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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계속 읽고 있는데, 로마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가를 새삼 느끼게 해줍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위대한 로마의 정치 문화 예술 종교 부분에서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 문화입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식민지로 종속되어서 그리스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도시 아덴, 아테네는 BC 5세기 이후부터 매우 중요한 도시로 등장합니다. 이 도시에서 헬라 철학자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여 철학, 문학, 교육, 예술이 크게 발달되었습니다.
요즈음은 공부하려고 하면 세계에서 미국으로 몰려오지만 그 당시에는 공부하려면 다 아테네로 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라고 하면 예루살렘이요, 정치라 하면 로마요, 철학은 아테네를 칩니다.
이렇게 유명한 아테네에, 서양문명의 요람이요, 헬라 문명의 중심인 아테네에 바울이 복음을 들고 왔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처음 느낀 감정이 무엇인가요? 16절: “마음에 분하여” 파록시노마이(paroxynomai):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강한 분노, 화를 말합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와보니 도시 전체가 우상으로 가득찬 것을 바라보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것이 아테네에 대한 그의 첫 감정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아테네의 시가지가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웅장한 신전이 장엄하게 건축되어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에서 제일 좋은 학교도 있었고, 예술과 문화가 최고로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이런 도시에 무려 3만의 우상이 사방팔방으로 세워지고 숭배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화려한 도시 가운데 아덴 사람의 도덕적 회의와 영적으로 죽은 모습에 안타까움으로 분노를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과 웅장한 시가지를 내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바울은 외적으로 보여 지는 도시의 아름다움과 웅장한 모습에 즐거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많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영적인 황폐함을 바라보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바울은 회당과 장터에서 아테네 시민들과 변론(reason)을 하였습니다(17절). 18절을 보니 아덴에 사는 에피큐리오스와 스토익 철학자들과도 변론을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몸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니 아덴 사람들은 이방신을 전하구나 했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말장이로 몰아 부쳤습니다. 비판하면서 아예 말을 듣고자 하지 아니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다.(19절)
아레오바고는 “화성(Mars)의 신을 섬기는 언덕”이라는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Mars Hill) 신전이 있고, 넓은 광장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재판도하고, 시장의 역할도 하는 공동집회 장소였습니다. 이 유명한 아레오바고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이때의 설교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요약해서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이 설교할 때에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이 첫마디에는 인간의 역설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도시에 또한 우상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3만 정도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가운데, 어느 우상은 ‘이름 모를 우상’이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이성을 중요시하는 지식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에 앞장 서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믿는 종교는 별개라는 사실입니다. 십 수년 전에 한국에서 사이비 종파에 속한 교회에서 자기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터지자 그 교회에 속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명단이 신문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명단에는 전 국무총리도 있고, 장군들로 여러 명, 대학교수들,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와 지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윤리와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고도의 방법으로 죄를 짓습니다. 교육 수준을 높아지면 사람이 저절로 변화되리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에서 신이 제일 많은 나라는 일본입니다. 집집마다, 마을마다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기술 분야는 세계 첨단을 걸으면서 우상을 여전히 섬기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통신위성을 미국 NASA에 가져와서 발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한국의 우주공학 분야에서 최고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만들어 놓고 발사하기 직전에 무엇을 했는지 아세요? 돼지 머리를 앞에 놓고 절을 하더군요. 이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그렇게 영광으로(proud 하게) 생각하는 지성이 무엇인가요? 아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지성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능합니다.
그 당시 아테네에서는 에피큐르트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있었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육적인 쾌락입니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매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자연의 이치를 알려는 이성을 강조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삶에 회의가 들고, 다가올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극단적으로 즐기자는 것이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들을 상대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죽으면 그만 이라는 사람들에게 부활과 영생의 도리를 전합니다. 운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아덴 전도를 두고서 실패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지역에서처럼 많은 사람이 회심한다든지, 세례를 받았다든지,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덴에서 고린도에 가서는 “이제 내가 복음만을 전하겠노라”라는 식으로 아덴의 전도에 대한 실패의 뉴앙스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덴의 전도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복음 전도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의 복음의 증거에 대하여 아덴 사람들은 정확하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 무슨 말입니까? 첫 번째 유형은, 조롱 혹은 야유하면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둘째 유형은 오늘 우리 식 표현으로 하면 <결신 보류>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고, 좀 더 연구해 보고, 좀 더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수 십 년부터 전도했더니 반응이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고’ 였습니다. 최근에 다시 만나 전도해보면 지금도 ‘생각해 보고’ 입니다. 그런데 아덴의 희망은, 세 번째 유형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에게서 시작됩니다. 34절에 보면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입니다
이 몇 사람 - 그들이 바로 아덴의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아덴이 변화되기 위해서, 반드시 수천의 사람들이 한 순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면 됩니다.
한 나라의 변화, 한 도시의 변화, 한 일터의 변화는 언제나 몇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 몇 사람이 확실히 변하고, 그 몇 사람이 확실히 복음의 희망을 붙들고 살면, 마침내 거대한 도시의 변혁, 민족의 변혁이 일어납니다.
성경 해석자들 중에는, 바울이 아덴에서 몇 사람밖에 구원하지 못했다고 해서, 아덴 선교를 실패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유월절 명절 기간에,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 몇 사람을 위해서도 자신의 생명을 한 알의 밀알로 기꺼이 내어놓으시겠다는 선언이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그리스를 보십시오. 지금의 그리스는 그리스 정교회를 사실상 국교로 하는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오늘 날 그리스는 국민 98%가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대답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물론 그들이 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할 때에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보십시오. 전도의 몇 가지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1) 바울은 스스로 억제하며 그의 감정을 조절했습니다.
아덴에 가득한 우상들로 인하여 격분한 마음을 가졌지만 종교심이 많은 것으로, 표현해서 접근합니다. 우리도 타종교에 대하여 정죄하듯 꾸짖는 듯한 접근이나 정죄는 반감을 일으키고 거부감을 만듭니다. 그러기에 전도할 때에 개인의 감정을 내세우기 보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 바울은 아덴의 문화를 이해하고 접근합니다.
아레바고에서 전도할 때에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에 맞게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할 때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설교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덴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익숙한 철학자의 싯구를 인용해서 회중을 설득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뉴질랜드에 와 있는 통아인에게 전도하려고 한다면 통아의 풍습과 문화를 이해하고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접촉점을 찾았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았을 때에 새로운 종교를 포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격분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들의 제단을 오히려 그의 선교의 출발점으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격렬한 공격이나 거친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그들의 종교심을 비웃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묵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을 종교적이라고 말하면서(17:22) 헬라철학과 기독교 사이의 접촉점을 찾아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감정을 조절하고, 문화를 이해하고, 접촉점을 찾아서 성경의 하나님,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하나 하나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그가 어떤 하나님을 전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24절에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라고 했습니다. 에피큐르트학파는 무신론자입니다. 스토아학파는 모든 물질 속에는 신이 있다는 범신론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있지만, 헛된 신이요 우상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했던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과 피조물을 주장하시는 분 (Sustainer)이시다(25절).
25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 하나님께서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야만 살수 있고, 힘을 주셔야만 기동하며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제가 해밀턴에 살 때에 참 신실한 젊은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레스토랑을 하면서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일을 다 마시고 저녁에 배가 출출해서 라면을 끓여 먹는데, 라면 면발이 목에 걸려서 질식하여 죽었습니다. 참 젊고 건강한, 귀감이 되는 분이었습니다. 부인은 태중에 7-8개월된 아이를 품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 강한 것 같지만 참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던 일을 그대로 중단하고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육신의 쾌락을 즐기는 삶이 아니라 현실에 충실하면서 미래에 주님 만나는 그 시간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야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통치자(Ruler) 이시다(26-28절).
26절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누구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오, 통치자가 되십니다.
지금, 한국은 사드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의 뜻을 거스리지 않아야 하고,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여기에서 한국이 누구를 더 의지해야 할 것인가? 미국인가? 중국인가? 누가 우리 국가에 더욱 유익을 주겠는가? 저울질을 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구한말에 대한제국이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를 놓고 누구를 의지 할 것인가? 어느 나라를 택해야 우리에게 유익이 있겠는가? 하면서 고민했던 분위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약소국의 비애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생사화복도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오직 그 분의 뜻을 헤아려 그분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가 가운데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빨리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29-3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온갖 철학과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전하시렵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눈높이를 맞추어 이해하고, 헤아려 주면서, 내가 만난 예수님을 은근설쩍 말하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참 좋더라’고…. 그 다음은 한 번 같이 교회에 가보자고 …. 열매가 없다고 실망하지 마시고 기도하면서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되면 전도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품고 사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