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事直說』 연극학과 9746133305 이성국
1. 농사직설이란?
농사직설은 조선 전기 농사에 관한 기술을 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이다. 서문에 “농사 이외의 잡된 他說이 섞이지 않았고
곧고 간결한 내용을 엮는데 힘썼으므로”라고 하는 내용을 미루어 농사직설이라는 제목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름 그대로 곧고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요즈음의 노트북 사용설명서와 같은 매뉴얼북처럼 분량이 아주 적다. 내용은 중요 곡식류에 국한되고
빈약하지만 한국식 농서의 효시로서 이후로 간행된 여러 농서 출현의 큰 계기가 되었다.
2. 농사직설의 독자층
농사직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나왔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농민은 포함이 되지
않았다. 농사직설은 농민에게 읽힐 목적으로 간행된 것이 아니고 관리들의 교육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간행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해인 1430년, 각 도의 감사와 주, 부, 군, 현, 그리고 서울 안의 관원들에게 배포되었다. 농사직설이 간행된 이후 훈민정음이
창제(1443년)되고 반포(1446년)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문으로 수차례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사항을 종합해 볼 때
농사직설은 권농관(勸農官)의 실무매뉴얼과 같은 책이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의 권농관들은 중국의 농서(農書)들을 이용하여 권농사무를 담당하였는데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농업 현실을 제대로 반영
하기가 곤란 하였다. 농사직설 단계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법을 숙지하고 이에 입각하여 권농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3. 편찬목적과 배경
농사직설 서문에 보면 “(주상 전하께서)오방의 풍토가 다르고 작물에 따른 농법이 각기 있어 고서의 내용과 맞지 않음을 아시고 각도
감사에게 명하사 고을의 늙은 농부들이 경험한 바를 모두 들어 올리라 하셨다”고 나온다. 중국의 농업 서적은 당시의 조선 풍토
조건과 맞지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기술상 적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29년(세종 11년)에 세종은
정초(鄭招)와 변효문(卞孝文)등에게 명하여 각도 관찰사들에게 경험이 많은 농부(老農)들로부터 농업 기술을 알아내게 하고, 이를
모아서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일차적으로는 우리 실정에 맞는 농사법을 소개하는 것이 편찬의 이유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전국적인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통해 조세수입을 확대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세종대에 이루어진 새로운 조세법인 공법(貢法)의 시행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貢法의 시행은 먼저 전국적인 농업생산력의 안정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공법은 일종의 정액세제인데 공법 이전에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라고 해서 농사가 풍년일 때와 흉년일 때, 상황에 따라서
세율을 달리 조정해서 적용하는 세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농민의 형편을 고려하려는 좋은 뜻으로 제정된 것이지만 권농관의
도덕성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제도적 단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1444년(세종26년) 세종은 전세를 공법으로 바꾸었는데 공법을
찬성했던 하삼도(下三道:충청도와 영호남)부터 실시했다가 차차 다른 지역으로 확대했다.
농업생산성이 낙후된 지역인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은 공법에 크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풍토의 차이로 생산성이 도저히 하삼도를
따라 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지역적 농업
생산력의 차이를 해소하는 것이 공법의 원활한 시행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편찬목적을 고려해보면
농사직설이라고 하는 책은 하삼도의 선진농법을 북부지역의 농경조건에 맞게 수정하여 작성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정상은
농사직설 경지(耕地) 항목의 서술이 일반 숙전보다 한전, 박전, 황지에 대한 설명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종도(種稻)
항목에서 북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는 만도수경(晩稻水耕), 건경법(乾耕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고, 수전의 경우는 하남지역의
농법보다는 낮은 수준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4. 농사직설의 목차와 내용
내용은 곡식작물 재배에 중점을 두고 10항목으로 나누어 논술하고 있다. 비곡종(備穀種)은 종자의 선택과 저장법을 다루고 있다.
좋은 종자를 구하는 법, 또 그렇게 구한 것을 어떻게 저장해야 좋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적고 있다. 경지(耕地)는 땅갈이에
대한 내용인데 거친 땅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기 위해서 흙의 맛을 감별하는 방법도 나온다. 종마(種麻)는 삼의 파종과 재배법‚
종도(種稻)는 벼의 재배법인데 다른 항목들에 비해서 좀 긴 편이다.
種稻에서 소개된 당시의 벼의 파종법을 살펴보면, 우선 직파법(直播法)이 있다.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방법인데 조선초기까지 대부분의 농민들이 이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건답법(乾畓法)은 비료 성분을 묻힌 볍씨를 물이 없는
논에 파종하여 키우다가 장마 이후로 물을 담은 채 논벼로 기르는 방법이다. 묘종법(苗種法)은 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논에 옮겨
심어 재배하는 것으로 요즘의 이앙법이다. 이앙법은 김매는 횟수를 대폭 줄일 수 있는데, 직파법보다 대개 6,7할 정도의 김매기
노동력 절감효과가 있다고 한다. 산도법(山稻法)은 밭벼이다.
종서속(種黍粟)은 기장·조·수수의 재배법‚ 종직(種稷)은 피의 재배법, 대두소두녹두(大豆小豆綠豆)는 콩, 팥, 녹두의 재배법,
종대소맥(種大小麥)은 보리와 밀의 재배법, 종호마(種胡麻)는 참깨 재배법‚ 종교맥(種蕎麥)은 메밀 재배법이다. 모두 10항목으로
주요 곡물에 대한 것만 언급하고 있고 설명도 매우 간단하다.
거름으로는 인분, 우마분, 재거름, 녹비(참갈 잎, 녹두 등), 외양간 거름, 오줌재(尿灰) 등이 사용되었으며, 농기구로는 쟁기, 써레,
쇠스랑, 미리개, 번지, 고무래, 따비, 호미 등이 쓰였다.
『농사직설』리포트.hwp
<참고문헌>
김상태,『농사직설과 조선 초기의 농업실태』, 인하대학교, 2000
서정상, 『농사직설의 農法과 老農』, 태동고전연구 Vol. 16, 43쪽~84쪽, 1999
김영진,『농사직설 譯文』농촌경제 Vol.6, 91쪽~101쪽, 1983
이춘영, 『한국농학사』2장 조선전기의 농학, 민음사, 1989
김영진, 이은웅,『조선시대 농업과학기술사』3장 조선전기의 농서형성과 주요농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