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은 옥새상서와 대법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국왕의 최측근 총신이었던 것. 더구나 베이컨의 이모부 윌리엄 세실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573년 12살 때 형 앤소니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베이컨은 3년 간 공부한 뒤 그레이인 법학원에 입학했다. 케임브리지 시절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를 만나게 되는 데, 당시 여왕은 베이컨의 남다른 지적 능력에 감탄하며 청소년 베이컨을 ‘젊은 옥새상서’라 일컬었다. 법학원 공부 도중 베이컨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를 보좌하면서 프랑스 각지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했다. 157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귀국해서 법학원에 복귀한 베이컨은 1582년 법정변호사 자격 취득, 1586년 법학원 대표위원, 1588년 법학원 교수, 1600년 법학원 정교수가 됐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상속 재산 가운데 베이컨 몫은 적었다. 낭비벽이 심한 베이컨은 이때부터 많은 돈을 빌리기 시작해 늘 부채에 시달리게 되었다. 베이컨은 출세욕이 남달랐다. 1581년 20살 나이에 콘월 주 의원직을 승계하고 의욕적으로 의회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베이컨의 경쟁자로 떠오른 인물은 공교롭게도 이종사촌 동생 로버트 세실, 즉 이모부 윌리엄 세실의 아들이었다. 궁정 고위 관리로 출세하려면 권력자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이모부는 자기 아들을 챙기느라 베이컨의 후견인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던 2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브로와 돈독한 친분을 쌓았지만 이번에도 이모부가 걸림돌이었다. 베이컨은 법무장관이 되고 싶어 했지만 1593년 이모부가 후원하는 에드워드 코크에게 밀렸고 법무차관 지명에도 실패했다. 에식스 백작은 베이컨을 위로하기 위해 트위커넘에 있는 자신의 부동산을 베이컨에게 선물했고, 베이컨은 이를 팔아 1,800 파운드(현재 가치로 대략 24만 파운드)의 돈을 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