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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욱...
하늘에서 모래사장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진 것이 어디로 떨어 졌는지 모래 속으로 파 뭍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무심하 듯 다시 먼 바다(海)를 바라본다.
"예경아, 걔서 뭐 하는 게냐?"
박할아버지께서 걸어오시며 물으신다. 예경인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냥 머언 바다 한 곳만 응시하며 쳐다보고 있다.
"예경아, 최씨 한 테서 전화가 왔었다. 널 많이 걱정하는 말투더구나. 정녕 아빠한테 전화 한통 하지 않을 셈인 게냐?"
박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최씨란 예경이 아빠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예경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박할아버지를 풀린 눈으로 바라본다. 박할아버진 가여운 듯 예경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셨다.
올해 11살인 예경이는 다른 또래 아이들 보다 몇 뼘은 더 성숙한 아이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몇 일전 엄마가 아닌 할머니와 크게 싸우시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가셔서는 몇 년째 돌아오시지 않은 아빠였다. 예경이는 그런 아빠가 무정(無情)하다고 정(情)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빠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아빠가 집을 나가시고 석 달 뒤, 엄마도 아무 말 없이 예경이가 학교 가 있는 사이 집을 나간 신 뒤 아직까지 소식 한번 하지 않으셨다. 예경이는 아빠보다 엄마가 더 증오(憎惡)스러웠다. 증오스럽다 못해 엄마라는 존재를 그냥 기억 속에서 지우고 살고 싶었다.
천천히 예경이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는요 아빠보다 엄마가 더 밉습니더. 그냥 엄마가 더 미워요. 아빤 그래도 간간히 전화라도 해 주신다지만 엄만 뭐예요, 그 길로 나가서는 여태껏 전화 한통화도 없고 딸인 나를 걱정이라는 걸 할까예?:"
예경인 참았던 눈물을 소매 끝으로 쓰윽 문지르며 닦았다. 박할아버지께서는 그런 예경이를 살짝 안으시며
“엄마 탓 하지 말거라. 엄마도 오죽하셨으면 그런 결정을 내리셨겠느냐, 엄마가 미워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란다.”
라며 타이르듯 말씀 하시고는 예경이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고는 예경이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예경이가 사는 동네는 알만 한 사람들이 알만한 곳인 어촌(漁村) 마을이다.
이순신 장군 당항포 대첩(大捷) 기념탑(記念塔)과 이순신 장군(將軍)을 기리는 기념관(記念館)이 있는 <당항포 국민 관광지(觀光地)>가 있는 어촌 마을이기 때문이다.
예경이는 집까지 데려다 주신 박할아버지께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건너 왔다. 할머니께서는 어디 나가셨는지 신이 보이지 않았다.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운 예경이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마을 뒷산에 있는 작은 암자(庵子)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덧 바깥은 바다가 해를 삼키듯 저녁노을이 붉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올라 예경이가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 찾는 암자에 도착했다. 인기척을 내어 보았지만 스님께서는 어디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으신다. 예경인 스님이 기거(起居) 하고 계시는 방으로 가 문을 슬며시 열어 보았다. 스님의 성격처럼 방은 말끔히 청소 되어 있었다. 가구라고는 앉은뱅이책상과 벽에 박혀있는 못 서너 개 그리고 옷장이 전부였다.
예경이는 다시 걸음을 옮겨 서너 사람들이 들어가면 금세 차버리는 법당(法堂)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 전에 합장(合掌)을 한 뒤 방석을 깔고 앉아 눈을 감았다.
‘부처님, 저 참 나쁜 아인 거 같아요. 왜 이토록 아빠 보다 엄마가 더 미운 걸까요? 미워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 잡아도 뒤 돌아서면 돌이킬 수 없게 되니 저 자신도 미워요. 할머니께서는 엄마 보다 아빨 더 원망하시는데 전 왜 엄마가 더 미운 것인지...’
문득 인기척이 났다.
예경이는 눈을 떠 문 쪽을 보았다. 스님께서 웃고 계셨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내려 서며 스님께 합장을 했다.
“너로구나. 또 답답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누가 우리 예경이를 또 답답하게 했을까. 아차 스님이 아랫동네에 내려가서 찐 고구마를 얻어 왔는데 먹고 내려 갈련?”
예경인 고개를 끄덕였다. 예경이는 스님이 참 좋았다. 누구처럼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물어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께서 바구니에 찐 고구마를 담아 들고 나오셨다. 나무 밑 평상에 앉아 스님께서 내어 오신 김치와 고구마를 먹고 있던 예경이는 문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원하게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예경이는 엄마가 집을 나가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바다가 참 좋았다. 그러나 엄마가 집을 나간 후로는 갑자기 바다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서 누구 하나 빼앗아 가지 않은 바다가 왜 갑자기 싫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스님께서 입을 여셨다.
“무얼 그리 생각을 하는 게냐. 벌써 날이 이렇게 많이 어두워 졌구나. 스님이 암자 입구(入口)까지 데려다 주련?”
예경이는 혼자 가겠다고 하고는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 온다. 그렇게 내려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박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박할버지댁(宅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잠시 예경이 눈에 흔들려 보였다. 조용히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 할아버지를 불렀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 손녀가 현관문(玄關門)을 열고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어, 예경이구나. 어쩌지 할아버지 방금 할머니랑 함께 외출(外出)하셨는데... 무슨 일 있니?”
“아니, 그냥 놀러 왔다. 할아버지 늦게 귀가(歸家) 하시나?”
“모르겠어. 할아버지 들어오시면 너 왔었다고 전해 줄게. 아차, 들어와서 조금만 놀다 가지 그러니?”
예경이는 됐다고 말하고는 할아버지 집에서 나왔다. 할아버지 손녀(孫女)는 예경이보다 세 살 위인 14살 중학교 1학년이다. 예경인 그 언니가 좋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식적으로 위장한 것처럼 보여 싫었지만 그 언니만큼은 그렇게 보이지 않아 좋다. 언니 이름이 뭐라고 했었더라?
예경인 바닷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 왔다. 할머니께선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잡숫고 계셨다. 예경이가 들어 온 것도 못 들으셨는지 열심히 진지 잡숫기에 바쁘다. 자기 방으로 건너 온 예경이는 책상 앞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어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간다. 학교에서 검사 받는 일기장이 아닌 예경이 만의 비밀일기장인 셈이다.
<여름방학도 이제 겨우 이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숙제도 하나도 해 놓지 않고 여기 저기 들 쑤시고 다니기 바쁘다. 할 일도 없고 오라는데도 없는데 그냥 발길 닿는 대로 하루종일 밖으로 돌아다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게 하루 일과(日課)처럼 되어 버렸다. 특히 뒷산에 있는 암자에 가는 게 제일 좋다. 거기 사시는 스님이 난 너무 좋다. 아무것도 물어 보시지 않으시니까... 우리 할머닌 교회에 다니신다. 그러나 난 교회가 싫다. 싫은 이유가 없다. 그냥 싫다. 그런데 뒷산 암자에 가면 그렇게 마음이 평온할 수가 없다. 할머니는 내가 절에 가는 걸 싫어하신다. 할머니 따라 교회 가는 걸 원하시지만 난 몇 시간이고 앉아 설교(說敎) 따위 듣는 게 지겨워 몇 번 따라 다니다가 관뒀다.
오늘도 절에 가서 스님과 함께 고구마를 먹고 스님께 인사를 드린 뒤 마을로 내려왔다.
방학숙제 해야 하는데 손대기가 싫다. 다른 숙제는 안 하더라도 일기라도 꼬박 써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귀찮다. 다른 친구들 같으면 숙제하라고 엄마들이 잔소리 할 테지만 나에겐 그런 잔소리 할 엄마가 없으니 불행 중 다행인 거 같다.>
이렇게 써 내려가던 예경이는 어느 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녘..
바다 저 멀리 뱃고동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예경이는 문득 무엇에 홀린 듯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방바닥이 아닌 책상 의자에서 일어난다. 예경이는 어제 자기가 바닥이 아닌 책상에 엎드려 잔 것이 생각이 나질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마당으로 내려서서 수돗가로 가 물을 길러 세수를 한 뒤 박할아버지 댁으로 걸음을 옮긴다. 박할아버지 댁에 다다른 예경이는 열려져 있는 대문(大門)을 조심히 열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언제 일어 나셨는지 박할아버지께서는 그물을 손질하고 계셨다. 인기척을 느끼신 박할아버지께서는
“이제 오느냐, 그래 마음은 단단히 먹은 게냐?”
“네, 할아버지. 근데 춥지 않을까예?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어오는데 많이 잡힐까요?”
예경이는 걱정스레 박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글쎄다. 그래도 하는 수 없잖느냐. 예경이 네가 이렇게 풀이 죽어 있는데 고기잡이가 특효(特效)인거 이 할애비가 더 잘 알잖느냐, 안 그러냐?”
예경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경인 울적하거나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박할아버지와 함께 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였다.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도 귀찮아 언제부터인가 박할아버지와 함께 아침 동(東) 트기 전에 고기잡이 나가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물 손질을 다 마무리 하신 박할아버지께서 잠깐 집 안 으로 들어가시더니 작은 보따리를 챙겨 가지고 나오셨다. 할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배가 묶여져 있는 방파제(防波堤)로 와 박할아버지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향했다. 박할아버지께선 직업이 어부는 아니시지만 취미삼아 낚시 하시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씀 하시곤 한다.
박할아버지께서는 고향이 이곳이 아닌 경기도라고 하셨다. 경기도에서 나고 자라신 할아버지께서는 십년 전 까지 경기도에서 어린 시절부터 대학 교수 생활 하실 때 까지 할머니와 단 두 분이서 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대학교수직을 퇴직(退職) 하시고 조용한 곳을 찾아보시다 이곳에 정착 하신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예경이는 이 말을 되새길 때 마다 박할아버지가 참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어느 덧, 배는 뭍에서 꽤 멀리 와 있다.
예경이는 박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낚시대를 잡고 힘껏 바다 속으로 내 던졌다. 박할아버지도 손질 해 오신 그물을 바다로 힘껏 내 던지시며 예경이를 보시고는 입을 여셨다.
“예경아, 어제는 잘 잤느냐? 어제 손녀한테서 네가 왔었다는 말을 들었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아닙니더, 일은 무신 일이예. 그냥 절에 갔다가 내려오면서 들른 거라예. 어제 늦게 어데 갔다 카시데예? 오데 갔다 오셨습니꺼?”
“시내에 잠시 나갔다 왔단다. 살 것도 있고 해서. 예경이 너 집에 데려다 주고 집에 가자 마자 나갔었지. 실은 어제 울 할마시 생일 이었거든. 그래서 선물이라도 하나 사주자는 생각에 시내에 나갔던 거란다.”
예경인 아차 싶었다. 그랬다. 어제가 박할아버지 댁 할머니 생신(生辰)이었던 게 불현 듯 생각이 났다. 박할아버지 댁과 예경이 할머니께서는 10년 동안이나 왕래(往來)하시면서 서로 친하게 지내 오셨던 것이다. 예경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는 예경이도 할머니를 따라 줄곧 박할아버지 댁으로 놀러를 자주 가곤 하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박할아버지 생신 때나 그 댁 할머니 생신 때면 으레 떡을 직접 찌셔서 예경이랑 함께 갖다 드리곤 하였다. 그런데 이 일마저도 삼년 전에 예경이 할머니께서 무릎을 다치시면서 못하시게 되셨다. 이런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신 분들도 박할아버지 내외분들이셨다.
이런 분들 생신을 예경이는 올해는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다른 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던 예경이의 낚싯대가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박할아버지의 소리에 예경이가 정신을 차리고 낚싯대의 줄을 감았다. 참돔 한 마리가 줄 끝에 대롱 대롱 매달려 있었다.
“예경이 실력 많이 늘었구나. 꽤 큰 놈으로 한 마리 잡았으니 예경이는 오늘 수확(收穫) 제대로 했구나. 기분 좋으냐?”
예경이는 대답 대신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먼 바다까지 나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예경이가 생각 했던 우려와는 달리 날씨도 좋고 바람도 잠잠하고 파도도 잔잔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시던 박할아버지께서 그물을 그냥 놔두신 채 선실(船室)로 들어가 할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나오셨다. 예경이는 뱃머리에 앉아 박할아버지와 함께 늦은 아침을 들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할아버지께서는 그물을 끌어 올리셨다. 꽤 많은 양의 고기들이 그물에 걸려 배선반 위로 끌어 올려졌다. 박할아버지께서 만족스러운 표정이셨다.
“할아버지예, 오늘 수입이 좀 좋네예. 그치예?”
“그렇구나. 슬슬 마무리 짓고 돌아갈까?”
예경이도 할아버지를 도와 그물을 마저 끌어 올렸다. 뭍으로 돌아 올 때쯤엔 해가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
뭍으로 돌아와 배를 단단히 묶고 예경이와 할아버지는 박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예경이를 다시 불러 들이 고는,
“예경아, 점심이라도 들고 가지 그러냐. 집에 가봤자 혼자 또 먹을 게 아니냐?”
“아닙니더, 아까 먹었던 게 아직도 소화 덜 됐심니더. 그냥 갈께예. 오늘 고마웠습니더.”
잽싸게 나갈려던 예경이를 다시 부르시고는 물고기 몇 마리를 더 챙겨 주셨다. 예경이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점심도 거른 채 냄비 하나를 꺼내어 예경이가 직접 잡은 참돔으로 매운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참돔을 반으로 잘라 머리 부분은 따로 남겨 두고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고기 몸뚱어리로 매운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한 여름이라 불길 앞에 서 있으려니 저절로 땀이 흘렀다. 다 끓인 매운탕의 맛을 한 번 보고는 흡족한 듯 웃어 보이고는 뚜껑을 닫아 박할아버지 댁으로 가지고 갔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를 불렀다.
“계십니꺼? 할머니예 안에 게십니꺼?”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예경이는 현관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용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신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집 안 공이기는 ‘쏴’하게 예경이의 몸을 훑었다. 예경이는 가만히 두 분의 침실(寢室)로 걸음을 옮겨 가 방문을 조심히 열었다. 매끄럽게 열리던 문 너머로 쾨쾨한 냄새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예경이는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예경이는 손에 들고 있던 매운탕 냄비를 손에서 떨어트렸다. 이럴 수가 없었다. 아침나절 까지만 하더라도 박할아버지와 낚시 잘 갔다 오라며 웃으면서 손까지 흔들어 주시던 할머니께서 피를 방바닥에 쏟아 놓으시고는 쓰러져 계셨다. 예경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방안으로 들어 가 할머니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할머니를 내려다보며 코앞으로 손가락을 갖다 대어 보았다. 숨을 쉬고 계시지가 않았다. 예경이는 한꺼번에 무서움과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다 박할아버지 손녀인 서윤이와 부딪혔다. 그러나 예경이는 언니를 본체만체 하며 집으로 곧장 달려 왔다. 잠시 후 박할아버지 댁에서 비명(悲鳴) 소리가 들려왔다. 예경이는 귀를 막고 눈에 힘을 주고 감아 버렸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누가 그런 짓을 한 것 일까? 예경이는 알 수 없는 불안감(不安感)에 할머니가 안 계신 집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집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워 예경인 집을 나와 다시 박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서윤이가 새파랗게 질려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박할아버지께서는 어디에 가신 걸까? 분명 집으로 들어가신 걸 봤는데 그 사이 어디에 가신 거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예경인 더욱더 몸서리가 쳐졌다. 이러고 있으면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 예경이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예경이는 차마 입을 떼지 못 하고 우물쭈물 거리다 마음을 다 잡고 입을 떼었다.
“다른 게 아니라 옆집 할머니께서 죽어 계셔서요. 여기 꽃무리 동네인 데요 빨리 좀 와 주세요.”
“네, 잘 알겠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죠.”
이렇게 말을 끝내고 예경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박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예경이는 가만히 언니를 불러 보았다.
“서윤 언니 있나? 내 예경이다. 집에 있나?”
서윤이는 대답 대신 멍한 눈으로 예경이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려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언니야, 정신 차려 봐라. 경찰서에 내가 조금 전에 연락 했응께네 쪼매 있으믄 경찰 아저씨들 올끼다. 그런데 아침나절에 할아버지랑 낚시 간다고 점심 까지 싸주시면서 잘 갔다 오라고 손 까지 흔들어 주시던 할머니가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당했는지 내도 모르겠다. 낚시하고 돌아와서 할아버지께서 집에 들렀다 가라는 거 할 일이 있어서 그냥 집으로 갔었는데 와 보니까 할머니 이래 되어 있더라. 언니야 내 말 듣고 있나?”
서윤이는 흐린 초점을 거두고 예경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경이가 경찰서에 전화를 걸고 정확이 십분 후에 경찰관들이 박할아버지 댁에 들어서고 있었다.
“계십니까?”
서윤이는 일어나 경찰들을 맞았다. 그러고는 할머니께서 죽어 계신 방으로 안내를 했다. 함께 온 119 구조대원이 할머니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별다른 외상(外傷)은 없다고 말했다.
“최경장(警長)님, 별 다른 외관상의 문제는 없는 걸로 보이는데요.”
최경장이라는 사람이 그 말을 전해 듣고 전화를 건 학생이 누구냐고 물었다. 예경이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보였다. 최경장이
“그래, 너로구나. 할머니를 어찌 발견하게 되었니? 같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네, 이 댁 할아버지랑 아침에 낚시 갔다가 돌아와서 지는 할아버지께서 놀다 가라는 거 할 일 있다고 말하고 집으로 바로 갔었지예.”
“그 때가 몇 시쯤이었는지 기억하니?”
예경이는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도무지 몇 시였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고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고예, 할머니 생신이었다는 게 생각이 나서 집에서 매운탕을 만들어서 이 집에 온 시각이 아마 세시 쪼매 넘었었을 겁니더.”
최경장이라는 사람이 수첩에 예경이가 말 한 그대로를 옮겨 적으며 이리 저리 할머니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박할아버지께서 들어오시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 앞까지 오신 박할아버지께서 소스라치시며 손에 들고 계시던 꽃다발을 내 던지다 시피 하시며 방으로 들어오셨다.
“할멈, 눈 좀 떠봐요, 할멈...”
박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를 있는 힘껏 흔들어 깨우셨다. 서윤이는 그런 할아버지가 안 돼 보였는지 박할아버지를 말리려고 애썼다.
“할머님, 바깥 분 되십니까?”
“그렇소만, 어찌 된 일입니까? 우리 할멈이 왜 이리 되었소?”
“외관상 다치거나 외상 입은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타살(他殺)이 아닌 자살(自殺)로 보여 집니다. 할아버님께서 이 아이와 같이 낚시 갔다 집에 돌아 온 시각(時刻)이 언제쯤이셨는지 기억 하십니까?”
박할아버지께서는 낚시를 마치고 집에 들어 온 시각과 집에 들어와서 샤워 마치고 시내 나간 시각까지 정확하게 말씀을 하셨다. 박할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서윤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똑같은 질문을 했다.
“네가 집에 들어 올 때 누가 있었느냐?”
“제가, 집에 들어 온 것이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요. 그땐 이 아이가 뛰쳐나가는 걸 보았고요. 거실로 들어서니 쾨쾨한 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때 다른 경찰(警察)이 부엌에서 뭔가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최경장님, 이거 보십시오. 웬 약봉지가 식탁위에 있던데요.”
서윤이는 경찰이 들고 있던 약 봉지를 올려 다 보았다. 그 약은 할머니께서 평소에 두통이 심하셔서 복용(服用)하고 계시던 두통약이었다.
“그 약, 할머니께서 평소에 두통이 심하셔서 꾸준히 복용하고 계시던 두통약 이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최경장은 이 약을 언제부터 복용하였는지 물었다.
“그 약 복용한지 꽤 됐소이다. 이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 삼년 쯤 지난 후부터 복용했소. 그게 벌써 7년이 됐네 그려. 이사 온지 10년이 되었으니까.”
최경장은 서윤이에게 약 남은 게 있으면 한 봉지만 달라고 하여 챙겼다. 그러고는 시신(屍身)을 더 세밀하게 검사하기 위해 국과수(국립과학수사원)에 의뢰 할 거라는 말과 검사결과는 나오는 대로 전화를 주겠다는 말과 함께 할머니 시신을 수습하고 들것에 실어 나갔다.
“꼭 좀 원인을 밝혀 주시오. 그럼 감사들 합니다. 살펴들 가시오.”
박할아버지와 셔윤이 그리고 예경이는 경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 왔다. 어질러 져 있던 집을 대충 정리 하고 박할아버지께서는 큰방을 청소 하셨다. 큰방에서 새어 나오는 쾨쾨한 피 냄새가 온 집안을 물들여 놓았다. 예경이는 청소를 거들어 주며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할머니께서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걸까? 정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닐까?’
예경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더 이상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싫어서였다. 박할아버지께 그만 집에 가 보겠노라고 말씀을 드린 뒤 집으로 돌아온 예경이는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께서는 옆집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걸 모르시는 듯 했다.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언제 오셨으예. 저녁은 잡수셨습니꺼?”
“니 오데 갔다 이제 들어 오노. 니 사마 저녁 묵었나? 근데 얼굴이 와 글노? 무슨 일 있나? 어데서 오는 기고?”
“박할아버지댁에서요, 할머니, 옆집 할머니께서 돌아 가셨습니더. 무슨 변(變)인지 모르겠습니더 참말로...”
할머니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예경이는 그런 무덤덤한 할머니가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예경이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몇 숟깔 뜨지도 않고 밥상을 물러 놓고 자기 방으로 건너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눈만 더 말똥말똥 해질 뿐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예경이는 바닷가 쪽으로 난 창문을 열어 놓고 고개를 쑤욱 내 밀었다. 초저녁의 비릿한 짠 바다내음이 예경이의 코끝을 간질고 지나갔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박할아버지댁을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다시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린 예경이는 붉게 물드는 바다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인기척에 마루로 내려 선 예경이는 할머니와 박할아버지를 발견 하고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두 분이서 하시는 말씀을 한 글자라도 빼 놓지 않고 들으려는 듯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셨으예? 그래 예경이한테 들었습니더. 서윤이 할매 갑자기 죽었다고예? 우짜다가 돌아 가신 겁니꺼?”
“그러게 말입니다. 시내 나갔다가 돌아오니까 시신 수습을 하고 있지 뭡니까? 저랑 예경이가 바다로 나가고 나서 우리 할멈이랑 만나지 않으셨소?”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박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 작은 단서 하나라도 찾을 요량으로 할머니께 오셔서 물어 보 신듯 하셨지만 할머니께선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신 눈치셨다. 두 분의 대화를 다 듣지도 못하고 예경이는 방으로 건너와 다시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바다는 더 조용해 보였다. 창문으로 바다를 보면 오른쪽으로는 방파제가 길게 드러누워 배들이 그 주위로 정박(碇泊)되어 있고 왼쪽으로는 작은 소나무 숲이 조성 되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어촌마을이라 그런지 살고 있는 가구라고는 열대여섯 채(寨)도 되지 않았다. 마을 뒤로는 예경이가 다니고 있는 조그마한 분교가 자리 잡고 있고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보면 이순신 장군 동상과 옆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기념비(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예경이는 잡다한 생각을 버리려 방을 나와 신이 놓여 있는 댓돌로 내려서며 아직 이야기 중이신 두 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박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언니 있나? 내 들어 가도 되나?”
“어, 예경이니? 들어 와. 어쩐 일이니?”
예경인 거실로 들어서며 집을 훑어보았다. 집은 어느 샌가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었다. 깔끔한 서윤이가 청소를 해 놓았으리라고 생각한 뒤 예경이는 서윤이한테 묻고 싶은 걸 물었다.
“언니야, 언니 엄마 아빠한테 전화 드렸나? 할아버지 우리 집에서 우리 할머니랑 이야기 나누고 계신다.”
“아니, 아직 전화 못 드렸어. 아니 전화를 못 걸겠어. 무섭고 그리고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서 말야.”
예경이는 누구보다 서윤언니의 지금 심정을 잘 이해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또 몇 일 남지 않은 방학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몇일 후...
예경이는 일찍 잠자리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할머니방에 건너가 할머니를 깨웠다.
“할머니, 아직 주무십니꺼? 퍼뜩 일어 나이소, 오늘 옆집 할머니 장례식이다 아입니꺼...”
할머니께서는 예경이의 깨우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 나셔서 몸을 청결히 하시고는 하얀 모시한복으로 갈아입으시고는 옆집으로 향하셨다. 예경이도 얼른 씻고 검은 옷으로 갈아 입은 뒤 박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저 멀리 서윤언니가 눈에 띄였다. 서윤언니 옆엔 서윤언니 부모님인 듯 한 아저씨 아주머니께서는 손님맞이에 여념(餘念)이 없으셨다. 박할아버지 댁은 친지나 가까운 지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예경이는 박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서려다 그냥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예경이의 눈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주루룩 흐르기 시작했다. 예경이는 흐르는 눈물을 얼른 닦아 내며 살아 생전 옆집 할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을 되 새겨 보았다.
“예경아,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운 시기와 만나는 거란다. 아마 예경이가 지금이 그 시기인가 보구나. 그래도 죄는 미워하대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예경이가 엄마랑 아빠를 조금이나마 이해 해 줄 수는 없겠니?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연락을 끊고 사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바쁜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며 살아 보거라. 그럼 한결 기분이 나아지겠지, 안 그러냐?”
예경인 이 말을 수도 없이 들어 왔었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예경이 자신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빠보다 엄마가 용서되지 않은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예경이는 죽은 옆집 할머니께 다짐했다. 더 이상 엄마나 아빠를 미워 않겠다고 그냥 기다리겠다고....
상여를 내어 가는지 곡소리가 들려왔다. 스님들의 염불(念佛) 외는 소리와 장사지내는 사람들의 곡소리가 한데 흩어져 나와 절묘하게 섞여 가고 있었다. 예경이는 자기 방으로 건너와 창문을 열고 박할아버지 댁으로 눈길을 돌렸다. 상여가 나가고 그 뒤로 박할아버지와 그리고 할머니 그리고 뒤로 서윤언니와 서윤언니 부모님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따라 나서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한참을 보고 있던 예경이는 그 자리에 털썩 쓰러져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예경이는 인기척에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할머니께서 들어서시는 소리였던 것이다. 예경이를 보시고는
“밥은 묵었나? 안 묵었으면 박영감 댁에 가서 한 그릇 먹고 오니라. 나는 묵었으니까는 얼른 가서 한 그릇 먹고 오니라. 말 해 놨으니께.”
예경이는 싫다는 말을 못 하고 박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저녁바람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꽤 쌀쌀했다. 박할아버지 댁에 다다른 예경이는 서윤이를 발견하고는 서윤이 곁으로 갔다.
“언니야, 할머니 잘 배웅 해드렸나? 화장 안 하고 묻기로 했나?”
“어, 잘 배웅해 드렸어. 날씨가 너무 더워서 고생했지만 말이야. 그래 저녁은 먹었니? 너네 할머니께선 잡수시고 가셨어. 먹을 거 갖다 줄까?”
예경이는 괜찮다라는 말과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선 친지 몇분과 서윤언니 어머님께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계셨다. 예경이는 서윤이 엄마 곁으로 가 인사를 하고는 일 손을 거들었다.
“안녕하십니꺼? 처음 뵙지예, 지는 예경이라고 합니더. 바로 옆집에 살고 있습니더. 처음 뵙겠습니더.”
예경이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께서는
“아 그래요. 반가워요. 우리 서윤이 한테 예경양 말 많이 들었어요. 착하고 똑 부러진다고 서윤이가 말을 하던데 서윤이 말대로 그래 보이는 군요.”
“아주머니 말씀 놓으세요.”
“그래도 되나? 알겠어요. 그래 저녁 전이고?”
예경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주머니께서는 국그릇에 쇠고기 국을 한 그릇 가득 채워 예경이 앞으로 밥과 함께 내어 놓았다.
“잘 묵겠습니더. 하나만 물어 봐도 됩니꺼?”
아주머니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른게 아니라예 서윤언니는 우찌해서 여기서 학교를 댕기게 됐슴니꺼?”
아주머니께선 한참이나 대답이 없으셨다. 그러시고는
“우리 서윤이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은 아이였단다. 이 병원 저 병원 다 돌아 다녀 봤지만 그 뿐이었단다. 그래서 예경양도 알다시피 서윤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이곳으로 전학을 오게 된 거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픈 것도 웬만큼 낫게 된 거지. 서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윤이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하신거지. 지금도 그렇고... 그리고 어머님이 어떡해 돌아 가셨는지 아직 정확하게 듣지를 않아 잘 모르겠다만 어머님도 고생 많이 하시고 돌아가신 거 같아 마음이 편하질 않구나.”
예경이는 하던 숟가락질을 잠시 멈추고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예경이는 그릇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 많던 사람들은 거 진 다 빠져 나가고 집은 한산했다. 예경이는 박할아버지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셨다. 서윤이는 아직 돌층계에 앉아 있었다.
“언니야, 뭐 하노? 벌써 날이 어두워 졌는데 할아버지는 오데 갔는데?”
“할아버지 아직 할머니 옆에 계실거야. 날도 어두워지는데 왜 안내려 오실까? 이상하네.”
그 때 마당으로 서윤언니 아버지께서 나오시면서
“서윤아, 할아버지 아직 안 오신 게냐?”
라고 물으시며 예경이를 쳐다보셨다. 예경이는 꾸벅 인사를 했다.
“네, 아빠 아직 이 시네요 할아버지... 갔다 와 볼까요?”
아저씨께선 고개를 끄덕이셨다. 예경이는 서윤이와 박할아버지 댁을 나와 할머니께서 묻혀 계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는 벌써 물속으로 숨은 지 꽤 시간이 지난 거 같았다. 할머니가 묻혀 계신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나무 숲에서 조금 떨어진 평지에 있었다. 박할아버지께서는 그저 묵묵히 어둠을 등지고 할머니 무덤만 바라보고 계셨다. 서윤이가
“할아버지, 날도 어두워 졌는데 이제 집으로 돌아 가셔야죠. 엄마랑 아빠가 기다리고 계신데 안 가 실거예요? 날도 어두워 졌고 바람도 찬데 감기 드시겠어요 얼른요.”
그래도 박할아버지께서는 미동(微動)을 않으셨다. 서윤이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서윤이는 가만히 박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박할아버지께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계셨다. 그러고는
“서윤아, 네 할미 잘 갔겠지? 아주 편하게 저 하늘나라로 잘 갈겠지? 근데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다니, 아직도 네 할미 이 할애비 곁이 있는 것만 같구나... 서윤아, 정말 울 할멈 저 하늘나라로 떠난 거 맞지?”
서윤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서윤이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고이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예경이는 할아버지를 등지고 바다로 몸을 돌렸다. 어느 새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바다와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