등교육기관의 동문회는 단지 지방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연대를 낳게 됨으로써 대단히 중요하였다.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대중운동을 조직하지는 않고 압력단체를 조직하였다. 정치의 모델은 차티즘(인민헌장운동)이 아니라 ‘곡물법(곡물수입 반대) 반대 동맹’이었다.
부르주아의 집단의식은 공통의 억단(이유나 근거 없이 추측으로 판단), 공토의 신념, 공통의 행동 형태에 바탕을 둔 것이다. 19세기 3사분기에 압도적으로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들은 기술, 과학, 이성을 신봉했다. 법의 지배 또는 빈자를 빈자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질서 속에서 지보와 대의정치, 일정 범위의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신봉했다. 그들은 종교 대신 문화를 믿고 신봉했다. 다윈주의는 사회적 다윈주의건 그 이외의 것이건 과학에 그쳤던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였던 거다. 부르주아가 돈다는 것은 단지 우월자가 된다는 것뿐 아니라 옛 청교도들의 그것과도 같은 도덕성의 실현을 의미한다. 부르주아는 국가나 신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율인간이었다. 한 사람의 고용주, 기업가 자본가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주인’, ‘지배자(공장주)’였고 ‘수호자’, ‘우두머리’였다. 집에서건 사업에서건 명령권의 독점은 부르주아지의 자기규정에서 결정적인 사항이었다.
지배라는 말은 열등성을 함축하고 있다.
사업상의 성공은 두뇌가 필요하지 않고 두뇌가 부를 보장하지도 않으며 더욱이 ‘건전한’ 견해를 심어주는 주는 것도 아이었다. 사업의 성공이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에 의해 달성된 예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절제와 노력이라는 덕목은 1860년대와 1870년대 성공한 미국의 백만장자들에게는 결코 적용시킬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계급에 ‘생물학적’ 우월성의 이론이 중요성을 더하게 된다.
계급적 우월성은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부르주아는 인류 진화의 높은 단계에 있는 인종에 속하며, 인류의 역사적, 문화적 발전의 유년기 또는 청년기에 머무르고 있는 하층계급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지배라는 개념과 지배적이 인종이라는 개념은 지배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종으로서 우월성이란, 오직 열등자가 이를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부르주아의 세계관 상징) 노동자들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고도 자기 처지를 만족스럽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 노동자는 ‘위험한 인물’ ‘외부의 선동자’로 간주되었다.
광산 지배인은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선동자)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투옥시켰다. 아무 느낌도 가질 줄 모르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니까”
고용주들의 절대적 권리인 고용권과 해고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 뒤에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다. 소유권 침해를 일단 허용하면 부르주아 사회가 망한다는 우려다. <파리코뮌> 참가자에 대한 대학살은 이러한 공포와 증오의 힘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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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는 우두머리들이 계급이었던가? 부르주아 계급은 지배계급이었던가?
옛 지주들은 그 지위로 인하여 소유지의 주민에 대해서 ‘법률상 또는 사실상’ 국가 권력을 행사했지만 부르주아지는 전용건물(나의 ‘가정‘은 나의 성) 밖에서는 국가권력과 행정기구 테두리 안에서 활동했다. 광산지대나 미국과 같은 국가 자체가 약했던 경우를 제외하고 구정치 엘리트들과 제휴하지 않고 통치권을 장악한 사례란 극히 예외적이다.
부르주아지가 행사했던 것은 주도권 즉 헤게모니였고 점차 정책에 대한 결정권을 증대해 나갔다. 경제발전의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도 자본주의 틀 안에서 유효하다.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외면하면 후진성을 감수하고 약체화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배권력이 당면한 문제는 주르주아-자유주의적 정치체제를 세우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 그리고 이와 더불어 부르주아지를 키워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적 강령은 자유주의적인 형태다.
문화적으로는 귀족이 전면적으로 자취를 감춤으로써 귀족적 생활양식에 대한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의 승리가 실현되었다.
1848년과 1870년 사이의 부르주아지 승리가 의심과 동요의 여지조차 없는 것으로 보였다. 비스마르크는 이 시대를 ‘물질적 이해’의 시대라고 보았다. 경제적 이해가 ‘기본적인 동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나는 국내적 발전에서 경제문제는 진전되어야 하고 또 멈출 수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 했다.
이 시대의 기본적 동인을 대표한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지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었단 말인가?
첫댓글 은진씨, 오늘 고생 많이 많이 하셨어요.
꼼꼼하게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적어내려간 덕에 전체적으로 점검을 잘 했네요~~^^*
땡큐여~~~^^
역시....리딩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은진씨 고생하셨고, 잘 자요~~
저는 커피 한잔하고 쉬엄쉬엄 책을 읽어볼까 합니다~~^^*
@헤이즐럿™ 네.....향이 좋네여~~~~~담 중에 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