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용의 어머니는 진씨(秦氏)였다. 이극용은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작아서 그 때문에 주변에서 그를 ‘독안룡(獨眼龍)’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른 설에는 그가 애꾸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날쌔고 용맹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15살의 나이에 전쟁에 참가했고, 당나라에서는 그를 사타 부병마사(副兵馬使)로 임명하였다. 기근 문제로 산서성 북부를 관장하던 무장을 살해하고 주민에게 나누어주고 달아났으나,881년 당나라는 이극용 부자의 죄를 용서해주고 대신 황소의 토벌을 맡겼다.
황소를 장안에서 격파하고 물러나게 하였으며 하동절도사를 맏았는데 884년 이극용은 다시 하동을 남하하여 황소군을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황소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같은 시대 주전충과 격렬한 싸움을 벌었고 901년 주전충이 하중(河中)을 손아귀에 넣자 이극용은 중앙으로 진출이 어려워져서 태원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907년, 당나라는 哀宗 시기 황소의 난을 평정했던 절도사 주전충(852-912)에 의해 선양극이 벌어져 後梁이 건국되었으나 초기 당왕조를 옹위했던 이극용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해 1월에 주전충 타도를 아들 이존욱(장종)에게 부탁하고 病死했다.
후고구려 <궁예> 弓裔 (활동 891-915)
신라 제47대 헌안왕과 무명의 후궁 사이의 소생이라는 설과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 등이 있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왕이 그를 죽이도록 명하였는데, 유비(乳婢: 젖먹이 비녀)가 그를 성안에서 탈출하며 아래로 떨어지는 궁예를 받다가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하며 이후 그를 몰래 길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궁예가 왕위 다툼에 희생되었던 왕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10여세인 891년 절인 세달사를 떠나 죽주(竹州)의 반신라적인 호족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892년에는 북원(北原)의 호족 양길(梁吉)의 부하로 활약하였다. 894년 10월 명주(溟州)에 입성하여 3,5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궁예는 사졸들의 신망을 얻어 곧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하고 부대 편제를 정비하였으며, 지휘권을 확립하는 등 명주에서 자립하는데 성공하였다.
895년 8월 태백산맥을 넘어 한산주(漢山州) 관내 10군현을 차지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896년에는 송악(松嶽)의 유력한 호족 왕건 가문이 귀부하였고 패서 지역 호족들의 세력을 모으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패강진 호족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896년 철원에 도읍하였던 궁예는 898년 7월에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899년 7월에 북원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이루었던 양길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이를 계기로 900년 10월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통일신라의 9주 중 고구려,발해의 옛 땅에 설치되었던 명주·삭주·한주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901년에는 고려(高麗)를 건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광평성을 설치하고, 병부(兵部)를 비롯하여 여러 관부를 두었는데 당시 궁예는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903년 철원의 산수를 살폈고, 904년 7월 청주(淸州) 1천호(戶)를 철원으로 옮기고 905년 7월 궁예는 철원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왕건 가문의 본거지였던 송악을 떠나 호족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904년 장군 홍기(弘奇)가 투항,공주는 이후 후백제와 후삼국 쟁패의 요지가 되었다. 905년 8월에 죽령의 동북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906년 상주 사화진(沙火鎭)을 차지하여 신라를 위협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909년 왕건을 나주에 파견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이후에도 나주 일대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였다. 914년 연호를 정개(政開)로 바꾸고 915년에는 부인 강씨(康氏)가 비법(非法)을 많이 행한다고 간쟁하였다. 정권 말엽에는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언하는 도참도 나타났다.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백발노인에게서 산 옛 거울에 그러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918년 6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 4인의 마군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후당의 궁궐 전각중 中興殿이 있는바 이곳에서 사신및 정사를 보았다. 고려초 고려궁궐에 中興殿이란 전각명이 보인다 어떤 연유가 있을까?
심제 글.
출처-1.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주)신원문화사.
2.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발해국기 -(청)황유한
첫댓글 아주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궁예(弓裔)를 궁예(弓乂)로도 한번 찾아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보입니다
발해국기에 궁예가 등장하는데 발해와 접한 아슬라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발해에서는 땅을 빼았긴것으로 표현되는군요. 아슬라주가 어디 인가가 키 입니다.
'아슬라'가 '하슬라'라면 신라의 북변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