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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의 전후 무질서와 인간성의 파괴를 딛고 일어선 곳은 한국군으로 1950년에는 100,000명에서 1953년 600,000명으로 팽창하였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단결되어 있으며 잘 조직화된 집단이며 곧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 징병제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모든 남자들에게 강하게 단련된 미군 장교조차도 싫어하는 신병훈련소, 훈련, 교육, 애국심, 반공주의 권위주의적 태도들을 주입시켜 주었다. 한국군운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이후 전쟁을 치루지 않았지만 이후 30년간 산업화라는 질서를 제공하는 학교가 되었다. 결국 근대의 공장을 군사조직에 비유하였던 것이 막스베버였으며 한국 경제 발전과 군대와의 관련성은 상당하다.
그러나 여전히 풍요롭지는 못했다. 1950년대 한국은 비참한 상황으로 모든 사람들이 극도의 가난과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길거리에는 고아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자신들을 지키고 서로 약탈하기 위하여 10~15명씩 무리를 지었으며 재난과 전쟁중의 부상을 당한 거지들은 돈을 가진 누구에게나 구걸을 하였는데 불구가 되었거나 굶주린 이들이 아이들이나 젖먹이와 함께 다녔다. 비참한 처지의 여성들을 싫은 1/2t 트럭은 매주말 군기지로 들어가 여성들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였다. 전후 20년이 지난 후에도 이 비극적이고 펠리니스크적인 잔재는 서울 중심가 근처의 청계천의 빈민가 그리고 길거리나 기차에서 커다란 신발을 끌고 구걸을 하는 고아들 속에 남아 있었다.
한때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은 1950년 6월 전쟁이 시작되었때 다아몬드 몇 개만 겨우 챙길 수 있었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남편은 죽었으며 부산의 난민촌 주변에서 아이들을 먹여 살리며 살았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이전에 살던 집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집은 반이 부서져있었고 남은 곳에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살고 있었다. 고생이 너무도 심해서 또 다시 전쟁이 난다면 자살해버릴 것이라 결심하였다. 서울의 유명한 소설가인 안정효는 전후 인천에서 자신의 가족의 삶에 대하여 글을 썼다.
내 아버지는 미군기지에서 목수로 일하셨고...어머니는 삼거리 근처에서 작은 가게를 하셨다. 나는 매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쓰레기장에 가곤 했다. 운이 좋게도 쓰레기 더미에서 고기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저녁에 온 가족이 고깃국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한 면도날이나 부러진 톱날이나 뾰족한 양철깡통에 발을 베이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때로 운이 좋아 오렌지를 찾거나 윤기나는 갈색 종이에 쌓이 허쉬초코릿을 찾기도 하고 셀로판 포장지 속에서 마치 보석처럼 5 가지 색으로 빛나는 Brach의 젤리 사탕을 찾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미군이 아직 고기가 많이 붙어 있는 닭다리 한 더미를 버렸다...어머니는 닭뼈와 보리 그리고 귀중한 쌀을 넣어 국을 끓여 주었다. 아버니는 어디서 닭다리를 찾았냐고 물었다. 나는 말씀드렸다. 그날 밤 아버지는 부엌에서 양철 통을 들고서 그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미국인을 이용하기
이 이야기는 그자체로 슬프지만 1950년대 남한은 창의적 사업에 적소였다는 점 그래서 미국인으로서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군인에서부터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국인들은 사실상 한국인들 소유하고 있었다. 적절한 수입을 가진 미국인들은 담배 한보루를 고려청자난 조선시대 목조 서랍장과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부를 축적할 수 가 있었다. 결국 한국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미국에 – 황금으로 도로가 뒤덮힌 나라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천상의 상점 – 갈 수 있으리라는 불가능한 희망을 품고 미국인들에게 매달려 있었다. 실제 한국의 암거래 시장의 주요 공급선이 미군 PX 였으며 1951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 원조 프로그램을 미군 사령관이 좌지우지 했기 때문에 이는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1972년 경 중산층의 친구가 미화를 가지고 외국인 상점에서 필수품을 사달라고 나에게 부탁하곤 했었다.
1950년대 미국인 국외거주자들의 주된 토론 주제는 특히 경제분야에 있어서 대단히 괴상하고 엉망인 80살 먹은 노인네라는 사실이었다. 이승만은 부산 난민캠프 주위에 담장을 둘러 마치 난민들이 그곳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하는데 돈을 낭비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설명해야만 했으나 대사관은 물론 내각의 장관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장관들은 사용처를 설명해야 한다는 규칙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경기순환에 있어 심각한 문제인 인플레이션은 이승만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 조폐창에 더 많은 ‘환’을 찍으라 말했다. 김일성이 방호산의 주력부대를 해주 북부에 배치하고 백선엽이 국군을 빨치산 출몰지역에서 38도선으로 배치하는 동안 국무성은 1950년 봄에 인플레이션에 관하여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놀랍다. 국무성은 만일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만 이승만은 장개석과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장개석에게는 매일 자신을 돌봐주고 사탕을 건내줄 미군 부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정치경제학은 무엇이었는가? 한마디로 말해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내일도 우리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충분히 성숙한 산업경제를 원했으며 젊은 산업부분은 보호 장벽 속에서 성장하기를 바랬으며 그 보호장벽은 일본이었다. 이러한 점을 이승만 혼자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학회에서 미시간 대학교의 훌륭한 학자인 Linda Kim이 말레이시아가 한국 모델을 따를 것인지 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절대 그럴리 없다면서 Linda Kim은 “한국인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 모든 것을 원한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할 수 있는 수출품목을 찾아 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Linda Kim은 이승만과 그 계승자들은 조세프 스탈린처럼 철강, 화학, 기계 그리고 이를 돌릴 수 있는 전력시설을 갖춘 자족적이로 완전히 성숙한 산업기반을 원한다는 점을 나타내었다. 1930년대 일본의 투자와 1950년대 북한 재건을 위한 소련의 투자는 김일성에게 완전한 산업기반을 주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요구는 확고했다. 남한은 또 하나의 일본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원한 것은 무엇인가? 공화당 관료는 이승만과 같은 사람들에게 가는 자금과 이들을 지키기 위한 미군사력의 형태를 통항 대규모 자금 유출을 줄이기를 원했다 – 최소한 이것은 미 재무성 장관인 George Humphrey가 몇 차례 주목할 만한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의 발언을 통하여 원했던 것이다. 미국은 몇 몇 나라들 특히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려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것이 시멘트 산업에 대한 과보호를 의미하였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합동참모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냉전의 최전선을 따라서 남한과 같은 국가에 대규모 부대를 주둔시켜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봉쇄정책의 개념은 George Kenan이 만들었지만 이를 구체화하고 실행한 것은 군이었다.) 분명한 것은 한국과 대만의 60만 병력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들은 비무장상태인 일본과 그 연장선상의 미국으로 몰려드는 물줄기를 막아주는 방패막이다.
따라서 공화당 관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자유시장 경제체제는 불가능했다. 이승만은 전문가들이 수입대체산업화(ISI)라고 하는 방식을 전전인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따라갔다. 국무성의 도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James Van Fleet 장군은 개입을 통하여 성취해냈을 것이다. 결국 한국 역시 자유세계 동맹의 일원이었다.
한국은 완고한 민족주의자가 이끌고 있는 “손님”이다. 이 나라의 정치제도는 독재가 정당정치와 유사파시스트적 동원체제와 결합하여 체계 전반에 걸쳐 부폐하였으나 여전히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의 특징을 갖추고는 있다. 경제적으로 실패하였다고 알려진 한국은 여전히 설명할 수조차 없을 만큼 돈이 많이 드는 국가로 수십억달라의 원조를 통하여 미국 재무성을 잠식해들어 오고 있다.
이승만은 이러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미국정부로부터 직접 원조를 끌어들였는데 이는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전체 한국 수입의 5/6에 달했다. 이는 “합법적”이거나 등록된 총액이다. 다른 한편 엄청난 수의 부정사례가 이승만 집권하에서 일어나 1952년의 텅스텐 수출사건이건 1954년의 면화수입 사건 또는 이와 유사한 다양한 사기사건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승만과 그 부인이 가져간 것은 거의 없지만 이들은 내각관료들이나 정치적 동료 그리고 옛 친구들이 축재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실제 1950년대 거의 모든 주요 사업계획은 이승만의 집무실을 거쳐 갔다. 따라서 우정은의 주장대로 그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미국의 가치에 대한 모욕이다. 이승만은 “동양의 상인”이자 “변명의 귀재”였다고 Foster Dulles가 말하였고 Eisenhower는 이승만의 “협박”에 대하여 불만을 나타냈다. Richard Nixon은 이승만을 도박사이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자 혹은 그 둘다 일수 있으며 공화당원들에게 허풍과 벼랑끝 전술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승만은 냉전이 부여한 대한민국의 엄청난 지정학적인 영향력과 판돈 모두를 가지려는 억척스런 노름꾼으로서 선천적 자질을 이용하여 미국은 자신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전지구적 헤게모니를 가진 국가로부터 최대한의 ‘임대료’를” 받아냈다. 희극배우인 Richard Pryor처럼 이승만역시 이 세상에 돈이 있어야 할 곳은 자신의 주머니 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돈이 미국 납세자의 돈이라는 사실은 걱정거리도 되지 않았다. 이것이 부조리 혹은 “그 나름의 이유인가”? 이렇듯 믿을 수 없는 현금의 유입을 가지고서 왜 이승만은 Eisenhower에게서 더 많은 돈을 얻어낼 방법을 찾아내려고만 했을까?
공식자료에 따르면 120억달러에 달하는 미국 국고가 1945-65년에 한국으로 흘러갔다. 원조자금만으로 1950년대 한국정부의 재정을 100% 충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1960년 한국의 일인당 소득이 $100 였다고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2천만명의 인구라면 국가 수입은 20억 달러가 된다. 공식적으로 120억달러가 20년에 걸쳐 한국으로 흘러 갔다는 것은 매년 6억달러가 공식적으로 유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수치를 사용하여 분석가가 제시한 수치는 1945년부터 1976년까지 매년 미국이 일인당 $600를 지원하였다 – 즉 모든 한국인 남성, 여성, 어린아이에게 매년 $600씩 30년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1957년이 그중 액수가 컸는데 한국이 3억 8천3백만 달러를 미국에서 경제원조로 받았으며 국내 세입은 4억5천6백만 달러였다. 그러나 1957년에 4억달러를 주가로 지원받았으며 주한미군 주둔비용으로 3억달러를 추가로 부담하였다. 군사원조규모는 유럽에 비하여 높으며 남미에 대해서는 4배에 달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그 규모는 엄청나다. 이 수치는 수치화 할 수 없는 것 – 즉 한국에서 이렇게 저렇게 돈을 쓴 수많은 미국인들 – 을 제외한 것이며, 또한 이 수치들은 비공식적이지만 엄청난 장외환전과 암시장을 설명하지 못하는데 이들은 일인당 연 $100에 달하는 수입을 확인할 수 없도록 만드는 완벽한 지하경제이다.
Ike와 국무담당 비서는 저항이 가장 적은 부분이 국방비라는 사실에 당황하였다. 한국의 전진 “봉쇄”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이승만은 돈을 받아서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건전한 독립국가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념적 선호를 없애는데 사용하였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결코 영리하지 못했다. New York 연방준비위원회 경제학자인 Arthur Bloomfield는 이승만에게 “실질적인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은행 채무에 대한 책임을 “채무가 타당하게 기속된 기관 즉 국회”에 부여하라고 충고하였다. Arthur Bloomfield는 이를 “사유화”라고 불렀지만 이 모든 것은 이승만의 기본적인 활동 방식에 한 단계를 더한 것 – 이제 이승만은 국회 금융위원회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을 할지를 말하면 된다 – 에 불과하였다. 당연히 이승만은 금융위원회 의장을 무시하였다.
수입대체산업화르는 것이 “불합리”한 것인가? 이승만은 비공식적인 미국의 남한 전략은 남한의 경제를 일본과 다시 결합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한국의 산업을 일본에 종속시키고 필요하다면 똑같이 만들어 둠으로써 이음매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은 다시한번 일본 성장에 있어 시종이 되는 것인가? 종속보다는 “또 하나의 일본”이 되는 편이 났다. 이것이 이승만의 정책이면에 있는 논리였다. 예를 들어 아이젠하워는 1954년 Val Fleet 장군에게 자신이 이승만에게 “우리는 일본이 한국을 ‘큰형’으로서 돌봐주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곧 이승만은 이를 Ike에게 되받아쳤다. “[일본과의 원조관계]는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물건을 구매하게 됨에 따라서 [한국]의 회복이 더뎌지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우리 자신의 생산시설을 건설하기 위하여 자원을 덜 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경제를 또 다시 일본 앞에서 속수무책인 상태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수입대체를 촉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환화에 대한 환율을 절상하는 것으로(환화의 가치 절하) 이는 받게 되는 달러와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원조 최대로하는 반면 수입자본과 중간재의 비용을 낮추게 된다. 또한 한국의 수출은 주로 쌀과 텅스텐과 같은 1차 생산물로서 가격탄력성이 없었다. 미국은 1953년과 1955년에 평가절하에 성공하였으나 1960년이 되기까지는 공식적인 감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입대체의 수혜자는 삼성의 이병철과 같은 사람으로서 이승만은 이병철에게 제일제당(설탕)과 제일모직(섬유)과 같은 일본 산업시설을 헐값에 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삼성은 이러한 호의를 기억하고 있다가 선거 때 보답하였다. 이병철은 6천4백만환을 이승만의 자유당에 제공한 혐의를 받았다. 미군의 존재 역시 군대식의 수입대체산업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승만 정권과 미 8군의 혜택으로 손쉽게 성공한 인물은 한진 이후 대한항공의 사주인 조중훈이었다. 1950년대에 걸쳐 조중훈은 미군과 운송계약을 체결하였는데 1960년에는 그 금액이 년간 2백2십8만 달러에 달하였다. 또한 여분의 버스를 미군으로부터 받아 인천 서울간 버스 노선을 개설하였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한진컨테이너가 우리의 항구에 쌓여 있거나 주요 도로나 철도를 통하여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구체제하에서 상업에 관하여 역사학자들이 무엇이라 말하건 간에 1953년 이후 남한의 거대한 도시 시장은 좌판들과 짐꾼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많은 외국인들에게 있어 서울의 거대 시장들 – 동대문시장과 남대문 시장 – 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길과 골목이 미로처럼 구불거리고 이국적인 향기가 코를 간질이거나 혹은 자극하고 작은 수레위 석쇠위에서 성게가 익고 있으며 태양 아래서 된장이 익어가며 볼 거리가 있고(돼지머리와 소불알이 여기저기에 있다) 골목을 돌아서고 계단을 내려서면 날짜가 지난 트로피카나주스는 여전히 신선하며 중고 양복으로 가득찬 천막과 자전거 3대와 수리공 3명이 간신이 들어갈 크기의 자전거 수리점과 혼다 오토바이의 어떤 문제라도 고칠 수 있는 기술자와 한무리의 나이먹은 여인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미국인들(그렇게 한번정도 괜찮은 환율로 환전을 할 수 있다)에게 “chang-a money(change a money)”를 외치며 긴 담배대를 물고 있으며 나이 먹은 남자들은 바닥에 나무막대를 던져 그 나오는 모양에 돈을 걸고(윷놀이) 웃옷 하나만 걸친 아이들이 조그만 가게 안팍으로 들락 거리며 아름다운 비단이 문 앞에 쌓여 있으며 골목 한복판에 다리를 못쓰는 이가 스케이트용 바퀴가 달린 나무판 위에 가죽띠를 묶은채 앉아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구걸을 하면 상점인이 그를 쫓아 내고 있으며 시끄러운 소음 위로 적당한 장소에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을 만날 준비를 하는 장사치의 흥정소리가 들린다. 과거에 왁자한 소리가 사라지는 시간은 자정통금시간(공산주의자를 잡기 위한 것이지만 흥정이 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직전이었다. 상인들은 가로 3ft 세로 6ft (한평 남짓)의 온돌방으로 들어가 5시간 정도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양동이 물로 얼굴을 씻고 그 물을 골목에 뿌려 먼지를 가라 앉힌다. 이 거대한 시장은 사업가가 된 농민들이 모이는 곳(출신 지역끼리 모인다)이고 Harvard Business School 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의 인큐베이터이며 지금 LA와 New York에서 성공한 이민자 사업가들의 상당수의 전후 출발점이었다.
결국 자본주의는 기독교 윤리나 유교적 덕행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시장에서의 교환 체계이다. 백정이 패랭이를 벗고 좋은 고기를 좋은 가격에 내놓으면 양반이 이것을 살것이고 만일 현대차가 저렴한 가격에 훌륭하게 움직이는 차를 내놓으면 미국인들은 토요타를 버릭고 현대차를 살 것이다. 상거래는 도덕이 아니다. 손해 보는 거래를 한 아이은 명치끝이 아파올 것이다. 그저 도덕이 없는 교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난한 여인이 동두천의 무심한 어둠 속에서 흑인 병사를 만나면 그것이 자본주의다. 이 여인이 그 병사와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7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커다란 도심의 병원에서 7명의 간호사들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은 것이고 근면한 것이고 바른 행실이 되는 것이고 아마도 유교적 덕행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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