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고미화
허리를 굽히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기지 않았어야 했다. 적우適雨가 지나간 호혜적인 자연의 풍경에 더 지긋이 머물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닥을 보지 않았다면 번뇌의 씨앗을 손에 들고 갈등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잦아들었다. 이틀째 걷는 시간을 얻지 못한 몸이 무겁다는 신호를 보낸다. 망설이던 끝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흠뻑 내린 비에 몸을 씻은 신록이 말갛고 싱그럽다.
시인의 가슴에 시어를 안겨 주었던 정경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정호승 시인의 <나뭇잎을 닦다>라는 시를 떠올리며 는개 속의 산책을 즐겼다.
며칠 전에 머리를 깎은 잔디가 푸른 향기를 내뿜는다. 서리가 앉은 듯한 희뿌연 별사탕을 매달고 있는 측백나무엔 거미가 세를 들었다. 매끄러운 초록빛 터전에 제집을 마련한 거미 대신 은빛 물방울이 놀고 있다. 이른 저녁에 만나던 푸른 벗들을 오전에 마주하니 풍부한 표정이 정겹다. 늦봄과 초여름이 맞닿은 5월 끝자락이 초록빛으로 생기롭다. 충만한 기운이 내 안으로도 스며든다.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다. 준비하고 나갈 시간을 계산하면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파트 단지 안의 나무들이 더욱 말끔해진 모습으로 눈맞춤을 청한다. 짧은 눈인사를 건네며 서두르는 발길에 작은 물체가 걸렸다. 허리가 접힌 노란 종이에 율곡 선생이 누워 계신다. 본능에 충실한 몸이 손을 먼저 뻗었다. 축축한 지폐를 집어 드는 순간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관리실에 갖다 주고 방송을 부탁하면 될까? 아니야 오만 원권도 아니고, 오천 원권 한 장의 주인을 찾아달라고 하면 비웃을지도 몰라. 제자리에 그냥 둘까? 지폐의 주인이 잃어버린 것을 확인하고 길을 되짚어 올 수도 있잖아.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이 가져가면 어떡하지? 혹 돈을 분실한 당사자는 오천 원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아닐까? 요즘은 만 원권도 아이들 세뱃돈으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데. 아니지, 돈의 가치는 상대적이잖아. 누군가에겐 껌값에 불과한 액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숫자로 잴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잖아. 귀찮은데 주머니에 넣고 갈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지만, 불편한 마음을 오천 원과 맞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개운찮은 느낌이 내내 따라다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 잠이 들면 동전을 줍는 꿈을 자주 꾸었다. 소꿉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놀았던 꿈속에서도 내 앞에는 동전이 떨어져 있곤 했다. 할머니께 말씀드리면 ‘어린아이가 무슨 걱정이 많아서 근심을 주워 담는 꿈을 꾸느냐.’ 하시며 토닥이셨다. 당시의 동심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꿈해석이 이 상황에서 떠오르다니, 할머니의 꿈 풀이는 크게 틀리지 않은 듯하다. 꿈의 세계에서 동전의 상징성이 현실 세계에서 돈의 속성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삶의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고민거리의 궁극점엔, 경제적인 부분이 숨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다양한 형태로 금전의 속성에 닿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못 본 척 그냥 지나갈 걸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십여 미터 앞에서 한 여자아이가 두리번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의 양쪽 손에는 접은 우산과 핸드폰이 각각 들려 있다. 우산으로 툭툭 바닥을 치면서도 핸드폰과 땅바닥을 번갈아 보느라 고갯짓이 바쁘다. 뭔가를 찾는 기색이 역력하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갈팡질팡하는 이 순간을 벗어나게 도와줄 해결사가 분명해 보였다. 마치 오래도록 소식이 불통이던 친구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감사하게 여겨졌다. 아이 앞에 다가가 지폐를 내밀었다.
“혹시 이걸 찾고 있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은 손을 내밀며 고개를 끄떡인다. 내 손끝에 무겁게 매달려 있던 종잇장이 가볍게 아이 손에 안긴다. 엉거주춤하게 멈춰 있던 손이 자유로워졌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손이 편안해졌다.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가슴이 후련하다.
어느새 아이는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저만치 가고 있다.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작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지폐가 주인을 잘 찾아간 거 맞겠지?’ 부질없는 노파심이 고개를 들다가 수그러든다. 돈과 근심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소리 없이 내리는 는개가 부드럽게 나무들을 어루만진다. 싱그러운 잎새들의 미소가 편안해 보인다. 조용히 번지는 초록 물결에 마음 한 자락 정갈하게 헹구어 본다.
첫댓글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 산책하는 고미화 국장님.
신록의 싱그러움을 저도함께 느꼈습니다. 5월의 끝자락 초록빛 생기가 충만하게 스며옵니다.
오천원을 줍고 마음의 갈등은 누구나 오는 것이겠지요. 불편한 마음을 유년시절의 꿈으로 확산해나가는군요. 할머니 말씀이 철학이십니다.
지폐가 주인을 찾아간 것이 맞든 아니든 번뇌의 씨앗이 내 손을 떠났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상큼하고 말간 신록 같은, 촉촉한 글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
늘 그렇듯이 세세하게 글을 읽어주시고 답글을 올려주시니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공감해 주시니 더욱 힘을 얻습니다.
고개 숙여 감사 인사드립니다
하하..
땅에 떨어진 오천원을 발견했을 때 분주해지는 머릿속 풍경이 재미있습니다. 나라도 그랬을...
역시 돈은 근심의 상징인가 봅니다. 할머니 말씀처럼.
미흡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근심을 주워담는 꿈'이라니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 전 식당에서 백만원은 훨씬 넘어보이는 두툼한 지갑을
주워 사장님께 맡기고 나온 적이 있어요. 차시간때문에 그리하였는데 지갑 주인이 잘 돌려받으셨을지 가끔씩 궁금하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일 하셨네요.
큰 돈이 주인에게 잘 돌아갔으리라 믿어요~^^
고맙습니다.
내 마음을 시험하게 하는 일이 가끔 생기면 정말 생각이 많아집니다.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바쁘신데 불구하고...
고맙습니다.
어제 고생많으셨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동전 줍는 꿈 꾸었었는데... 하나 주으면 앞에 또 있고... 아마도 저는 동전이 필요 했었나 봐요.
그래서 꿈 속에서 신났었지요..
즐거운 추억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동전을 줍는 꿈...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 ^^
좋은 하루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