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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조너선 스위프트 - 《걸리버 여행기》
소인국의 와각지쟁(鍋角之爭)
백성을 뜻하는 검수(黔首)라는 한자어는 직유의 표현이다. 먼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들의 세계란, 검은 머리밖에 보이지 않는 미미한 존재들로 득실거리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무채색을 가지고 누가 더 잘난 명도와 채도이냐를 따지며, 당쟁과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자존감들은 장자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와각지쟁 (鍋角之爭)'의 형국이다.
거인 걸리버의 시야에 맺히는 소인국의 풍경은, 먼발치에서 인간 세계를 조망하고 있는 부감(俯瞰)이다. 소인들이 볼 수 있는 세세함을 걸리버의 큰 눈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지만,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걸리버의 시야는 소인들의 시력을 벗어나 있는 범주이다. 이런 생리적인 시력의 차이는 관점의 차이로 이어진다. 걸리버의 시각에서 바라본 소인국들의 정치 역학은, 그다지 문제가 될 사안이 아닌 것들을 문제시하는 명분 싸움에 지나지 않다. 소인국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왕에게 작위까지 하사받은 걸리버는, 갈등의 중재자를 자처하다가 도리어 질투의 시선들에게 참소를 입고, 결국엔 소인국을 떠나게 된다.
소인국 릴리퍼트에 대한 걸리버의 첫인상은, 아주 이상적인 복지국가였다. 적어도 '거지'라는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왕은 항상 낮은 자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굽어 살핀다. 그러나 릴리퍼트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이 떠나온 영국과 다를 바 없는 부조리들의 소축적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거지가 없을 뿐, 사회적 계급은 세대를 거쳐 경제와 문화를 재생산하는 순환의 고리이다. 관리임용의 관건은 그저 국왕을 기쁘게 하는 기교의 우열이다. 너무도 자비로운 국왕의 인품이지만,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고자 신하들과의 합을 맞추는 페르소나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가령 사법부는 필요 이상의 가혹한 형량을 때리고, 국왕의 역량과 아량으로 선처를 하는…. 걸리버의 큰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이 작태에 걸리버 자신도 걸려들고 만다. 사형의 언도가 국왕의 선처로 인해 그나마 그 큰 눈을 멀게 하는 것에 그치는….간신들의 참소와 국왕의 선처가 상징하는 바는, 자신들의 관점이 진리일 뿐, 자신들의 세계에서 이방인의 시각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비록 넓고 높은 안목일지라도…. 걸리버 역시 관점을 잃어 가면서까지이 나라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걸리버 여행기》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걸리버가 다른 소인국의 전함들과 대치하는 장면은, 달걀 깨는 법에 관한 웃기지도 않는 이념의 역사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릴리퍼트의 선왕은 달걀을 깨다가 껍질에 손을 베인 이후, 보다 안전하게 달걀을 깨는 방법을 법령으로 선포한다. 넓은 모서리가 아닌 좁은 모서리 부분으로 깨야 한다는…. 그런데그 우스꽝스러운 법령의 근거는 '편리한 대로 깨라'고 적혀 있는 소인국의 성경 구절이다. 그것을 국왕이 '편리한 대로' 해석한 결과였다.
창조주께서 아무리 할 일이 없기로서니 인간들이 달걀 깨는 방법의 옳고 그름에까지 관여하시겠는가. 이 부분은 성공회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갈등으로 심화되었던 당대의 영국을 꼬집고 있는 풍자라고 한다. 조선의 당파 싸움을 '찍먹'과 '부먹'에 관한 탕수육 커넥션으로 설파한 어느 블로거의 재치, 실상 신념이 딛고 있는 명분이란 게 그 기원으로 소급해 올라가 보면 탕수육의 비유가 희화적 각색이 아닐 정도로 허망한 경우들이다. 스위프트의 시선에서는 정작 신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적통과 이단을 변별하고자 영국의 전역이 들끓었던 와각지쟁에 지나지 않았다.
중동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근거는 성경의 구절이다. 그런데 문화인류학적으로 고찰해 보면, 땀구멍이 없는 돼지가 중동 기후에서 발생하는 전염병에 취약해 아예 율법으로 금한 경우이다. 즉 풍토와 시대의 조건을 감안해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고자 한 결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최초의 원인은 잊혀지고, 율법 그 자체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금기의 명분으로 존속하게 된다. 몽테뉴의 말을 빌리자면, ‘법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하는’ 경우이다.
릴리퍼트의 선왕이 달걀 껍질에 손을 베인 사건으로 인해 선포된법령은, 물론 백성들을 사랑하는 군주의 마음이었다. 문제는 백성들에게는 달걀 껍질이 그렇게까지 불편한 사안이 아니었다는 점, 도리어 정해진 방법대로 깨어야 한다는 법령이 '정초(定礎)적 폭력'이다. 그깟 달걀 깨는 법이 뭐라고, 달걀에 대한 자유를 주장한 이들은 반군으로 내몰리고, 급기야 이웃국가인 블레훠스크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소인국에 존재하는 단 두 나라의 갈등은 이런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던 걸리버는 블레훠스크의 국왕을 알현하며 도리어 릴리퍼트의 국왕보다 더 사려 깊은 면모를 확인하지만, 아울려 확인한 현실은 정치적 이념의 허망함이었다. 결코 양국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자신이 떠나온 영국이 바로 이 세계의 대축적에 불과하며, 그 대축적 안을 살아가던 소인이 바로 자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광학의 스펙트럼
걸리버의 여행은 물론 그의 모험심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의사로서의 도덕적 소신과 현실적인 생계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환자들에게 사기를 쳐가면서까지 부의 축적에만 몰두하는 당대 의료계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지만, 양심만 지키고 있다가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껴야 할 판이었다. 때문에 선원들과 함께 항해를 하면서 그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일로써 생계를 이어 가다가 조난과 표류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소인국에서 돌아온 걸리버는 돈을 벌기 위해 다시금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이번에는 거인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이전에 겪은 소인국에서와는 입장이 뒤바뀐 처지, 비로소 미시적 관점이 가능해진 걸리버에게는 그 세세한 풍경들이 도리어 불쾌의 자극으로 다가온다. 확대의 축적으로 마주한 거인들의 땀구멍과 털, 그리고 같은 축적에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체취 등으로 인해 깨닫는 사실은, 소인국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찌 느꼈을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내심 소인국의 좁은 식견을 성토하기도 했던 자신이었지만, 정작 소인국에게 자신의 거대함은 그토록 저열한 미학이었다.
이 소설이 지닌 풍자의 장치 중에 하나가 관점이다. 사회학에서는 '광학'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거시적이고도 미시적인 관점을 동시에 취하는 경우이다. 소인국에서는 소인국 사람들의 좁은 식견에 진력이 난 걸리버였지만, 도리어 거인국에서는 자신이 좁은 식견의 소유자였다. 이런저런 경위를 거쳐 거인국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된 그는, 국왕과의 대화를 통해 당대 유럽의 제국주의가 와각지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울러 깨닫게 된 사실은 그 대담의 와중에서 유럽을 변호하고 있는 자신의 식견이 자신의 축적에 부합한다는 점이었다.
유럽의 갈등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거대한 관점들은, 유럽보다는 못한 문명을 누리고 있었다. 걸리버가 유럽을 변호한 이유 역시 문명적 발전도에서 비롯된 우월감이었지만, 거인들은 굳이 그런 문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또한 긍정인지 무념인지 모를 거인들의 관용은, 실상소인국에서 소인들을 내려다보던 걸리버 자신의 포용적 시선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거인국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는 문제들에 시달리는 소인국의 관점을, 걸리버가 거인이었던 경우와 소인이었던 경우를 비교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거인국의 특이점 중에 하나가 바다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이었다. 바다에 사는 생명들은 걸리버가 떠나온 세계의 축적과 같았다. 때문에 거인들에게는 고래 이외에는 그다지 먹을 만한 식재료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거인들의 터전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에게만 대축적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풍토의 조건이 생명체의 규모를 결정하고 있던 것. 이 괴이한 현상의 비밀은 왕정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한 편의 논문을 통해 밝혀진다.
걸리버가 펼쳐 본 논문에는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령공주>에서 보여 준 태곳적 자연의 거대함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태초에는 거대한 자연과 맞설 수 있는 적응력들이 존재했지만, 자연을 극복하는 문명의 방법론들이 점점 더 발전해 감에 따라 자연은 점점 기력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연은 이전에 비해 조그맣고 불완전한 생물만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논문은 원시시대의 인간들은 지금의 거인보다 더 큰 거인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결론으로 적고 있었다.
천공의 섬 라퓨타
걸리버의 세 번째 여정에서 다시 반복된 조난은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였다. 교역의 과정에서 차질을 빚게 된 선장은 배 한 척을 더 구입하고 걸리버에게 선장의 권한을 위임한다. 정박한 항구에서의 용무가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정을 지체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기에, 일행을 분리해 걸리버의 팀을 먼저 떠나게 한다. 그러나 항해 도중 해적을만난 걸리버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대신, 홀로 작은 보트에 실려 망망대해로 방출된다.
육지를 발견한 기쁨도 잠시,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바위뿐인 해변으로 밀려들고 있던 것은 파도만이 아니었다. 도통 살아날 방도가 없을듯한 불모지에서의 절망감을 구원한 동아줄은 하늘을 나는 섬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해변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와중에 발견한, 바다 가까이로 내려와 있는 천공의 섬. 그 가장자리에서 바다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던 주민들에게 걸리버는 구조를 요청한다.
하늘을 나는 섬은 그 자체로 왕이 머무르는 성의 개념이었으며 그명칭은 '라퓨타'였다. 자기부상의 원리로 움직이는 성이 지배하고 있는영토는, 그 자성과 부력을 가능케 하는 광석이 묻혀 있는, '발리바르비'라는 섬나라 전역이다. 라퓨타가 지상의 백성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반란이 일어난 지역의 하늘로 날아가 해와 비를 가리는 것이다.그도 여의치 않을 시에 대비한 플랜B는 사뿐히 내려앉아 도시 전체를 깔아뭉개는 방법이다. 이는 스위프트의 조국인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풍자한 것이다.
라퓨타의 위정자들은 말을 최소화하는 삶을 고급문화로 여겼다.번잡한 언어는 아랫것들이나 좋아하는 천박한 생활체계이다. 항상 사색에 잠겨 있는 그들에게 수학과 음악이 최고의 인문이며,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학문이 저열의 가치이다. 이런 라퓨타의 답답한 공기가 견디기 힘들었던 걸리버는 천공의 성에서 내려와 지상을 경험한다.
그러나 지상 역시 천상(라퓨타)을 따라 하기에 급급한, 답답하기 그지없는 세태였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상의 이데올로기가 지상의 문화를 결정하는 형국이다.
지상의 모든 아카데미는 현실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추상과 관념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 열정의 이면에서 실질적인 삶은 피폐해져 가지만, 이미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이상을 향한 열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개중 한 아카데미에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말의 음절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말을 할 때 허파가 조금씩 부패한다는 낭설이다.
이는 영국의 경험론이 지적하는 합리론의 모순이기도 하다. 전제 자체가 오류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간과한 채, 그 전제로 다른 것을 증명하고 있었던…. 가령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냐의 문제는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다른 것들의 진위여부를 논한다. 말을 할수록 허파가 훼손된다는 전제를 증명해야 함에도, 허파가 훼손된다는 전제로 언어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치닫고 있는 답답함이, 라퓨타의 위정자들이 그토록 말을 아꼈던 이유이기도 했다.
휴이넘과 야후
바다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에 싫증을 느끼던 걸리버는 네 번째 여정에선 따로 의사를 고용하고 자신은 선장의 자격으로 배에 오른다. 항해 도중 일사병으로 몇몇 신원들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교역을 위해 잠시 머물게 된 항구에서 새로운 선원들을 모집한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신분을 숨기고 있던 해적이었다. 나머지 선원들까지 포심한 해적들에 의해 걸리버는 다시 한 번 배에서 추방당한다.
뱃길이 닿는 첫 물에 버려진 걸리버가 이번에 만난 세계는 말의 나라이다. 인간처럼 이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말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스스로를 '휴이넘'이라고 소개한다. 처음엔 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걸리버는 그들 사이에서 자주 반복되는 '야후'라는 표현이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임을 직감한다. 그런데 야후란 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던 가장 야만적인 동물에 대한 지칭이었으며, 그 외관은 인간의 태곳적 모습과 닮아 있었다.
성직자이기도 했던 스위프트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소설은 이미 당대의 금서가 되기엔 충분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진화론의 관점을 취한 이유는, 야만의 시절로부터 조금의 진화도 이루어 내지 못한 인간의 본성을 질타하기 위함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은 단지 지력의 범주만이 아닌 도덕적 가치까지 내포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휴이넘들에겐 이런 구분도 무의미하다. 이성을 자연이 부여한 선물로 간주하는 그들에겐 부도덕의 성질을 뜻하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말들과의 대화에서 걸리버가 가장 애를 먹는 개념이 '거짓말'이었다. 말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라는 단어도 없다. 그러나 '탐욕'의 개념은 그들도 쉬이 이해했다. 그것은 그들 세계의 야후로 대변되는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휴이넘의 세계에서 불쾌의 정서에 관한 관용적 표현엔 모두 '야후'가 수식어로 달라붙었다. 휴이넘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야후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그 모두가 나누어 먹기에 충분한 양의 먹이를 던져 주어도, 그것을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습성이었다. 휴이넘들은 걸리버를 만난 이후에야 그런 습성을 지칭하는 말이 '탐욕'임을 이해한다.
걸리버는 자신이 떠나온 세계에선 도리어 야후들과 비슷한 외모를지닌 인류가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문명을 이룩하고 산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설명의 와중에 밀려든 각성은, 어느 것 하나 정의로울 게 없는 유럽 문명의 부조리에 대한 것이었다. 이성의 존재들이 그렇듯 탐욕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유를, 휴이넘들은 인류가 지닌 이성의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휴이넘들의 지평에선, 자연이 부여한 완전한 이성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는 그런 쓸데없는 욕망들이 필요치 않다.
처음 휴이넘들을 만났을 때, 걸리버는 자신이 야후들과 같은 종족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는 자신이 야후와 같은 계보란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휴이넘들이 보는 앞에서 결코 옷과 신발을 벗지 않았다. 휴이넘의 세계를 겪은 후에 새삼 깨달은사실은, 야후가 결국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의 플래시백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의 인류는 이성을 매개로 탐욕을 확장시킨 진화의 결과일 뿐이다.
휴이넘의 세계에 동화되어 가고 있던 걸리버의 방출이 결정된 이유는 이성의 부정적 진화가 가져올 리스크 때문이었다. 휴이넘 세계의 야후들은 탐욕스러울지언정 조금의 이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걸리버로부터 야후들의 진화 가능성을 전해 들은 휴이넘들에게 걸리버는 재앙의 미래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3년 동안 걸리버와 친분을 두텁게 쌓은 일부 휴이넘들은 걸리버를 옹호하고 나섰지만,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걸리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휴이넘들 사이에서 '갈등'이라는 행위가 생겨난 것이다.
걸리버는 휴이넘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배를 끌며 다시 바다로나아간다. 바닷가까지 걸리버를 배웅한 휴이넘들의 작별 인사는 '친절한 야후'를 향한 것이었다. 걸리버는 휴이넘들이 처음 겪은 타락하지 않은 야후였다. 휴이넘의 세계를 떠난 걸리버는 인간 사회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에 떠밀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는 한동안 경멸의 시선으로 인간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여행을 책으로 엮어 간행하기로 했지만, 출시를 앞두고서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자신이 경험한 미지의 섬나라들까지 점령할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을까를 고민하기도 한다.
걸리버의 심정은 곧 스위프트의 심정을 대변한다. 스위프트가 이소설의 장르로 선택한 '여행기'는, 자신들의 영토에 만족하지 못하고 개척이라는 미명하에 외부로 뻗어 나가던, 당대 유럽에 대한 상징이기도하다. 진화된 야후들이 탐욕의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