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갇히다 / 장유순(2022. 9. 충남)
내가 근무하는 요양병동에 계신 어르신들은 치매 초기를 지난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분들은 가족들이 힘닿는 데까지 돌보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입원하는 것이다. 치매 환자를 가정에서 돌본다는 것은 온 가족이 그 한사람에게 매달려야 되니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입원하면 어르신들은 낯설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가 간혹 정신이 돌아오면 집에 가겠다며 신발을 찾곤 한다. 간간이 찾아오는 기억의 고리로 환자가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쓰면, 치료진은 어쩔 수없이 환자와 줄다리기를 한다. 먼저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해 잠깐이나마 기억의 고리를 끊을 온갖 구실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신없이 기억을 찾아 헤매다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밀고 당기는 사이에 어르신들은 천천히 병동 생활에 적응한다.
우리 병동에 입원한 후, 모녀 관계로 지내는 두 분이 있다. 연세가 많은 분이 치매가 덜 진행돼 젊은 분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니까 마치 엄마처럼 느껴지는지 어느 날부터 "엄마, 엄마." 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후로 두 분은 진짜 모녀지간처럼 딸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엄마는 딸이 하는 행동을 다 받아줬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진짜 모녀처럼 착각할 정도였다.
60대 후반인 딸은 80대 초반의 엄마보다 치매가 더 진행돼 엉뚱한 행동을 자주 했다. 잠을 자다가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 환자복을 변기에 넣고 밥을 짓는다고 우긴다. 그것은 밥하는 솥이 아니라 변기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우기며 애를 먹인다. 또 이른 새벽에 일어나 더 주무시라고 하면 애들 밥해 먹여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래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물어 보니 서른여덟 살이라고 했다. 서른여덟 살에 갇혀 있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해서 먹여 학교에 보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 어떤 날은 잘 주무시다가 간호사실 앞까지 나와 애들 학교에 가봐야 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며 헤매고 다닌다. 이 분은 시간이 30대 후반에 머물러 온통 어린 자식들 생각뿐이었다.
어느 특정한 시간에 갇힌 딸이 설 명절을 맞이하여 집으로 외박을 나갔다. 식구들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집을 나갔는데, 다행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찾았다. 귀원하기 전에 일단 다른 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를 했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이 환자는 장성한 자녀들을 두고 30대의 시간에 갇혀 어린 애들을 찾겠다며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두 모녀 중, 이번에는 엄마가 갑자기 치매 증상이 심해졌다. 평소 조용한 성향대로 잠이 많아지고 말은 더욱 줄었으며, 기력이 떨어져 자신의 몸만 간신히 추스르는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딸이 엄마를 챙기는 일이 많아졌다. 치매에 걸렸어도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잊히지 않는 것인지, 딸은 변해가는 엄마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는지 밤낮으로 엄마와 한 침대에서 같이 지냈다. 이 둘은 혈육으로 맺어진 모녀는 아닐지라도 진정한 모녀가 돼 행복한 시간 속에 갇혀 지냈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을 보면 어느 특정한 시간에 갇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할머니들은 평생 식구들 끼니 챙기는 일이 몸에 배어서인지, 새벽같이 일어나 가족들 밥을 해야 되는데 부엌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며 찾아 헤맨다. 할아버지들은 마누라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며 찾는다. 아내를 폭행하여 자식들이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집에 모시고 갈 수 없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를 찾아 집에 가겠다고 보따리를 싸서 헤매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이렇게 어르신들은 살아온 시간의 기억 한 자락을 붙잡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에게 다소 위안이 되는 일이 있다면, 그 기억의 고리가 길지 않다는 것이다. 잠깐 불행했던 과거에 갇혔다가도 곧 잊곤 한다. 집에 대한, 가족에 대한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도 그 순간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면 금방 잊어버린다.
살아보니 행복한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시간을 다 기억하면 남은 시간들조차 불행의 늪에 가둬야할지도 모른다. 치매 어르신들을 간호하며 때로는 잊는다는 것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첫댓글 장유순 선생님, 마음 한 구석이 아려 먼 산을 보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잘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들러서 요모조모 살펴보겠습니다~~
"때로는 잊는다는 것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등단으로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