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올 곳이 있어서 좋습니다
“바쁜데 붙잡은 거 아니요?”
운문사 학장스님이 일행과 같이 인사를 오시자 큰스님이 반가와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길을 잘못 들어서 왔습니다.”
하고 운문사 학장스님이 웃으셨다.
*
큰스님은 내려오시자마자 법공양실에 들르셔서 보시하는 책들을 점검하고 복도로 나오시다가 마침 성공스님과 함께 오시던 운문사 학장스님을 만나셨었다. 큰스님이 반가와 하시며 왜 이렇게 오랜만이냐고 길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었다.
큰방에 오셔서 인사올리시는 운문사 학장스님이 그 말씀을 기억하신 것이다.
*
“인연 닿을 때, 사정이 되고, 여유가 있을 때, 여의치 않으면 못 오고, 올 수 있을 때는 또 오고 그럼 돼.”
하고 큰스님이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다른 길로 가더라도 올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장스님은 일행이신 스님들은 계속 공부하러 왔었다고 하셨다.
*
큰스님은 요즘 컨디션이 좋다고 하셨다. ‘내게 공부가 약’이라고 하셨다. 제경서문 번역이 큰스님께 활기를 주는 듯했다. 극장에 가셔서 최신영화도 한 편 보셨다고 했다.
*
“해인사에 눈이 왔어요. 밑에는 비가 왔는데 산꼭대기는 눈이 허예요.”
하고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가야산 눈소식을 알려주셨다. 한지로 만든 법화경 사경집을 찾으셨는데 알고 보니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나온 사경집이었다.
지혜월 보살님의 설명으로는 어느 날 그 출판사 관계자가 내려와서 큰스님 이름으로 된 저서들 이름을 다 써달라고 하고서 인쇄된 사경집들을 다 가져갔는데 이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하셨다.
“사경하기가 좋아요. 내가 책을 맬 줄 아니까 뜯어서 낱장으로 사경을 해가지고 다시 묶어요.”
해인사 스님은 그 책으로 사경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 잘 만들었어?”
하고 큰스님이 궁금해 하셨다.
“예 한지로 되어가지고 먹이 참 잘 먹어요.”
그 책들을 일일이 큰스님이 편집하신 건데 판매를 해도 되냐고 여쭈었더니 해인사 스님이 먼저 답하셨다.
“말없이 복짓는 거야. 큰스님은 포교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래도 책도 좀 많이 갖다드리고 책 나왔다고 보고도 해야하지 않을까요?’ 아쉬워서 또 여쭸더니
“그게 예의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의는 안차리네.”
하고 해인사 스님이 받아주셔서 큰스님도 같이 웃으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오늘 화엄경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 69권 입법계품 10 점안을 하고 들어가도록 하겠다.
서문
만약 믿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으면
세 세상 부처님을 모두 보리니
그 사람 눈은 청정해서
능히 모든 부처님의 바다에 들어가리라.
그대는 모든 부처님의 몸을 보라.
청정한 모습으로 장엄하시고
잠깐 동안에 신통한 힘으로
법계에 가득하도다.
노사나 여래께서
도량에서 바른 깨달음 이루시고
모든 법계 가운데서
청정한 법륜을 굴리시도다.
여래는 법의 성품이
고요하여 둘이 없음을 아시나
청정한 모습으로 장엄한 몸을
모든 세간에 두루 보이시도다.
부처님의 몸 부사의하여
법계에 충만하시며
모든 세계에 널리 나타나시어
일체 중생들이 다 보도다.
부처님의 몸은 항상 광명을 놓아
모든 세계의 미진수 같으시니
가지각색 청정한 빛이
염념이 법계에 두루 하도다.
여래의 한 모공으로
부사의한 광명을 놓아
여러 중생에게 널리 비추어
그들의 번뇌를 소멸하게 하도다.
여래의 한 모공으로
끝이 없는 화신을 출생하사
법계에 가득하시어
중생들의 괴로움을 소멸하도다.
부처님이 하나의 묘한 음성을 내어
종류를 따라 다 알게 하시고
광대한 법을 널리 비처럼 내려서
보리심을 발하게 하도다.
부처님이 옛날 여러 가지를 수행하실 때
이미 저를 거두어 주셨으므로
그러므로 오늘날 여래께서
모든 세계에 널리 나타나심을 보도다.
2017년 9월 10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부처님이 옛날 여러가지 수행을 하실 때에 이미 저를 거두어 주셨다’고 하였다.
무량겁 전에 부처님이 수행하실 때에 벌써 우리들은 부처님 앞으로 등록이 다 되었고 부처님이 출석부를 펴서 늘 출석을 체크하는 인연으로 오늘도 이렇게 화엄행자가 되었다. 아니 이제는 화엄법사가 되어서 화엄경을 세상에 펼치는 인연이 되었다.
*
여러분들은 대한불교 조계종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대한불교 법화종 하면 소의경전이 당연히 법화경이다.
대한불교 관음종 하면 당연히 보문품, 관음경이 소의경전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대한불교의 소의경전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화엄경! 내가 묻는 의도를 벌써 알아차려 버렸다. 평소에도 소신이 그렇다면 참 반가운 소식이다.
*
우리나라에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들어와서 한 300여년 쯤 계속해서 경전이나 율행, 스님이 들어오고 불상이 들어오고 절의 형식이 들어왔다. 건축 미술 불상 회화 음악 등등 승려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하나씩 하나씩 상당한 시간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스님들도 인도에서도 오시고 중국에서도 오셨다.
요즘 같으면 교통이 빈번하고 가고 오기가 너무나도 쉽다. 소위 코리아 열풍도 누가 제대로 된 춤 한 번 추고 노래 한 곡 부르면 바로 그날 전 세계에 다 전해져서 전파된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한 1700년 전 1600년 전에는 그런 전파가 쉽지 않았다. 중국에 한 번 가고 오는 데도 몇 달이 걸려야 했다.
300여년의 세월이 가는 동안 경전이 오고 불상이 오고 그림이 오고 절 양식이 오면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건물들은 중국에서 왔지만 다른 양식으로 절이 지어졌다. 불상도 그렇다. 간다라 미술이 원류라고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만 오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중국 미술을 참고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300년쯤 지난 뒤에는 경전들이 거의 다 왔다.
원효스님 의상스님 같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걸출한 사상가 내지 성인이 출현하셔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다 섭렵해본 결과 화엄경이야말로 부처님이 최초로 깨달으신 바를 표현한 경전이고 최초에 설한 것이고 최후의 가르침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으로써 소의경전을 해야된다고 해서 의상스님은 전국에 제자들을 보내어 화엄십찰을 건립하였다. 아직 온전하게 종지가 세워지지 않았던 기존의 사찰에서도 화엄경으로써 가르침을 삼아야 된다고 해서 화엄경을 가르쳤다.
원효스님은 원효스님 대로 천성산에서 천 명의 제자들을 키우기도 하고 경주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화엄경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렇게 하면서 비로소 화엄경이 대한불교의 소의경전이 되었다. 지금은 대한불교라고 하지만 그때는 신라 불교라고 해도 좋다.
우리 전통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했을 때 대한불교의 소의경전은 화엄경이다. 이렇게 분명히 이야기 해야된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가장 의지하고 믿어야 할 이상적인 경전, 최고의 경전,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완벽한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해야된다. 그래서 대한불교 소의경전 하면 당연히 화엄경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해야 된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금강경 아니냐?’고 하는데 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다. 조계종에서는 참선 중심으로 사니까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소박한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은 것이다.
사실 전체 불교로 볼 때는 한국불교는 통불교다. 모든 불교가 다 아우러져 있는 불교가 한국불교인 것이다.
모든 불교가 다 아우러져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소의경전으로 할만한 경은 화엄경 뿐이다.
법화경도 좋고 유마경도 좋고 열반경도 좋고 유식도 좋고 금강경도 좋고 그런 경전도 그야말로 다 일리는 있지만 크게 보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통불교 입장에서는 화엄경이 가장 원만한 소의경전이다.
이런 이야기를 그전부터 나는 간혹 이야기해왔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는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은 화엄경이다’ 하는 것을 주지하고 아주 강력하게 주장을 해야 된다.
여기서 공부하시는 스님들은 앞으로 그런 주장을 펴야 된다. 여러분들은 전부 다 화엄법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쯤까지 공부했으면 전부 화엄법사가 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 화엄경을 이렇게 오랫동안 공부한 역사가 있는가? 없다.
무슨 화엄경 대학원 이런 명칭은 있어도 요해나 아니면 현담을 조금 연구하다가 마는 정도이지 이렇게 깊이 있게 화엄경을 공부한 역사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 계신 스님들이 화엄경 공부를 제일 많이 했다.
교재도 종단에서 정한 교과서인 국정교과서를 가지고 우리가 공부하고 있고, 또 내가 친절하게 번역하고 강설하고 낱낱이 난도질 하듯이 단락을 나누고 과목을 붙여서 강설책도 만들어서 드렸다.
장자에 포정(庖丁)이라고 하는 백정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소를 잡는데 유인(遊刃)이라고 할 정도로 칼을 잘 놀렸다. 수십 수백 차례 살아있는 소를 칼로 분해하고 낱낱이 포를 뜨는데도 소는 한 번도 칼이 닿은 적이 없는 듯이 아픈 줄도 모르면서 어느새 죽어 있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나의 화엄경 번역이라든지 하는 것은 과거 역경원에서 운허스님 탄허스님 용성스님 이런 분들이 먼저 번역한 것을 참고해서 거의 먼저 스님들의 번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는 내가 크게 자랑할 수 있고 주장하는 것은 포정이 유인하여 낱낱이 소를 회 치듯이 화엄경을 부분부분 단락을 나눠서 뜻을 요약하고 현대적인 과목을 하나씩 착착 붙여서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여러분은 이렇게까지 해놓은 교재를 가지고 여기서 공부하고 강의를 듣는다.
요즘은 신도들에게 하는 강의나 스님들에게 하는 강의가 다 방송으로 또 나가고 유튜브에도 수천 꼭지의 강의가 올라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을 언제든지 다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런 것도 알고 보면 전부 화엄경의 도리이고 화엄경의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스님들같이 이렇게 화엄경 공부를 넉넉하게 많이 한 사례가 전세계적으로 없다. 스님들은 그렇게 알고 책임도 갖고 의무도 갖고 자부심 자긍심도 갖고 그만치 공부도 좀 깊이 해 놓으면 평생 법문 하는데 밑천이 되고 자료로도 쓰고 할 수 있다.
(박수)
여기는 박수가 잘 안 나오는 곳인데 오늘은 박수가 나왔다. 모두 각자 자기 자신의 공부를 축하하는 뜻에서 그렇게 박수를 치는 것으로 알겠다.
나도 스님들 덕택에 공부를 참 많이 했다. 쌓인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부 스님들 덕분에 몇 번씩을 보니까 얼마나 좋은 줄 모른다. 오늘은 461페이지(화엄경 제2권 민족사刊) 입지의 십종방편혜를 할 차례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七
十地品 第二十六之四
十三, 第七遠行地
2, 入地의 十種方便慧
爾時에 金剛藏菩薩이 告解脫月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具足第六地行已에 欲入第七遠行地인댄 當修十種方便慧하야 起殊勝道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雖善修空無相無願三昧나 而慈悲不捨衆生하며 雖得諸佛平等法이나 而樂常供養佛하며 雖入觀空智門이나 而勤集福德하며 雖遠離三界나 而莊嚴三界하며 雖畢竟寂滅諸煩惱焰이나 而能爲一切衆生하야 起滅貪瞋癡煩惱焰하며 雖知諸法이 如幻如夢하고 如影如響하고 如焰如化하고 如水中月하고 如鏡中像하야 自性無二나 而隨心作業이 無量差別하며 雖知一切國土가 猶如虛空이나 而能以淸淨妙行으로 莊嚴佛土하며 雖知諸佛法身이 本性無身이나 而以相好로 莊嚴其身하며 雖知諸佛音聲이 性空寂滅하야 不可言說이나 而能隨一切衆生하야 出種種差別淸淨音聲하며 雖隨諸佛하야 了知三世가 唯是一念이나 而隨衆生의 意解分別하야 以種種相과 種種時와 種種劫數로 而修諸行이니라 菩薩이 以如是十種方便慧로 起殊勝行하야 從第六地로 入第七地하나니 入已에 此行이 常現在前이 名爲住第七遠行地니라
그때에 금강장보살이 해탈월보살에게 말하였습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제6지의 수행을 구족하고 나서 제7원행지(遠行地)에 들어가려면 마땅히 열 가지 방편 지혜를 닦아서 수승한 도(道)를 일으켜야 하느니라.
무엇을 열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비록 공하고, 모양 없고, 원이 없는 삼매를 잘 닦지만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버리지 아니하느니라.
비록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얻었지만 항상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비록 공함을 관찰하는 지혜의 문에 들었지만 복덕을 부지런히 모으느니라.
비록 삼계를 멀리 떠났지만 그래도 삼계를 장엄하느니라.
비록 모든 번뇌의 불꽃을 끝까지 소멸하였지만 일체 중생을 소멸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번뇌의 불꾳을 일으키느니라.
비록 모든 법이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변화와 같고, 물 가운데 달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아서 성품이 둘이 없는 줄 알지만 마음을 따라 업을 짓는 것이 한량없이 차별하니라.
비록 일체 국토가 마치 허공과 같은 줄 알지만 능히 청정하고 묘한 행으로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느니라.
비록 부처님의 법신은 본 성품이 몸이 없는 줄 알지만 상(相)과 호(好)로 그 몸을 장엄하느니라.
비록 모든 부처님의 음성이 성품이 공하고 적멸하여 말할 수 없는 줄을 알지만 능히 일체 중생을 따라서 여러 가지 차별하고 청정한 음성을 내느니라.
비록 모든 부처님을 따라 삼세가 오직 한 생각인 줄을 알지만 중생들의 뜻으로 이해하고 분별함을 따라서 여러 가지 모양과 여러 가지 시절과 여러 가지 겁으로써 모든 행을 닦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열 가지 방편 지혜로 수승한 행을 일으키므로 제6지로부터 제7지에 들어가는 것이며, 들어간 뒤에는 이 행이 항상 앞에 나타나는 것을 제7원행지에 머문다 하느니라.”
*
입지(入地)의 십종방편혜(十種方便慧)
*
‘입지의 십종방편혜’라는 제목에 내가 별을 세 개 쳤다. 오늘 다시 보다가 두 개를 더 칠까 하고, 이 대목은 별을 다섯 개 쳐야된다고 생각했다.
보다가 이해가 잘 되고 신심이 더 나고 환희심이 더 나는 대목을 만나면 무슨 다른 표현이 없기에 별을 막 치는 것이다.
별을 다섯 개 치자고 생각한 이 단락은 제7지 원행지에 들어가는 데 대해서 나온다. 이것은 단계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있는 것도 아니다. 항포문(行布門)의 입장에서 보면 낱낱 단계가 52위뿐만 아니라 5만 단계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고 원융문(圓融門)의 입장에서 보면 전부가 하나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이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완벽한 존재다.
앞에서 같이 읽은 서문에도 있었듯이 부처님이 과거에 수행하실 때 우리는 이미 거기에 학생으로 이름이 등록돼 있었다. 사실 알고보면 진묵겁전(塵墨劫前) 이전부터다.
전부가 그런 이치다.
예를 들어서 여기 책에는 종이 한 장이 있다. 이 종이는 나무에서 나왔다. 이 책이 몇 십년 전에 나온 책이라면 그 역사를 10년이나 20년 30년 정도로 보겠지만 종이라는 이 원료로 볼 것 같으면 수억 년이 이 속에 포함되어 있고 수 억년 세월이 종이 한 장 속에 기록되어 있다.
수억 년 지구의 역사가 이 속에 기록이 되어 있고 우주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과학자들이 분석해서 이런 것은 식은 죽 먹듯이 이야기 한다.
종이 한 장 뿐이겠는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굴러다니는 돌 하나 흙 한 줌에 전부 우주의 수억년 역사가 다 기록이 되어 있다. 풀 한 포기에, 돌 하나에, 흙 한 줌에 이 역사가 다 기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요즘엔 환하게 그냥 안다.
사실이 그렇다.
여기 물이 있는데 이 물 한 방울이 언제 생겼는가? 물이 생긴 역사를 우리가 모른다. 위대한 지혜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모를 정도로 이 물의 역사는 오래고 오랜 것이다. 그래서 이 물 한 방울을 분석하면 그 속에 수억 년의 이 우주의 역사가 다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제8 아뢰야식만 위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제8 아뢰야식에도 우리의 수많은 전생 전생 전생 전의 삶의 역사가 다 기록되어 있지만 물 한 방울 속에는 수억만 년의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정확한 사실이다. 과학은 처음엔 가설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은 이미 가설이 아니다.
요즘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범인이 흘리고 간 담배꽁초 하나 머리카락만 하나만으로도 그 범인이 누군지를 알아서 간단하게 잡는다.
머리카락 한 올 속에도 그 사람의 모든 정보가 다 포함되어 있다. 한 번 피운 담배꽁초에도 이미 침은 다 말라버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피운 사람의 모든 정보가 그 속에 다 들어있다.
너무나도 진부할 정도로 벌써 옛날에 이미 다 파악되고 알려진 사실들이다.
화엄경은 그러한 것들을 벌써 2600년 전에 다 깨닫고 말씀 하셨으니까 참 대단한 가르침이다.
*
십종방편혜라.
이시(爾時)에 : 이시에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 금강장보살이
고해탈월보살언(告解脫月菩薩言)하사대 : 해탈월보살에게 고해 말씀하사대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구족제육지행이(具足第六地行已)에 : 제 6지 행을 구족한 뒤에
욕입제칠원행지(欲入第七遠行地)인댄 : 욕입제7원행진댄 원행진댄이라고 읽어야 된다. 토를 잘 못 달았다. ‘-지인댄’이라고 읽는 게 아니다. ‘-진댄’ 이렇게 읽는다. 제7원행지에 들어가고자 할진댄
당수십종방편혜(當修十種方便慧)하야 : 마땅히 열 가지 방편혜를 닦아서
기수승도(起殊勝道)니 : 수승한 도를 일으켜야 하나니 수승한 도
*
하등(何等)이 :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그 수승한 도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열 가지로 설명을 한다.
소위수선수공무상무원삼매(所謂雖善修空無相無願三昧)나 : 소위 비록 공삼매, 무상삼매 상이 없다는 삼매, 무원삼매 원이 없다는 삼매 이것을 흔히 3삼매라고 하는데 초기 불교에서는 이것을 중요시 여긴다. 그것을 비록 잘 닦기는 닦으나, 닦다보면 공하니까 중생 돌볼 마음이 안 난다. 남이야 굶어죽든 말든 인과를 모르고 사정없이 제멋대로 살든 말든 소승은 그런 것에 관심을 안 가진다.
다 공이고 무상이기 때문이다.
형상이 없고 아무 꿈도 없는데 중생들이 무슨 짓을 하건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소승들의 마음은 그렇다. 자기 혼자만 열반에 들어서 이생은 여기서 ‘사요나라’ 하고 끝내버리면 끝이다. 그것이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무여열반에 들어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을 다 갖추고 잘 닦았으나
이자비불사중생(而慈悲不捨衆生)하며 : 자비로써 불사중생이다.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마스님의 선법 가르침이 최초로 기치를 든 것이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인데 이 말을 스님들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마음을 관하는 것, 마음 닦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다 아우르고 있다는 뜻이다.
총섭제행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제행은 육바라밀 사섭법 사무량심 내지 십바라밀 인의예지신 그런 것까지도 다 제행, 모든 수행이라고 하는 말에 포함된다.
그걸 다 닦아야 된다고 하면 할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마음 하나만 관찰하면 끝난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고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가? 더구나 달마스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고 크게 잘못된 말이다.
관심일법 총섭제행이라고 하는 말이 참 잘못된 말이다.
여기 보면 공과 무상과 무원삼매를 닦았지만 자비로써 중생을 버리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다.
중생을 보살피고 중생이 인과를 몰라서 제멋대로 마음대로 살고 지옥 드나들기를 자기 집에 드나들듯이 하고 동산에 드나들 듯이 하고 놀이터에 드나들듯이 하는 그런 일을 어떻게 하더라도 깨우쳐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을 나몰라라 하면 어떡하는가?
관심일법에 어떻게 그런 이치가 다 포함되는가? 관심이면 관심일 뿐이다. 다른 행은 포함이 안되어 있다.
그것이 굉장한 말인냥으로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고 하고 떡 앉아서 그것으로써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천만에 잘못된 일이다.
*
수득제불평등법(雖得諸佛平等法)이나 :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법을 비록 다 알았으나
이락상공양불(而樂常供養佛)하며 :상락공양불이다.항상 모든 생명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을 전부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는 것을 즐겨해야 된다.
대단한 말씀이다. 부처님하고 평등하다. 한마음 깨달으면 부처님이다. 물론 그렇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다.
제불과 평등한 법을 얻었으나 그러나 모든 생명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공양 올려야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화엄경의 위대한 점이다.
*
수입관공지문(雖入觀空智門)이나 : 비록 공의 지혜를 관하는 문에 들어가서는, 모든 것이 공하다. 우리가 반야심경 금강경 공의 이치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많은 노력을 들여가면서 공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하는가.
거기에 대한 이론과 논문이 얼마나 많은가.
공을 발견한 것은 참 위대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한 것을 다 마스터 했다손 치더라도 그러나
이근집복덕(而勤集福德)하며 : 복과 덕을 부지런히 모아야 된다. 그래서 관공지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공 법공 구공 나도 공하고 대상도 공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함께 공한 이치 그 삼공을 금강경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이론을 전개하면서 이야기하는가?
반야심경 강의하는 사람들이 다 공(空)자 하나에 매달려 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위시해 600권 반야부, 또는 600부 반야경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시교다.
대승불교에 들어가는 초입문서이고 입문서다.
대승시교는 비로소 시(始)자 처음 시(始)자, 대승불교 이치에 들어가는 입문서다.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매달릴 일이 아니다. 물론 양은 많은데 양 많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흙이 많지만 다이아몬드는 조금만 있어도 그 가치가 엄청 나간다. 금도 양은 적지만 흙이나 구리나 동, 철 같은 것보다 훨씬 가치가 나간다. 그 양을 가지고 따질 일도 아닌 것이다.
다수결이 꼭 옳은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결정한다고 하는 것도 크게 잘못된 이치다. 할 수 없이 다수결로써 결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큰 모순이 있다. 다수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가? 다수라고 해서 꼭 맞는 건 아니다.
*
아공 법공 구공 공의 도리를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색 공즉시색 수상행식도 역부여시라. 하면서 쪽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면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무안이비설신의인데 안이비설신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안계 내지 무의식계 12인연도 없고 8정도도 없고 무슨 4성제도 없고 싹 다 없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런 이치를 다 알긴 알았으나 근집복덕이라. 이것이 남아 있다. 근집복덕 부지런히 복덕을 닦아서 모아야 된다. 복과 지혜를 닦아서 모아야 된다.
화엄경 말고는 이런 말이 없다.
입관공지문이라. 여기까지만 있다.
공으로 관하는 지혜의 문에 들어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를 안다.
내가 반야심경을 연구하고 번역도 하고 강설도 하다가 이것을 글자 넉 자로 딱 요약하니까 ‘나는 없다’가 되었다.
반야심경이 270자인데 넉자로 번역을 하니 ‘나는 없다’다.
요즘 도올 선생이 반야심경에 대한 책을 냈는데 아주 재밌게 냈다. 여섯 자로 번역을 했는데 차마 쌍스러운 소리로 표현을 해서 내가 이 자리에서 말을 못하겠다.
요즘 많이 읽히고 있고 여기 혜명화가 사서 보내줘서 나도 잘 읽었는데 그 속에 보면 우리말 여섯 글자로 아주 쌍스러운 소리로 표현을 했다.
방송만 안나가고 우리끼리 하는 공부라면 내가 말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근집복덕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러한 도리 ‘나는 없다’고 하는 도리를 다 안다 하더라도 부지런히 복과 덕을 모아야 된다. 또 모아야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별을 다섯 개를 치고도 더 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치를 분야분야로 부분부분 낱낱이 설명한 품은 이세간품이다. 이세간품에 가면 전부 권실쌍행이다.
권과 실 방편과 실법을 쌍으로 행하는 이치를 제일 여러 번 강조해 놓은 것이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이세간품에 많이 나와 있다.
*
수원리삼계(雖遠離三界)나 : 그 다음 수원리 삼계나
이장엄삼계(而莊嚴三界)하며 : 장엄삼계하며.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멀리 떠난다.
이것이 초기 불교 근본불교 소위 소승불교의 목적이다.
삼계를 떠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다시 안 오고 윤회도 안 하고 지구상에 사는 중생들이야 지옥을 가든 천당에 가든 극락에 가든 지지고 볶고 싸우던 몰라라 하고 나는 삼계를 떠난다고 하는 가르침이 불교 안에 있다. 지금도 그 불교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 한다.
수원리 삼계여서 삼계를 떠나는 실력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장엄삼계 한다. 삼계를 잘 장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착하게 살고 육바라밀을 닦고 인의예지를 지키고 인과를 믿고 살도록 하면 세상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세상이 된다.
첫째 인과를 믿고 살도록 하면 그것이 장엄삼계, 삼계를 장엄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어찌 삼계를 떠나 나 몰라라 하는 일을 하겠는가. 부처님은 그렇게 안했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평균 수명이 30에서 40사이였다. 부처님은 80을 사시면서 80노구를 이끌고 다니면서 그 인과의 도리 하나라도 가르치고 연기의 이치 하나라도 가르쳐서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대로 인과의 법칙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도록, 무리하게 욕심내서 살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그것이 부처님의 자비다.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서의 장엄삼계다.
요즘 우리가 급식활동도 많이 하고 우물도 파주고 자전거도 보내주고 학교도 세워주고 학용품도 사다 준다. 한때는 북한에 국수 공장도 세워주고 밀가루도 보내서 국수도 많이 만들어서 배고프지 않게 하기도 했다.
*
수필경적멸제번뇌염(雖畢竟寂滅諸煩惱焰)이나 : 필경에 모든 번뇌의 불꽃을 적멸하게 해서 다 깨뜨렸다. 필경에 번뇌의 불꽃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이능위일체중생(而能爲一切衆生)하야: 능히 일체 중생을 위해서
기멸탐진치번뇌염(起滅貪瞋癡煩惱焰)하며 : 일으키고 소멸한다. 무엇을 그렇게 하는가? 탐진치 번뇌의 불을 일으켰다가 껐다가 살렸다가 살렸다가 껐다가 필요에 따라서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기도 하고 끄기도 한다.
필요할 때는 일으키고 또 필요가 없으면 꺼야될 때는 그 삼독의 불길을 끄기도 한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이라고 하는 경에는 탐진치 삼독이 그대로 도(道)다 라고 이야기 해놨다.
내가 해설한 <보살계를 받는 길>이라고 하는 책은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가 보살계의 서문을 쓴 책인데 서문의 그 구절 하나에 그만 반한 것이다.
제법무행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서 탐진치 삼독이 그대로 도라고 하였다.
여기도 일으킨다고 해놨다.
무엇을 기(起)하여 멸(滅)하는가? 탐진치 번뇌염(貪瞋癡煩惱焰) 탐욕과 진심과 치심의 번뇌의 불길을 일으키기도 하고 끄기도 하고 끄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비록 번뇌의 불길을 다 껐다. 끈 상태이기는 하지만 일체중생을 위해서는 탐욕 부릴 때는 탐욕을 부리고 어리석음을 보일 때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진심을 보일 때는 진심을 보이기도 한다.
*
수지제법(雖知諸法)이 : 모든 법이
여환여몽(如幻如夢)하고 : 환과 같고 꿈과 같고
여영여향(如影如響)하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여염여화(如焰如化)하고 : 아지랑이와 같고 변화한 것과 같고
여수중월(如水中月)하고 : 물에 비친 달과 같고
여경중상(如鏡中像)하야 :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아서
자성무이(自性無二)나 : 자성이 무이한 줄을 아나 자성이 본래 둘이 없다. 텅 비었다는 말이다. 공한 줄을 알지만
이수심작업(而隨心作業)이 : 마음을 따라서 업을 짓는 것이 불업 보살업, 부처의 업도 짓고 보살의 업도 짓고 하는 그런 업을 짓는 것이
무량차별(無量差別)하며 : 무량차별하다. 모든 법이 꿈과 같고 환과 같다.
금강경에서는 일체 유위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 이와 같이 보아라. 그래야 제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라고 했다.
여기는 작업하라. 수심작업 하라. 기회에 따라서 마음을 따라서 업을 지으라고 하였다.
업 안 짓는 것을 제일로 치는 것은 소승불교들이 하는 이야기다. 낮은 불교에서는 업을 안짓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업을 안 짓고 어떻게 살겠는가?
물 한 모금 마시고 호흡 한 번 하고 걸어가고 하는 것이 전부 업을 짓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업도 있고 보살업도 있는 것이다.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고 보살이 중생을 제도 하는 것은 전부 불업이고 보살업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그냥 널려 있다.
대단하다. 그런 이치를 한 페이지에 묶었다면 지금 이 단락이라고 할 수가 있다.
수심작업하라. 부처의 업도 짓고 보살의 업도 짓고 살생할 것이 아니라 방생을 하고 탐욕을 부릴 것이 아니라 보시를 하고 등등 그런 부연설명을 하기로 하면 스님들이 더 많이 할 수 있다.
업을 짓는 것이 한량없이 차별하다. 상황 따라서 경우 따라서 여러스님들이 얼마든지 부연 설명할 수가 있다.
*
수지일체국토(雖知一切國土)가 : 일체 국토가
유여허공(猶如虛空)이나 : 마치 허공과 같은 줄을 아나
이능이청정묘행(而能以淸淨妙行)으로 : 능히 청정묘행으로 일체 국토가 유여허공이라. 그런데 거기에서 아름다운 행이 있다. 보살행 육바라밀 사섭법 사무량심 인의예지신 이러한 것들이 청정묘행이다. 그러한 청정묘행으로
장엄불토(莊嚴佛土)하며 : 불토를 장엄한다. 이상적인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불토를 장엄한다.
첫째 인과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세상을 만든다. 그러면 범죄가 일어날 까닭이 없다.
정치판이 시끄러운 것은 전부 인과를 모르고 자기 당리당략과 사리사욕만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 어지러운 판에 힘없는 국민만 휘둘리고 애를 먹는다. 국민들의 삶에 필요한 법안들이 올라가서 발의된 지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처리도 안하고 자기들 싸우느라 밀쳐 놓은 예가 허다하다.
좋은 일을 해야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좋은 일을 못하는 것은 인과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과를 먼저 가르쳐야 된다. 첫째 우리 자신이 인과의 이치를 잘 믿고 잘 실천하고 주변의 인연 있는 사람에게 가르쳐야 된다.
내가 너무 자주 말해서 좀 그렇기는 하지만 성경에도 ‘뿌린 대로 거두리라’고 나와 있고 우리 선조들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고 다 가르쳤다. 그런데 제대로 실천을 못한다.
*
수지제불법신(雖知諸佛法身)이 : 비록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본성무신(本性無身)이나 : 본성이 무신(無身)이나, 법신은 어떤 형상 있는 몸이 아니다. 본성은 몸뚱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모르는가.
이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 하면 법신이다. 그래서 아무 데나 대고 절을 한다. 그렇다고 따로 독립시켜서 불상을 만들어 놓은 것도 무시하지 않는다. 형상 있는 것도 법신 속에 포함되고 형상 없는 것도 법신 속에 포함된다. 내 마음도 법신 부처님에 포함된다. 전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을 조금만 알게 되면 고개가 끄덕거려지고 납득이 간다.
본성이 무신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데 그러나
이이상호(而以相好)로 : 상호로써
장엄기신(莊嚴其身)하며 : 그 몸을 장엄한다. 참 중요한 말이다. 내가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자주 이야기 한다. 타고난 몸이나 얼굴은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남 앞에 가서 그래도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을 설한다 하면 머리도 깨끗하게 깎고 수염도 깎고 가사 장삼을 갖춰 입고 나가서 이야기해야 된다.
중국스님들이나 대만스님들은 ‘부처님 빽으로 내가 이야기 한다’고 부처님까지 앞에 딱 모셔 놓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앞에 있는 부처님이 알아서 한다’는 의미도 되는 것 같다. 신언서판중에 말(言)도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입장이라면 아무리 농담하고 싶고 농담하는 것이 재미있다 하더라도 좀 참아야 된다. 그런데 못 참고 끊임없이 농담만 엮어가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스님들은 여름이라고 그러는가 TV에 동방도 안 입고 조끼만 입고 나와서 강의를 하기도 한다.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하는지 신언서판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신언서판은 옛날에 공무원 뽑을 때의 네 가지 조건이다.
신(身) 생긴 것은 타고 났으니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 그 자리에 임하는 몸가짐 마음가짐 자세가 신이다.
취직하려고 사람 뽑을 때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면접하는 데 나아가서야 되겠는가? 스님들은 누구 앞에 서는 것이 면접 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면접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런닝 위에다 조끼만 걸치고 가서 면접을 보겠는가? 그런 복장이라면 입구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야한다. 그런 것이 몸 신(身)자다.
말[言]은 자기가 갖춘 대로 정말 겸손하고 공손하게, 가능하면 다듬어진 말로 해야 한다.
서(書)는 요즘 전부 컴퓨터로 글씨를 쓰니까 손글씨를 쓸 일이 없지만 남에게 글씨를 보인다고 하면 그 글씨를 함부로 쓰면 안되고 잘 써야 된다. 정 자신이 없으면 안써야 된다.
판(判)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력이며 사상이고 정신이다. 불교적인 신심과 사상이 판단력이다.
그런 것들도 여기에 나오는 상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는 일이다.
옛날에 선방에 다닐 때 지대방에서 보면 거친 수좌들이 옷을 함부로 입는다. ‘왜 그렇게 하고 다니냐?’ 하면 할 말도 다 있다. 제불불신의 본성이 무신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어떤 형상있는 몸이 아닌데 뭘 그렇게 외모 가지고 따지느냐 하는 식이다. 이런 것들도 이 행간(行間)에 자세하게 다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우리 경을 보는 사람들은 볼 줄 알아야 된다.
행간에 있는 숨어있는 내용들을 찾아내기로 하면 한 구절 안에 수없이 나올 수 있다. 이 한 구절만 해도 얼마든지 그렇다.
*
수지제불음성(雖知諸佛音聲)이 : 모든 부처님의 음성이
성공적멸(性空寂滅)하야 : 그 성품이 공하고 적멸해서
불가언설(不可言說)이나 : 뭐라고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 줄을 다 잘 안다.
부처님은 팔만 사천 법문을 설해 놓고도 ‘나는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다고 우리가 밥먹듯이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능수일체중생(而能隨一切衆生)하야 : 능히 일체 중생을 따라서
출종종차별청정음성(出種種差別淸淨音聲)하며 : 종종 차별 청정 음성을 낸다. 가지가지 차별된 훌륭한 음성을 내야 된다.
좋은 말 최고 수준의 말을 하면 ‘아 그 사람 보기보다 말하는 것이 아주 양반같이 말해. 그 사람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아주 교양있어 보여. 나는 시시하게 봤는데 무식하고 아무 것도 아닌 보통 중인줄 알았는데 말씀 들어보니까 영 정말 달라. 정말 부처님 제자 같애. 겸손하고 너무 근사하더라’고 하면서 무시하던 모습이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청정음성이 그런 것이다.
종종차별 청정음성을 낸다. 아무리 부처님이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중생을 따라서 종종차별 음성을 내야 된다.
*
수수제불(雖隨諸佛)하야 ; 비록 모든 부처님을 따라서
요지삼세(了知三世)가 : 요지 삼세가
유시일념(唯是一念)이나 : 유시일념이나. 과거 현재 미래가 오직 일념임을, 일념즉시 무량겁인 줄을 환하게 알긴 알지마는
이수중생(而隨衆生)의 : 중생들의
의해분별(意解分別)하야 : 생각에 이해하고 분별하는 것을 따라서
이종종상(以種種相)과 : 가지가지 모습과
종종시(種種時)와 ; 가지가지 시간과
종종겁수(種種劫數)로 : 가지가지 겁수로써
이수제행(而修諸行)이니라 : 모든 행을 닦느니라.
이것이 치우친다든지 자기가 하는 것 일변도로 나간다든지 하는 것은 제대로 철든 사람으로서는 금물이다.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다. 그 한마디 말로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망쳐놨다. 앉아서 마음 관찰하는 한 가지 법으로써 모든 수행, 육바라밀이다, 사섭법이다 사무량심이다 인의예지다 하는 것을 다 포함한다고 하니까 엉망인 것이다. 자기들이 어디 제대로 가정교육이 있었는가 무슨 사회 교육이 제대로 있었는가. 그것이 하나도 고쳐지지도 않은 채 그냥 가지고 있다가 어떤 경우에 그대로 표현이 된다. 그래서 엉망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관심일법총섭제행이다’ 하면 우리는 ‘아니다’ 하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된다.
육바라밀을 닦아야 되고 사섭법 사무량심 인의예지를 닦아야 된다. 그 안에 모든 행이 다 포함되어 있다면 밥도 안먹어도 되고 아무것도 안해도 될 텐데 그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이 방송을 타고 나가서 불교계에 문제를 일으켰으면 좋겠다.
‘관심일법총섭제행이 아니다. 틀린 소리다.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을 버려놨다’ 라는 이 이야기가 방송을 타고 나가서 좀 문제를 일으켰으면 좋겠다.
내가 그 전에 실상사에서 금강경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는데 ‘불교 1번지 조계사 법당에서 영가 장사를 한다’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 이야기가 방송을 타서 사람들이 좀 이야기가 많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누구 한 사람 따지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완전히 목석이 되어버렸는가, 무슨 도인이 되어버렸는가, 보살이 되어버렸는가 그렇다.
*
보살(菩薩)이 : 보살이
이여시십종방편혜(以如是十種方便慧)로 : 십종방편혜로 이와 같은 열 가지 방편혜로써
기수승행(起殊勝行)하야 : 수승한 행을 일으켜서
종제육지(從第六地)로 : 육지로부터
입제칠지(入第七地)하나니: 제7지에 들어가나니
입이(入已)에 : 들어가고 나서는
차행(此行)이 : 이 행이
상현재전(常現在前)이: 앞에 딱 나타나 있다. 이러한 중도적 행, 한 가지 의견도 치우치지 않고, 특히 공과 무상과 무원 여기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되는 것 그런 것이 중요하다.
물론 탐진치를 없애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만 탐진치 삼독을 또 일으켜야 할 때는 중생을 위해서 능히 일으키는 아주 강력하고 용기 있고 활발발한 보살행이 제7지에 들어가는 행이다.
명위주제칠원행지(名爲住第七遠行地)니라 : 앞에 나타난 것이 원행지에 머문 것이다. 이쯤 되어야 원행지에 머문 사람이라고 이름할 수가 있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_()()()_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_()()()_
_()()()_
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