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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을 품자
출애굽기 23:1~13
우리는 수요일 저녁 예배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더 알고 그를 본받고자 하는 취지로 성경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39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주님을 증거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성경의 율법 역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율법은 곧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종교적 규례도 나오고 윤리적 사회적 규범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한 규례들은 곧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곧 우리 구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기도 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뜻은 곧 우리 구주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
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행동, 예수님의 교훈들을 늘 배우고 그 모든 것을 잘 따라 행하여 주님을 닮고 주님의 뜻을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3장 1절로부터 13절까지의 율법 규례들을 차분하게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 곧 우리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곧 우리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 닮은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마음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율법은 주의 백성들에게 거짓된 이야기를 퍼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진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며 우리 구주의 진실한 마음을 본받아야 하기에, 거짓된 것들은 일체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는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거짓 그 자체입니다. 주님께서 마귀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이 요한복음 8:44에 나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는 말하는 것마다 사실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그럴듯하고 태연하게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기 때문에 순진한 자들은 다 속아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진실무망하신 분이시기에 거짓을 미워하고 마귀가 즐겨 쓰는 거짓말을 극도로 혐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말을 만들고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그러한 거짓말을 흘리는 것을 심히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짓말을 지어 퍼뜨리는 일들이 우리나라의 정치계나 연예계나 일상의 삶에서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의 적지 않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극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자살하기도 하며 소송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거짓된 이야기를 만들고 이것을 퍼뜨리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렇게 거짓된 이야기를 만드는 것만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거짓된 이야기들을 듣고 그것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믿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분별력을 가져야 하고, 섣부르게 남에 대한 비방들을 받아들이는 순진한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비방하고 악한 말로 동조하지 말고 지켜보고 진실과 거짓 여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된 풍설을 자기가 짓지 아니하였더라도 이러한 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말들을 들은 대로 전달하여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고 누군가에게 씻지 못할 불명예를 안겨주고 그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버리는 것 역시 큰 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남을 향한 비방들을 들을 때 곧장 받아들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지켜보고 거짓은 일체 동조하지 말고 오직 진실만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율법은 위증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1절 후반절에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명하신 율례가 그러합니다. 재판장에 증인이 될 때에 자기와 가까운 사람, 친척, 고향 사람이라고 해서 편들어 진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증인은 언제나 하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 마지막 날에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주의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다시금 강조하여 명령하시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여기서 진실을 추구하는 바를 위협하는 한 가지 요소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다수주의입니다. 다수가 비진리와 거짓을 진실로 알고 따른다고 해서 그 길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거짓을 진짜로 믿고 진실의 편에 선 자를 억압하며 비난한다고 해도, 다수를 따르지 않고 진실과 진리의 편에 끝까지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무지와 편견 속에서 진리와 생명의 길을 외면하는 자들이 대다수일 때 그 대다수에 동조하면 평안하겠지만, 그렇게 거짓과 비진리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길입니다.
과거 중세의 무지와 부패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해석하고 의의 길, 생명의 길을 오직 성경에 기초하여 가르치기를 시작한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정신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존 캘빈 역시 루터와 함께 일어나서 5대 교리를 기초로 한 성경의 진리를 외쳤습니다. Total Depravity(전적 부패),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제한 속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성도의 견인)의 성경의 다섯 가지 근본 진리를 힘껏 증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세 교회의 위협과 다수의 무지몽매함과 맞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다 보니, 마침내 초대 교회의 신앙을 되찾고 성경의 진리를 회복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비록 진실과 진리는 처음에는 따르는 자가 적을지라도 때가 되면 진리와 진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반드시 얻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수의 의견이라고 무조건 영합하여 따르는 자가 되지 말고 그 말이 진실인가, 진리인가를 잘 분별하여 진리와 진실 편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한 가지 더 진실주의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당부하시는 말씀이 3절에 나옵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의 뜻은 가난한 자라고 하여 동정심에 사로잡혀 무조건 가난한 자 편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비록 불쌍한 처지에 있더라도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그를 돕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복스러운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우리가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과 진리를 희생하면서까지 가난한 자 편에 무조건 서는 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진실은 진실로 밝혀야 하고, 재판은 진실에 입각하여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진실함과 동정심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은 법으로서 존중해야 하고, 돕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가 가난하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서 가게의 물건을 훔쳤다면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친 죄까지 용서받을 수는 없습니다. 절도가 죄가 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기에 그 절도 행위 자체를 변호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무죄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돕기 위해서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은 인간의 아름다운 덕으로 칭찬할 일이고 추천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라고 해서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편을 드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진실주의, 진리주의를 기뻐하심을 명심합시다.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위증하거나, 다수결과 여론 등에 따라 비진리와 거짓의 편에 서거나 혹은 가난한 자라고 하여 동정심 때문에 거짓말이라도 두둔하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거짓을 미워하는 분이심을 명심하고 주님 뵐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마음인 진실주의를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돕는 인도주의적인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4절,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주인이 있는 가축인 소와 나귀가 길을 잃어 헤매고 있다면 그 짐승이 원수의 소유일지라도 그 가축을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와 나귀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애가 탈까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한 것입니다. 자기가 그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무리 원수지간이 되었고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가축을 어서 찾아 돌려주는 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귀가 짐을 싣고 가다가 엎드러져서 못 일어나고 있을 때에도 그것을 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못 본 체하고 지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설령 그가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다가가서 그 미워하는 사람을 도와주어 짐을 부려서 그 가축들이 일어나 다시 짐을 실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위급한 일을 당할 때에 동일한 인간으로서 그 환난 당한 자의 도움이 되어주는 것이 사람다운 태도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환난을 만날 가능성이 있고 자기 혼자 그 고난을 헤쳐나갈 수 없는 시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그 사람이 설령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를 돕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원한 관계를 떠나 곤경에 처한 한 인간을 도와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수 있게 돕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한 인간의 진정한 인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남을 도운 사람을 그냥 두지 않고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에 아무런 조건없이 돕는 자들을 붙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거나 혹은 원한 관계나 미워하는 사람이 그런 어려움에 처했다고 도리어 못 본체 하고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잠언 24:12 말씀에 이르기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고 하였으며 이어지는 잠언 24:17~18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비록 원수일지라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여 미움이 남아 있는 자일지라도, 그들이 급박한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는 못 본 체하지 말고 그들을 돕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지진이나 쓰나미가 난 경우에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른 것이요 설령 그들이 이를 거부하였을 때에도 분노하지 말고 그들이 잘 회복되도록 기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원수도 아니라 우리의 형제라 할 수 있는 북한의 대다수 형제 자매들이 기근으로 농사도 못 짓고 굶어죽어가는 경우를 볼진대 우리가 그들을 돕는 방법을 찾아 돕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김정은 정권의 집권층이 이러한 일들을 반기지 않고 쌀을 준다 해도 군량미로 먼저 돌리고 일반 백성들에게 주지 않는 일이 생길 수 있지만, 그래도 주다 보면 부스러기라도 백성들에게 돌아가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긍휼한 마음을 버리지 않도록 합시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곤경을 볼 때 기꺼이 돕고자 하고 못 본체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 역시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원수까지도 선하게 돕는 긍휼한 마음을 품은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셋째로, 연약한 자를 배려하며 은혜를 베푸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10절로부터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을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둘리리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모든 것들이 피곤하고 지치고 힘든 것을 긍휼히 여기시고 쉼과 안식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땅도 계속 농사를 짓게 되면 지력을 다 잃게 되고 황폐화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도 일곱째 해는 농사를 짓지 않고 쉬게 하여 지력을 다시 회복하도록 안식년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년을 지킴으로 땅이 회복되어 또 다시 논과 밭의 곡식과 채소, 포도원의 과일들을 힘차게 재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땅 뿐 아니라 하나님은 가난해져서 논밭을 다 넘겨준 가난한 자들이 그 안식년 때에 저절로 자라난 것들을 거두어 먹게 해주십니다. 안식년에 저절로 자란 곡식과 채소와 포도원의 포도나 무화과 등을 마음껏 거두어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너그런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들짐승까지 생각하십니다. 가난한 자가 거두고 난 후에 남는 것들은 들짐승들 곧 들쥐, 사슴, 고라니, 까마귀, 까치 등도 그 남은 것들을 먹게 배려하고 계십니다.
안식일 규정도 여기서 강조된 것은 집안에서 늘 일에 시달리던 소와 나귀도 쉬게 하고 남종과 여종도 쉬고 그리고 그 여종의 자식도 하루 동안은 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나그네들도 그 하루는 바쁘지 않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편안히 쉴 수 있는 여유를 즐기게 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사회적 약자들이 지나치게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어서 고난하게 지내는 것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 뿐 아니라 그의 어린 자녀들까지, 나그네와 행려병자들까지, 걸인들까지, 심지어 들짐승과 날짐승들까지도 배려하시고 산천초목의 땅들까지도 지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기를 원하여 쉬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시며 부르신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연약한 자, 뒤처진 자, 지치고 병든 자들을 긍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쉼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주님께 기꺼이 기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런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각박하게 사람들을 몰아붙이지 않고 지친 이들의 기댈 어깨가 되어주고 그들로 쉼을 얻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지치지 않게 해주시고 환경과 여건도 여유를 주시어 다른 이들을 돕고 세울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율법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율법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거짓을 미워하고 항상 진실하게 살아갑시다. 원수일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할 때 기꺼이 돕는 마음을 가집시다. 약한 자들과 지친 자들을 쉬게 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마음을 품고서 이 세상을 살아감으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작은 천국의 향기를 풍기는 진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