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새로운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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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산정동성당에 있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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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본당 성체거동. |
목포항은 조선 세종 때 진(鎭)으로 출발한 군사 기지로 아주 적은 수의 어민들만 살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개항지가 됐지만, 이 땅을 삼킨 일제는 본격적인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항구로 변모시켰다. 목포는 유달산을 중심으로 산 아랫자락의 좁은 평지 몇 군데를 빼놓고는 가파른 바위 언덕이 대부분이다.
오늘날까지 주거지를 넓히는 방법은 인접 지역을 편입하거나 바다를 메우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를 메워 만든 평탄한 매립지는 모두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말았다.
이 땅의 주인이었는데도 그런 좋은 부지를 차지할 수 없던 조선인들은 유달산의 좁은 골짜기나 울퉁불퉁한 바위에 기대어 움막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거주지를 확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마저도 기댈 수 없던 이들은 공동묘지의 유골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목포는 인근의 무안, 영암 등지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이들이 섞여 살았다.
삼백(쌀, 면화, 소금)의 도시답게 면화공장과 정미소가 많았으며, 가까이는 압해도부터 멀리는 제주도까지 서남해 도서 지역의 중심지여서 다양한 일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날품팔이꾼뿐 아니라, 술집 접대부나 유곽의 창녀로 전락해 모진 목숨을 부지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리 바위에 달라붙은 이끼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텼지만, 소수의 성공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늘 고달프게 살았다.
일제가 36년 동안 한반도의 모든 고혈(膏血)을 빨아냈기 때문에 광복이 됐어도 경제 사정은 쉽게 나아질 수 없었다.
설상가상 6ㆍ25전쟁으로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무리 우리가 근검한 민족이라고 해도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회생할 수 없을 만큼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는 미국가톨릭구제회의 도움을 받아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밀가루, 옥수수 가루, 깨끗이 손질한 헌 옷들을 나누어줬다.
지난날 이 구호물자를 얻으려고 성당으로 몰려온 이들을 멸시하고, 천주교회가 구호물자로 신자들을 사고 있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36.40ㄴ).
아직도 “가난은 임금도 구제할 수 없는 일” 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과 가톨릭 교회는 지난날 어쩔 수 없이 얻어먹었지만, 늘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를 가난하게 하고 아프게 만든 불행을 떨치고 일어섰으며, 이제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나라와 교회를 지원하고 있지 않은가?
지역 사회의 빛이 된 목포본당
현 하롤드 신부와 동료 선교사들은 전쟁의 참화로 신음하는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을 사랑과 희생으로 치유했다. 늘 굶주림과 헐벗음에서 벗어날 수 없던 이들에게 식량과 옷가지만 전해 준 것은 아니었다.
몸의 양식뿐 아니라 마음의 양식도 결코 굶겨서는 안 될 소중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목포본당은 교우들이 계속 늘어나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아 모든 것이 어려웠던 1951년에 경동본당을 분당하고, 외국 교회와 미군의 도움과 목포 교우들의 노력 봉사로 성당도 지었다.
1955년에는 성 골롬반 병원을 개원해 목포뿐 아니라 전라남도 지역민, 특히 가난한 이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또한 가난 때문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때 도움을 받았던 많은 학생이 착하고 훌륭한 인재로 성장해 이 나라와 민족에게 그때의 빚을 갚았다.
레지오 마리애, 사랑의 꽃을 피우다
현 신부가 이 땅에서 이룩한 업적 가운데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고 꽃을 피운 것은 결코 작은 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신심 단체는 1921년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파트리치오 성당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담당 사제인 토휘 신부, 공무원이었던 청년 프랭크 더프(Frank Duff)와 20대 여성 15명이 ‘자비의 모후’라는 이름으로 첫 모임을 개최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정기 회합을 하고 2명씩 짝을 지어 병원을 방문해 환자들을 위로했는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아일랜드뿐 아니라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창단한 지 얼마 안 돼 세계적인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성장한 레지오 마리애는 이 땅에도 씨앗이 뿌려져 아일랜드에서 비롯된 지 32년째 되는 1953년 5월 31일 목포 산정동본당과 경동본당에서 첫 열매를 맺었다.
지목구장 현 신부와 산정동본당 주임 안(T. Moran) 신부가 산정동본당의 ‘치명자의 모후’,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들과 함께,
그리고 경동 본당에서는 ‘죄인의 의탁’라는 이름의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와 함께 이 기도의 시작과 끝에 있는 다음과 같은 힘 있고 희망찬 노래로 첫 까떼나(Catena Regionis : 레지오 단원들이 회합을 하는 중에,
그리고 매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기도문. ‘사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기도는 회합할 때 회의록에 서명하는 것과 폐회 시간 중간 정도에 전 단원들이 일어서서 바침)를 바친 것이다.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당시 현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가 지향하는 “선교사의 도구”(교본 제4장 7 참조) 정신과 조직 원리를 따를 때 이 땅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전개되고, 성모 마리아의 모성적 감화가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또한 6·25전쟁의 참화로 많은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이 나라 백성이 성모 신심과 덕행을 바탕으로 불행을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를 발족시키고 적극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김금룡은 이렇게 시작된 첫 쁘레시디움 가운데 하나인 ‘치명자의 모후’의 창단 단원이었다(그가 쁘레시디움 단장이 된 시기는 기록이나 증언마다 일정치 않아서 확정할 수 없다).
목포에서 시작된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54년 2월 15일에 청주, 1955년에는 원주ㆍ전주ㆍ서울ㆍ춘천ㆍ제주 등지로 확장되었다.
6·25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은 상황에서 환자 방문과 상가 돌봄은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
연령회가 없는 본당에서는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연령회가 있더라도 꼭 필요한 일들을 찾아 자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선교와 냉담자 회두에도 큰 성과를 거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