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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지키다
증 언 자 : 정태호(남)
생년월일 : 1961.(당시 나이 20세)
직 업 : 대학생(현재 고물상 잡부)
조사일시 : 1989. 4
개 요
5월 21일부터 페퍼포그차에 탑승하여 광주의 상황을 사진기로 찍고 다니다가 5월 23일부터 도청 시체과에서 시체를 지키는 일을 했다. 그외에도 궐기대회 준비, 야간순찰, 외곽경비, 약품조달, 가두방송을 하였다. 5월 27일 계엄군에게 잡혀 1980년 7월 3일 석방되었다.
고아 아닌 고아로
동아일보 수습기자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는 결혼식도 하지 않고 살다가 나와 내 누이를 낳았다. 내가 태어난 1961년 아버지가 베트남 종군기자로 파견되는 바람에 외가에서는 어머니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냈다. 어머니가 시집을 가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우리 남매는 어쩔 수 없이 외가에서 자라게 됐다. 가끔 어머니를 보더라도 아줌마로 불러야 했던 우리 남매에게는 부모라는 애정도 별로 없었다. 10년이 훨씬 지나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나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나는 충남 홍성에 있는 외가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자립심이 강한 나는 한 가지 특기가 있어야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찍부터 기계체조를 하여 대전체육고등학교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 기계체조 외에도 테니스, 수영 등의 운동을 많이 해서인지 몸은 건강한 편이었고 체격 역시 우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더 이상 외가의 신세를 질 수가 없어 혼자 자취를 하면서 조선대 체육과를 다녔다.
1980년에는 조선대 2학년에 재학중이었고 무등산장 아랫 동네인 충효동에서 살고 있었다. 충효동은 시내 중심가와 떨어져 있어서 시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잘 몰랐으나 가끔 학교에서나 시내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학생들의 시위를 보고는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생각했으므로 주로 구경만 하는 식이었다.
5월 20일은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편지만 주고받은 서울 이화여대생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오전 9시쯤 동구청 뒷골목을 지나는데 어제의 격렬한 전투를 말해주는 듯 최루탄 가루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곳을 빠져나와 약속장소인 광주우체국 건너편의 고려다방으로 가기 위해 충장로로 갔다. 충장로에서는 공수부대나 시민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약속한 여학생을 만나지 못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광주우체국 앞에는 조금 전까지도 없었던 1백여 명의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공수들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쫓아왔다. 순간 당황한 나는 건너편 건물 2층의 미용실로 뛰어들었다. 미용실의 주인 아주머니가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에게 "내 아들이다"라고 해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 아주머니가 수협건물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계림동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 수협 앞에서 버스를 탔는데 공수부대들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해 중앙국민학교 앞에서 내렸다. 공수부대들이 있는 곳을 피해 사람들이 많은 한국은행 앞 사거리로 가보았다. 그곳에서는 공수부대들이 시민들을 실컷 두들겨팬 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들이 끌려간 후 한 리어커 한 대 분량의 신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일단 두려운 마음이 앞섰으나 다른 곳의 상황도 살피기 위해 광주공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무장을 한 계엄군이 쫙 깔려 있었다. 오전 12시쯤 공수부대들이 탄 군용 트럭이 차도를 막고 서 있자 뒤에 가던 택시가 경적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7, 8명의 계엄군이 트럭에서 내려 택시의 유리창을 마구 깨기 시작했 다. 이에 흥분한 운전수가 항의를 하자 공수부대원은 오히려 그 운전기사를 실컷 두들겨팼다. 공수부대의 행패를 본 나는 '아니! 저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분노심이 생겼다. 친구를 통해 부마사태가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알고 있던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페퍼포그 차에 탑승하다
공수부대의 잔학성을 목격한 나는 5월 21일 시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산수동오거리에서 지나가는 시위차를 타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는 시위차가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페퍼포그차도 있었다. 나는 페퍼포그차를 타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그 차를 탔다. 그 차 안에는 7명의 시위대원이 있었는데 한 명은 송일권이라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광주고속버스 기사였다.
나머지는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인 것 같았다. 페퍼포그차에 탄 우리는 임동 동사무소 골목에 차를 대놓았다. 일행 중 한 명이 지금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물로 보관하자고 하여 우리는 쾌히 승낙했다. 나 역시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광주고속버스 기사가 어디 서인지 사진기를 가져왔다. 곧바로 우리일행은 한 조가 되어 시내로 나갔다. 도청 쪽에는 공수부대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거리에는 시민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
오후 1시쯤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밀치고 전남일보 건물을 불태우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이 건물은 전남 재산이니 그대로 두자"고 해 시민들은 외환은행 셔터문만 부수고 말았다.
그 후 아세아자동차에서 가져온 장갑차를 탄 고등학생이 태극기를 흔들며 공수부대를 향해 진군했다. 곧바로 그는 공수부대원이 쏜 총에 목이 잘려나갔다. 그 때 총 쏘는 것은 직접 보지는 못했고 너무 경황이 없어 사진도 찍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우리 일행은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림라디오'에서 돈을 주고 핸드마이크를 빌렸다. 산수동, 계림동 등 주택가를 누비면서 "공수부대가 쏜 총에 고등학생이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중요한 상황이 있으면 언제나 사진을 찍었다. 페퍼포그차에 탄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도청에 들어간 것 같다. 이날 시간이 22일 새벽 6시경이었다. 우리차는 방탄차임을 믿고 도청 분수대를 한바퀴 돌고 선발대로 들어갔다. 도청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우리 차가 들어온 후 여러 대의 차가 뒤를 이었다.
의약품을 조달하다
22일은 전날의 전투 때문인지 부상자, 사망자들이 많아 의약품이 부족했다. 마침 충장로에 있는 '광주약국'에서 의약품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 일행은 페퍼포그차를 도청 옆에 세워두고 트럭을 타고 광주약국으로 갔다. 광주약국의 창고에 들어가 링겔, 거즈, 붕대 등을 가득 실어왔다. 전남대 부속병원, 기독 병원에는 링겔을, 개인병원에는 거즈와 붕대를 나누어주었다.
도청에 돌아온 우리는 광주에 기름이 바닥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기름탱크가 있다는 조선대에 계엄군이 잠복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피아트를 타고 조선대로 들어갔다. 조선대 운동장에 진입하여 매우 빠르게 한바퀴 돌았다. 운동장에는 공수부대들이 남기고 간 취사도구와 먹다 남은 통닭 찌꺼기가 널려져 있었다. 본관까지는 가지 못하고 기름탱크가 있다는 학군단(지금의 체육관)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공수들이 입던 옷이 쌓여있었다. 우리는 군인들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청으로 가서 알렸다.
지원동 외곽지역의 상황이 악화됐다는 정보를 들었다. 밤 8-9시경 페퍼포그차를 타고 지원동 버스 종점을 조금 지났을 때이다.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계엄군이 총을 들이댔다. 차 뒤에도 계엄군들이 총을 들이대 우리는 완전히 포위됐다. 그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우리는 방탄차라고 믿고 있던 터라 총을 들고 있지 않았다. 순간 아찔했다. 실탄이 창문을 뚫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광주고속버스 기사가 "이것은 운명이다. 모두 꽉 잡아라"라고 얘기하고 차를 돌려 사정없이 시내 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수많은 총탄이 날아왔으나 차의 천정을 뚫기만 했을 뿐 직접 맞지는 않았다. 일행 중 한 명이 파편에 맞아 약간의 피를 흘렸다.
우리가 쏜살같이 차를 모니까 계엄군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페퍼포그차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망가져버렸다.
도청으로 돌아온 우리는 무장한 계엄군에 대항하여 자위하려면 무장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군용 지프차에 K303, LMG를 싣고 야간순찰을 했다. 상황실과 관련이 있었던 일행 중 한 명이 권총을 휴대했다. 금방이 털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시내를 순찰하기도 하고 은행도 돌아다녔다. 또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정보가 있으면 즉시 출동했으나 거의가 술취한 사람이었다.
시체를 지키다
그동안 계속 같이 활동했던 우리 일행은 다른 부서에 배치받아 모두 흩어졌다. 나는 시체과에서 여학생 몇명과 함께 시체를 지키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섬뾵했으나 나중에는 동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체는 전남대 부속병원과 적십자병원에서 인수해 온 경우가 많았다. 시체가 들어오면 조사과에서 조사를 하고, 도청 본관 옆과 민원봉사실 사이의 길목으로 옮겼다. 우리는 시체에서 분비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솜으로 눈, 코, 입 등을 막았다. 시체 밑에는 비닐로 깔아 두고, 부패되어 냄새가 심한 것은 비닐로 씌웠다. 시체는 총상당한 것과 팔, 다리가 잘려나간 것이 많았다. 돌에 찍혀 사망한 시체도 있었다. 가족들이 나타나면 염을 하고 관을 만들어 흰 천으로 관을 두르고 그 위에 태극기로 덮어 상무관으로 인계했다. 26일까지 상무관으로 인계한 시체는 147구였으며, 가족들이 나타나지 않은 시체는 11구였다. 그 중에는 여자의 시체가 2구 있었는데 끝내 가족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시체는 얼굴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소지품이나 옷, 신발 등을 보고 확인했다. 모금된 돈으로 적십자병원 옆이나 양동시장 근처의 장의사에서 관을 사고 태극기도 샀다. 관이 부족하여 조선대병원에서 베니아판으로 만든 것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당시 백운동 대동고 부근(현재 보훈병원 부근)의 밭에 시체가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몇 명의 대원과 함께 직접 수색을 나갔다. 나이 꽤 들어보이는 남자의 시체였는데, 언덕 사이에 흙으로 가매장되어 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시체는 26일 저녁까지 가족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부상자가 도청으로 실려오면 일단 응급치료를 하고 중상자는 병원으로 옮겼 다. 적십자병원에는 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주로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후송했다.
나는 시체를 담당하는 일뿐만 아니라 궐기대회를 하기 위한 방송시설도 만들고 대자보를 시내에 붙이기도 했다. 또 송원전문대 여학생과 함께 전남대 학교버스를 타고 가두방송을 했다. 방송의 내용은 시체를 찾아가라는 것과 그날그날 발생한 상황을 알리는 것이었다.
독침사건 발생
5월 24일 군인들 사이에 오인사격이 있어 부상자와 사망자가 많이 생겼는지 국군통합병원 원장인 육군 대령이 산소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원장이 신원 보증을 해준다고 하여 병원에서 구한 산소를 가지고 기동순찰대원과 함께 무장을 한 채 들어갔다. 화정동 공단 입구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있었으며, 목재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우리는 통합병원 입구에서 산소통을 넘겨주고 돌아왔다.
5월 25일 오후 4시경 도청내에서 사람이 독침에 맞아 쓰러졌다는 소문을 들었다(오전에 일어난 사건을 증언자가 혼돈하고 있음-편집자주). 그쪽으로 가보니 벌써 차에 태워 전남대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그들을 따라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갔다. 독침을 맞은 사람을 본 후 퉁퉁 부은 발을 치료했다. 발이 어찌나 부었든지 신발이 벗겨지지 않아 칼로 찢고서야 발을 치료했다. 도청으로 돌아오니 독침에 맞았다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했다.
아마 그날 밤이었을 것이다. 유동에서 사건이 악화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우리 일행 중 2명이 외곽경비를 나갔는데 유동 삼거리에서 시민군 2명이 총에 맞았다는 무전을 쳐왔다. 밤 11시경에 몇 명의 대원과 함께 무장을 하고 유동 삼거리로 출동했다. 유동 삼거리의 나무 뒤에서 총소리만 요란하게 들리고 그들이 타고 나간 군용 지프차만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보이지 않자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5월 27일 새벽
5월 27일 새벽 전날 가두방송을 하다가 너무 피곤이 겹쳐 7, 8명의 사람과 함께 도청 민원봉사실 2층 기자회견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강당에 있는 피아노 튕기는 소리가 나고 소란스러웠다. 급히 강당으로 가보니 한 명이 등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총알이 배를 관통한 것 같았다. 빨리 병원으로 후송해야 된다는 생각에 상황실로 가려는데 통로 계단에서 철모에 띠를 두른 계엄군 2명이 있었다. 나를 발견한 계엄군들이 사격을 하려 했다. 나는 그들에게 "쏘지 마. 여기 환자가 있다"고 했으나 그들은 총을 바싹 들이댔다. 총알이 픽픽 날아와 난간의 쇠기둥에 맞아 튕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엉겹결에 엎드려서 기자회견실로 갔다. 기자회견실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적으로 탈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도청 옆 보이스카웃연맹 건물의 하수도로 들어가자고 했다. 얼른 창을 열어보니 상무관 앞에 계엄군이 있었고 담 위에는 변압기가 있었다. 우리는 위험을 느끼고 다시 돌아와 그곳에 있던 밥을 가지고 강당 천정으로 가서 숨기로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계엄군 2명이 문 앞까지 와서 사격을 했다. 총알 파편이 튀었다.
"손들고 나와!"
그 말에 우리는 총 한번 쏴보지 못한 채 모두 손을 들고 나갔다. 나는 세번째 나갔다. 그때 앞에 있던 육군 중위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내 바로 앞에 가던 사람이 고꾸라졌다. 그들은 우리를 끌어내더니 2층 난간에 앉으라고 했다. 곧 나무를 타고 내려가라고 했다. 다른 곳에서 잡혀온 사람들과 함께 나무를 타고 내려갔다. 그들은 우리들을 향해 총질을 했고 무수히 구타를 했다. 처음에는 M16으로 쐈으나 도청으로 진입한 후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카빈을 빼앗아 쏘아댔다. 아마 시민군들 사이의 오인사격으로 많이 죽었다고 하려고 총을 바꿔 쏜 것 같았다.
계엄군들은 우리를 도청 본관 옆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이미 잡혀온 1백 50여 명의 시민군들이 있었다. 계엄군들은 우리의 등에다 뭐라고 썼다. 그리고 소지품 검사를 하여 시계나 돈 등이 있으면 가져갔는데 나는 시계를 뺏겼다.
그때부터 살인적인 구타를 시작했다. 나는 끓어앉아 있는데 계엄군이 왼쪽 팔을 대검으로 찔렀다.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죽여줬으면'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우리는 새벽 5-6시경 군인버스에 태워졌다. 한 의자에 세 명, 버스 복도에 두 명씩 앉아 한 줄에 8, 9명이 앉았고 중간중간에 군인들이 공포를 쏘며 감시를 했다.
상무대에서의 살인적인 고문
우리가 끌려간 곳은 상무대였다. 군인들은 우리를 1차로 조사하고 사진을 찍었다. 곧바로 헌병대 영창으로 들어갔다. 영창 안에는 80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으며, 학생,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이 있었다. 그곳에는 정동년씨도 있었다.
정좌를 해야 했고 눈알만 돌아가면 손가락이 빠질 정도로 때렸다. 군화발이나 곤봉으로 구타를 한 것은 보통이었고 쇠창살에 거꾸로 메달아놓기도 했다.
날마다 조사를 받았는데 그들은 조작된 내용을 자인하라고 강요했다.
"너는 계엄군 두 명을 죽였고 총과 약을 빼앗았으니 여기에 지장을 찍어라." 나는 전혀 데모에 가담하지도 않았으며 잘 곳이 없어 도청에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책걸상으로 온몸을 마구 때렸으며 물을 마시던 컵을 얼굴에 던지기도 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손톱 주위를 바늘로 쑤실 때와 손목에 수갑을 채워 천정에 매달아놓을 때였다. 지금도 손목에 그 흉터가 남아 있다. 또 엉덩이를 곡괭이 자루로 80대 이상을 맞아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팬티와 살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엄청난 고통 때문에 오직 '빨리 죽여주었으면'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교대로 하니까 견딜 수 있어. 너의 신체상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후회하지 말라"며 엄청난 폭력을 가했다.
조사를 받으러 갈 때는 어제 진술한 얘기를 외며 오늘은 얼마나 덜 맞을까라고 생각하며 갔다. 헌병에게 맞고, 수사관에게 맞아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곳에 있을 때는 너무 배가 고팠다. 밥은 한 숟가락 정도였으며 가끔 김치 쪼가리가 나온 것이 고작이었다. 언제부턴가 빵을 나눠줬는데 빵을 기다리면서 그 고통을 참았다. 아마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군의관들이 수감자들의 건강상태를 보러 왔다. 나는 군의관이 오자 "나는 폐결핵 3기"라고 꾀를 썼다. 그 군의관은 온몸에 멍이 든 내 몰골이 처량했던지 고개를 끄덕여줬다.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어
군의관의 도움으로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상무대에서 5명이 후송되었는데 가던 길에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니 우선 반가웠다. 그러나 내 처지를 생각하자 금방 처량해져 미칠 것만 같았다. 통합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 결과에는 이상이 없었으나 외과과장이 입원을 시켜줘 병실로 옮겨졌다. 병실에 있던 환자들은 주로 총상환자였다. 전남대 심리학과에 다닌다는 김윤희라는 여자도 있었다.
그날 저녁 식사시간에 하얀 쌀밥이 나왔다. 침대에 누워 하얀 밥을 보니 꿈속 같았다. 나는 환자들에게 "이 밥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오?" 하며 몇 번이나 반복해서 물었다. 상무대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루는 군인들에게 너무 많이 맞아 정신이 이상해진 신묘섭이라는 사람이 '언론자유 보장하라, 신현확이 물러가라'며 구호를 외치자, 곧장 군인들이 달려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찍고 몽둥이로 두들겼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침체되었던 병실 안의 분위기는 점점 좋아졌다.
통합병원에서도 계속 조사를 받았으나 나는 끝내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벼텼다. 7월 1일 다시 상무대로 옮겨갔다. 헌병대 영창으로 간 것이 아니라 보병학교 강당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장군이 와서 직접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그 다음날 "상무대에서 맞은 일이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강제적으로 쓰고 7월 3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의 생활
나는 곧바로 적십자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했다. 특별한 외상은 없었으나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어느날 신세가 한탄스러워 술을 마시고 시내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충장로를 지나 적십자병원을 가려는데 정신이 없었던지 산부인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원장이 나와서 빰을 치더니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잠시 후 형사기동대 차가 왔다. 나는 광주경찰서로 끌려갔다. 형사들은 신원조회를 했다.
"이 새끼 고생하고 나온 놈 아니여."
그러더니 대의동 파출소로 넘겼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지금이 어느 땐데 이러고 다녀, 미친놈의 새끼야." 파출소 소장은 욕을 퍼붓더니 내 뺨을 후려쳤다. 나 역시 당할 수만은 없었다 .
"이 자식아, 두환이한테 당한 것도 억울한데 또 너한테 맞을 것 같애." 나도 소장의 뺨을 힘껏 갈겼다. 소장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화가 난 소장은 조서를 꾸며 넘기라고 했으나 나를 조사한 경찰이 자중하라며 보내줘 이틀 만에 파출소에서 나왔다.
그 후에도 호주머니에 백 원만 있으면 술을 마셨다. 반복된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나무를 해준다는 조건으로 백양사로 들어갔다. 백양사에 있으면서도 잠만 자면 꿈속에서 형사들이 잡으러 오는 일, 고문 당하는 일이 나타나 몸서리쳤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그때의 일이 생각나 미칠 것만 같았다. 또 술을 찾았다. 괴로움을 억제하려고 술을 마셔 인사 불성이 되면 겨우 잠이 잠이 들었다. 군에 입영했으나 (군요시찰자로 많이 맞아 정신이상 증세 근무지와 병원에서 탈영 탈출하다 제대. 서울 절에서 지내며 술만 마시면 파출소 부숨. 여러번 자살 기도.) 나는 여전했다. 여전했다. 간호해 줄 사람도 없고 돈도 없어 몸이 형편없이 나빠졌다. 상무대에서 고문을 당할 때 군인들의 군화발에 밟힌 배에 이상이 생겼는지 바람만 쐬면 배가 아프다. 그 후유증으로 장시간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대변을 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1982년 1월 14일자로 영장이 나와 31사단에서 6주 동안 훈련을 받았다. 훈련기간동안 나는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특히 많이 맞았다. 맞는 일에 치를 떨던 나는 정신이 이상해져 버렸다. 그후부터 고된 훈련이나 구타는 당하지 않았다. 6주 훈련이 끝나고 청송감호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때 훈련병 174명 중 150명이 법무부로 파견되었는데 나는 의정부교도소로 배치받았다. 의정부교도소에서 생활한지 3개월째부터 정신적으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교도소측에서는 나를 국립의료원에 의뢰를 해 처음에는 외과로, 그후에는 정신과로 보내졌다. 나는 병실에 있으면서도 자꾸 뛰쳐나갔다. 부대에서는 제대를 시키려고 육군 수도통합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곳에서도 자꾸 도망을 가니 수갑을 채워버렸다. 치료를 받고 건강이 회복된 후로도 교도관들이 재소자를 때리는 것을 보면 1980년 상무대에서의 고문받았던 일이 생각나 교도관을 때리고 뛰쳐나가곤 했다. 탈영을 많이 하여 영창생활을 했기 때문에 제대가 6개월 늦어 1985년 2월 만기제대를 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제대 후 서울 대성암에서 지냈다. 그때도 술만 먹으면 파출소로 가서 유리창을 깨고 순경을 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재도 건강이 여전히 좋지 않아 일을 할 수가 없어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쉬어야 하는 형편이다. 조금만 과로하면 온몸이 쑤시고 결려 몸을 가눌 수 없다. 특히 대검으로 찔린 왼쪽 팔은 가끔씩 염증이 생기고 활발히 움직이지도 못한다.
작년 가을에 광주로 와서 생활하고 있다. 살길이 막막해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생활신조는 깨끗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에 아부하는 영악한 지식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이 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라면 무엇이고 마다하지 않고 도와주고 싶다. 특히 충청도에 있는 꽃동네에 들어가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
5·18은 불과 몇 사람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도 잘못을 모르고 있다. 5·18 부상자 신고를 하라지만 나처럼 확실하게 드러나 있는 부상자, 구속자들은 정부에서 먼저 파악하고 보상을 해줘야 할 것이다.
1980년 당시의 일을 생각할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은 페퍼포그차에 탄 우리 일행이 찍은 역사적 증거물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을 잘 보관했더라면 지금쯤 공개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기를 보관했던 광주고속버스 기사의 이름이라도 알아뒀으면 좋았을 텐데…….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언제나 아침에 올리셨는데 오늘은 이제야 올리셨네요.
매일 증언록을 기다리 되엇습니다.
다시 한번 증언록 연재 올려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