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銘旌)/ 염창권
가는 길,
어둡고 또 질어져서 안 보이는데
성글게 핀 애련(哀戀) 끝에 머물다가 떠돌다가
그믐 빛,
깃대에 묶여 사무치게 펄럭이느니
내생(來生)을 붉게 봉인하는
이 두툼한 잠옷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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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낡은 악기/ 백수인
오늘 밤도 나의 낡은 악기는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가는 눈을 뜨고서 햇빛을 연주하고 있다
내가 깊고 곤하게 잠들어 있는 동안
나의 낡은 악기는
오동꽃처럼 빛나는 영혼의 울림으로
머언 먼 미래의 음률을 노래한다
너는 이 음악을 들으며
오늘밤도
잘 자거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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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 김종
물 들어오고
호수 하나 고였다
그 호수
젖지는 않아도
하루에 한 번씩은
옷을 벗었고
반드시
빠졌다 돌아오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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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의자/ 전원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나무 의자 하나 문밖에 앉아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엄마처럼
해 어스름 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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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서춘기
벽에
못을 박으면
벽에
금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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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백애송
꿈을 훔쳐 달아나는 사람을 보았다
제 것이 아닌 것을 베어물고
뒷모습으로 걸어 간다
대가 없는 배려는
선한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암호로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가
반향이 되어 되돌아왔다
이젠 안부를 물을 수 없는 관계
전화기 너머 그냥, 이라는 단어가 어색한 관계
귀를 닫고 입을 닫는다
훔쳐 간 꿈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었을 텐데
희망을 잃은 자는
당신을 만나기 이전으로 기억을 리셋한다
물 흐르는 대로 지나간 시간이 쌓이면
다시 꿈꿀 수 있을까
가끔 묻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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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과 6월 사이- 장미원에서/ 김정희
칼날 같은 햇살은
꽃을 위한 고통
햇살에 베인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즙
다 전하지 못한 질감
하염없이 자국을 남기는
꽃과 꽃잎의 색(色)
입을 벌린 그리움
뭉개진 살점을 삼키지 못해
뱉어낸 붉은 혀
문득 멈추면
잎과 줄기 사이에서
찰랑 찰랑 넘치는
꽃들의 말 혹은
환한 소리의 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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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게/ 강경호
흙이 1,300도 불을 만나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 자기(瓷器)가 되고
나무가 흙 속에 묻혀
오랜 시간 불과 압(壓)에 견디면
견고한 금강석(金剛石)이 된다
이렇듯 불을 만나는 일은
사랑하는 일인지라
나는 사막을 건너는 강물이 되어
용암처럼 넘치는 그대를 만나
피시식
피시식
식을지라도
마침내 자기가 되고
금강석이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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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시 제69호/ 원탁시회/ 2024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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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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