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판구조론*/ 최우창
다랑쉬오름 봉홧불 풍등처럼 치솟고
핏발 선 고성과 성난 총이 토설하던 그날 첫새벽 이후
제주는 가슴에 먹빛 현무암을 몇 덩이씩 얹고 산다
엇갈린 사상의 맨틀이 꿈틀댈 때마다
미국판과 소련판은
머리 맞댄 싸움소의 뿔치기처럼
세상 곳곳에서 들이박고 밀치며
좌충우돌하고 동충서돌했다
지각판끼리의 삼각파 같은 요동은
경계선의 한반도를 타격하고
동면하던 제주 단층을 흔들어 깨웠다
큰판들의 암상궂은 이념은
너른 풀벌에서 자유로이 풀질코자 했던
토끼들의 눈썹달 같은 꿈을
용암처럼 늘름 집어삼켰다
이념의 수족들은 저와 색이 다르고 판이 다르면
겨레붙이도 곁붙이도 살붙이라도 모질게 거둬 갔다
토끼들은 숨을 꼭꼭 숨겼다
거친 내 숨결에도 문득문득 자지러지며
밧돌오름 거문오름 지나 울숲으로
방림굴로 벵뒤굴로 만장굴로
얼음판 위의 발가락처럼 곱아들었다
무장대도 토벌대도 총 든 포수였다
포식자들에겐 토끼들이
존재보다 고작 한입의 먹이였고 수단이었다
숱한 꿈이 되어야 할 이념은 토끼들을
지진처럼 균열하고 흑백으로 갈라
목줄 끊긴 연처럼 생을 그루박았다
제주는 4‧3을 똑똑히 봤다
한라산도 4‧3을 눈물과 한숨으로 봤다
구상나무는 결마다 타투처럼 새겼다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검은 돌담은
그날의 맵싸한 연기와 역한 피바람 냄새를
아직도 기억할 거야
이념이 불도저가 될 때의 공포와 원통함을
뿌리가 곁가지와 이파리가 될 때의 곤두박질을
그날 첫새벽 이후 여태껏
제주는 가슴에 먹빛 현무암을 몇 덩이씩 얹고 산다.
* 판구조론 : 지구의 표면이 딱딱하고 깨어지기 쉬운 여러 개의 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판들이 이동함에 따라 지진, 화산 등 다양한 지질 현상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시평 – 『제주4‧3 판구조론』을 읽고
1. ‘판구조론’의 비유로 본 4‧3
‘판구조론’은 원래 지각 변동과 대륙 이동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이야.
그걸 이 시는 이념 충돌과 분단의 비극을 설명하는 틀로 끌어와.
제주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판과 판 사이에서 으스러진 생명의 틈이야.
2. 토끼 – 약자이자 민중의 상징
시 속 ‘토끼’는 너무도 선명한 상징이야.
자유롭게 풀밭에서 풀 먹으며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 존재들.
그러나 무장대와 토벌대, 모두에게 쫓기며 먹이로, 수단으로, 표적으로 희생당해.
“토끼들의 눈썹달 같은 꿈을 / 용암처럼 늘름 집어삼켰다”
이 구절은 너무나 뼈아프고 절묘해.
희망과 생명의 상징인 ‘눈썹달 같은 꿈’이 ‘용암’이라는 폭력으로 삼켜지는 순간,
그게 바로 제주4‧3의 핵심이야.
3. 역사와 지층, 증언과 침묵
검은 현무암,
구상나무,
너븐숭이 돌담,
굴 속에 숨었던 토끼들,
이 모든 이미지들은 제주의 기억 지층이야.
말은 하지 않지만 그날의 냄새, 울음, 피, 공포를 몸으로 품고 있는 증언자들이지.
4. 현무암을 얹고 사는 제주 –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이 시는 4‧3을 박제된 과거로 남기지 않아.
마지막 행이 반복되며 강조되지.
“그날 첫새벽 이후 여태껏
제주는 가슴에 먹빛 현무암을 몇 덩이씩 얹고 산다”
제주는 여전히 무겁고, 여전히 아프며, 여전히 말하고 있다.
시인은 그 아픔을 감당하려는 듯, 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울림으로 남겨.
🪶마무리
친구야, 너의 시는 역사를 시로 쓰는 방법의 본보기야.
과학적 은유, 문학적 언어, 역사적 통찰, 민중의 시선까지 다 들어 있어.
이건 단지 시가 아니라, 기억을 지키는 기도문이자 진실을 향한 기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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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판구조론
돌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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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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