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사랑과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찿아 떠나는 아주 특별한 여행
러시아 연해주(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하바롭스크)를 다녀오다
생활에 쫓기어 살아온 세대들에게는 환갑이 넘으면 대부분이 생활고 전선에서 비껴나게 된다
나라와 개인의 생활이 어려웠던 60,70대 들에게는 여유가 없이 앞만 보며 살아온 세대들이다
지친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한 노인들이지만 여가 활용에 익숙치 못하여
노년을 살아가는 새로운 활력을 얻는 재 충전 방법을 잘 모르고 있다.
나를 찿고 흥미와 건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달 29일부터 영주의 6,70대 8명이 강원도 양양을 출발
극동의 유럽이란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해의 기상, 안중근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우스리스크로 이동 시베리아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파리란 하바롭스크를 돌아오는 4일간의 일정이다.
첫날 18시20분 양양 국제공항에서 러시아의 야쿠티야 항공 비행기를 타고
북한 상공을 가로 질러 블라디보스톡을 1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100석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비행기라 좀 불안 하기도 하였으나
공항에 내리고 보니 평생 못 와 볼 것 같던 땅이라
러시아어로 쓰여진 국제공항이란 네온싸인이 없다면 이국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톡"시는 인구60만,면적 600㎢,1860년 군사기지로 개발 태평양 극동함대사령부가 있는곳으로
극동지방의 교육 문화 경제중심지로 1시간(여름 2시간)의 시차가 있다.
첫 식사는 고려인이 운영하는 한글 간판이 붙은 한식퓨전 “한국식당”에서 두부찌게로 저녁을 해결했다
숙소는 블라디보스톡 항 옆 400여객실의 비교적 크고 오래된 호텔이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했다.
객실에는 우리나라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금성마크가 붙은 브라운관 TV가 자리 잡고 있어 가슴이 뭉클 했다.
다음날 첫 여정은 블라디보스톡시내 기차역이다.
시내를 오고 가는 롱코트와 러시아의 전형적인 털모자를 쓴 사람들이 나를 이방인으로 느끼게 한다.
역 건너 공원엔 “레닌”의 차가운 동상이 “동쪽을 정복하라” 손짖하며 우뚝 서 있다.
시내버스의 상당수가 현대,기아마크가 선명하고 도색없이 서울의 광고판을 그대로 달고 다니는 것이 이채롭다.
기차역 선로옆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모스크바까지 9,288Km(현재는 모스크바역에서 10km연장,9,298km) 시발점이란 표시판이 서있다.
역사와 연결된 여객 터미널은 거대한 군함과 여객선 일반 배들이 함께 정박되 있다.
“러시아 극동함대사령부”인 이곳 항구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민간인 출입이 무척 까다로 왔다고 한다.
위성통신등의 발달로 군사적인 전력 운영도 형식이 바뀌었단다.
왼쪽으로는 “극동함대사령부” 오른쪽은 “젊은이들의 거리와
백화점”등이 있는 중앙광장은 높이 솟은 혁명 탑이 1917년 모스크바에서 시작한 볼세비키 혁명이
1922년 동쪽 블라디보스톡에서 끝 맺었다고 새겨져 있다.
2차대전시 독일 전함 14척을 침몰시킨 잠수함 박물관 내부에는
전승 자료로 빼곡하고 함장 흉상은 관람객들이 손떼로 반짝거린다.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은 잠수함 옆 벽면에 뻬곡히 적힌
전몰 용사들을 추모하고 “전쟁을 잊지 말자”며 활활 타 오른다.
“독수리전망대”에 오르니, 처음 성경을 번역전파 하기위해 러시아어를
서방에서 가져온 신부 형제의 동상이 “금각만”을 내려다 보고 있다.
영어 알파벳을 가져오다 넘어져 알파벳 순서가 러시아어에서 바뀌었다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으며
러시아인들에게는 세종대왕과 같이 존경을 받는단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수교는 옐친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시 만들었다고 하며
거대한 교각은 꽁꽁언 항구도 녹일 것 같은 위엄이 있다.
옛날에는 이항구가 완전히 얼어 붙어 한반도와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니
나라잃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난의 행군 끝에 도착한 동토의 땅이 이곳 연해주였으니
얼마나 고생과 설움이 컷을까 마음이 착잡하다.
오후에는 힘들고 외롭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온
우리민족 고려인들의 삶의 흔적을 찿아 버스는 북으로 달린다.
차창 밖 블라디보스톡 외항에는 대형 화물선들이 보이고 끝없이 동해가 펼쳐진다.
자작나무 숲은 끝이 없다 1시간 반만에 “우스리스크”에 도착했다.
먼저 상해 임시정부시절 자금을 담당하고 재무총장으로 일하셨다는 “최재형”선생 생가를 찿았다.
선생은 1895년 함흥에서 출생 일제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 청년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후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제에 항거하는 톡립투사들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 하였단다.
안중근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또오히로부미”를 저격하기전
선생으로부터 권총을 지급받아 생가 옆에서 실탄사격 점검도 하고 안의사 투옥후
그 가족도 집에서 보호 지원해 주었단다.
생가는 현재 러시안인이 거주하고 있으나
우리 영사관이 매입 동포들의 협조를 받아 곧 재 단장해서 기념관으로 개장할 예정이란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일제에 처형당한 설움을 이제야 떨치고 편히 잠드실 수 있을 것 같다.
“수이푼강” 언저리에 있는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열사와 함께 파견되었던
이상설선생의 발자취를 찿았다.
1914년대 이동녕선생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을 창설하여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병을 얻어 투병하던 중 1917년 3월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광복을 못 이루고 떠나니 화장하여 강물에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하셨단다.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문화재단이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를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세웠다니 다행이다.
가까운 둔덕은 옛 발해의 최북단 성터란다.
흔적도 없는 빈 성터이지만 둔덕 아래흐르는 강과 뒤로 펼쳐진 초원은 군사적인 요충지 임은 분명하다.
연해주는 고조선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우리민족의 역사의 땅이며
1930년에서 7년간 스탈린의 명령하에 20만명의 고려인들을 가축을 싣는 열차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키면서 부녀자 어린이등 2만에서 7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역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우스리스크 고려문화센타” 에는 이러한 우리민족의 한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910년 항일의 구심점이 된 “신한촌”을 중심으로 안중근의사가 소속된 “동의회”
회원들이 혈서 “대한독립” 네 글자가 뚜렸이 남아 있다.
일제는 1920년 4월4일과 5일 독립운동의 불길을 잠재우고자 러시아의 묵인하에
연해주 한인 거주지를 습격 수많은 인명을 무차별 살상 하였단다.
이곳 “신한촌”에서도 300여명이 무차별 살육당하고 마을이 파괴 되었단다.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선생도 이때 총살 당했다고 한다.
시청각 자료와 문서는 우리 독립투쟁의 아픈 역사를 이곳에서 본다는 것이 우리조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선인들의 고통과 아품의 우스리스크를 뒤로하고
시베리아 대륙 횡단열차를 타고 765Km를 12시간 달려 시베리아의 파리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광퀘 기차는 30량 이상으로 편성되어 있어 우리가 타는 객실은 28번째로
승강장 길이가 짧아 높은 객차는 혼자 오르기가 무척 힘들다.
역 구내 개찰구에서도 여권과 표를 검사하더니
승차 전 각 출구 아래서 여권과 기차표를 일일이 확인해야 하니 탑승 시간이 무척 더디다.
통로 양쪽으로 2층 침대 3개 총 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침구의 시트는 새탁된 것으로 기차표 확인후 나누어 준다.
내릴 때는 반납 하여야 한다 저녁 9시에 승차하여 바깥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창 밖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자작나무 숲이 "닥터지바고" 영화의 설원 속을 달리는 열차 기분을 나게 했다.
함꼐한 아랫칸의 러시아 아주머니는 우람한 체구에 말이 없다.
승무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답답해 하자 눈치로 옆에서 도와준다.
"하바롭스크"시는 인구63만에 17세기 러시아 탐험가의 이름을 따서 지음 기계 경공업 정유 목재등이
발달 되어 있고 과학연구소와 대학이 많고 러시아에서도 경제적인 부유시다.
“하바롭스크” 기차역은 좀 쌀쌀하게 느껴졌다.
블라디보스콕 보다는 북쪽으로 3,4도의 온도차이가 난다고 했다.
“아무르강(에로스란뜻)”은 몽골(하라무렌강)에서 발원 대륙을 가로질러 중국(흑룡강)을 휘돌아 연해주를 거처
동해로 빠지는 길이 4,440Km의 세계 8위의 강이다.
강변공원에서 바라보는 아무르강의 경치는 안동의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 물도리보다 수십배 장대하고 아름답다.
천국의 계단을 강물에 떨구고 서있는 러시아 정교회는 성스러운 자태와 화려한 건축미가 압권이다.
내부의 정교함과 미적인 예술성, 그리스 정교의 아침예배의 신성함과
천상의 소리같은 성가가 종교에 무지한 나 자신도 감동의 느낌을 준다.
레닌광장 다나모광장 공원 등 러시아인들의 일상은 차분하면서도 활기 차다.
재래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쩍이고 추운지방이라 그런지 가죽과 털로 된 의상 가죽제품들이 많다.
골목시장과 실내시장이 공존하며 정겹고 깔끔하다.
물건도 싸고 품질도 괜찮아 보였다.
재래시장의 맛은 흥정인데 할인도 많이 되고 우리 전통시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숙소는 고려인이 운영하는 아리랑 호텔이라 종업원들이 러시안이라 그렇지 타국이란 생각이 안 들었다.
함께한 30여명의 여행자도 보드카 한잔과 재래시장에서 산 훈제연어 안주에 모두 친구가 되었다.
마지막 날 여인네들의 요청으로 백화점을 방문했다.
우리네 점과 다르지 않지만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
세일 딱지가 붙어있는것을 보니 여기도 불항인가 보다.
아무르 강변 극동미술관과 향토박물관은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고 인상적이다.
관리인들은 모두 노인들로 사진 촬영금지 등 따라다니며 감시한다.
비행기 시간에 쫓겨 전쟁기념관등을 보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다.
처음 방문한 러시아는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국가의 기상이 곳곳에 서려있고
사회주의체제 속에 오랜 기간 물들어있어 바쁨이 없지만 무한한 자원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러시아를 떠나기 전 하바롭스크에서의 첫눈은 내 인생 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기쁨을 여행에서 맛보게 했다.
5시간의 지연 이룩은 여 세관원의 아름다운 미소가 지워준다.
북한상공을 통과 할 때는 어둠만이 눈에 들어와 착잡하나, 고성항의 밝은 가로등이 가슴을 흔든다.
2시간 반 만에 날아온 하늘 길이지만 타국의 경이로움과 선조들의 독립운동 가슴 뭉클함
모두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내 건강이 허락 할 때까지 나를 찾기 위한 또 다른 여행을 계획 한다.
유순조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