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興 기생 소춘풍
고려 王朝에서 門下佐侍中(문하좌시중)을 지낸 배극렴 李朝에서도 左侍中(좌시중)을 지낸 兩朝(양조)의 정승 그 세도 하늘에 닿았다
成宗의 부름을 받은 소춘풍 궁중잔치의 꽃이라 늙은 재상들 취기를 빙자하여 어린 기녀를 집적이는데, 배극렴 정승 안하무인으로 왈, "소문에 너는 東家食 西家宿한다는데 오늘밤은 나와 합방함이… 허허허"
배-극렴 裵克廉 조선 초기의 무신(1325~1392). 자는 양가(量可). 호는 주금당(晝錦堂)ㆍ필암(筆菴). 고려 말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성산백(星山伯)의 작위를 받았다.
[고시조](여인) ‘당우를 어제 본 듯’ 등 3수(소춘풍)
唐虞를 어제 본 듯 漢唐宋을 오늘 본 듯
通古今 達事理하는 明哲士를 엇덧타고
저 설 데 역력히 모르는 武夫를 어이 쫓으리
당우:요순의 세계. 태평성대를 가리킴.
무부:무인
前言은 戱之耳라 내 말슴 허물 마오.
文武一體인줄 나도 잠깐 아옵거니
두어라 糾糾武夫를 아니 쫓고 어이리.
희지이: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규규무부: 용맹한 무인.
齊도 대국이요 楚도 亦 대국이라
조그만 滕國이 間於齊楚하엿드니
두어라 이 다 좋으니 事齊事楚하리라.
등국: 약소국
사제사초: 제나라도 섬기고 초나라도 섬김. 소춘풍(笑春風) : 성종 때의 기생
경제에도 능한 개국공신 배극렴 선생
선생의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인경(仁慶)의 후손으로 현보(賢輔)의 둘째 아들, 이천년(李千年)의 외손으로 1325년(충숙왕 12년), 성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양가(量可), 주금당(晝錦當) 또는 필암(筆菴)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晋州), 상주(尙州)의 목사, 계림(鷄林), 화령(和寧)의 부윤, 합포진첨사(合浦鎭僉使)등을 역임하고 1376년(우왕 2년), 부원수(副元帥),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양백연(梁伯淵), 우인열(禹仁烈) 등과 진주에 쳐 들어온 왜구를 반성현(班珹縣)에서 크게 무찌르고 1378년(우 왕 4년), 삼도원수(三道元帥)로 함양부(咸陽府)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또다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이 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여 왕으로부터 말안장, 의복 및 술을 하사받고 개성부사(開城府事),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 성계 밑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遼東)을 치는 도중, 이 성계, 조 민수(曺敏修)로 하여금 위화도(威化島) 회군을 결행하게 하여 고려의 구세력(친원파)을 추방하고, 이듬해 문하평리(門下評理),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를 역임, 한양 궁궐을 수리하였다. 1390년(공양왕 2년), 중군총제사,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92년(공양왕 4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시중 심 덕부(沈德符)와 함께 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파하고 안렴사(按廉使)를 두고, 절제사(節制使), 경력(經歷), 도사(都事)등을 파하고 장무록사(掌務錄事)를 두는 등 지방의 관제(官制)를 혁신하는 상소를 올려 이를 혁파(革罷)하고, 이어서 우시중(右侍中)이 되었다.민심이 고려 조정을 떠남을 보고 조 준(趙浚) 등과 모의하여 공양왕을 폐하고 이 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 뒤의 영의정)이 되었으며 그 해 1392년에 돌아가니 시호는 정절(貞節)이라고 내렸다.
경제에도 능하여 그가 살던 성주 인근에 나무를 심고 관개시설(灌漑施設)을 하여 백성의 복지를 도모한 까닭에 그의 공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내(川) 이름을 '배내(裵川:白川)', 마을 이름을 '배리(裵里)'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나주의 초동원(草洞院) 및 봉서원(鳳棲院)에 제향되었고 그 공훈은 태조의 건원릉비(健元陵碑)의 뒷면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사묘(祠廟)와 신도비(神道碑)는 성주읍 대황동 구동골에 있다.
배극렴(裵克廉)과 어래산(御來山)
충북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이 마을에 어래산(387m)이라는 경승 좋은 산이 있는데 이태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으로부터 남달리 총애를 받고 있던 배극렴은 왕의 시역(弑逆)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잃고 그 부인과 함께 충주 고을로 낙향하였는데 그가 어느곳에 은거하는 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배극렴은 어래산 동굴을 찾아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기로 작정하고 야인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좌우군 도총사였던 이성계(李成桂)가 왕실을 장악하게 되자, 그의 정권과 대외적인 명분상으로 고려 중신인 우현보, 이색, 정몽주, 배극렴등을 그의 자문직으로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고집한 우현보, 이색등은 하옥하고 정몽주는 격살하였다.
반면 배극렴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수소문끝에 충주 모 산중에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성계가 직접 세 번에 걸쳐 찾아 가서야 배극렴을 만나게 되었으며, 솔직한 집권계획 등을 밝히고 앞 으로 개국공신이 되도록 간청하여 다시 정사에 나서게 되었다. 그 후 이 고을 사람들은 이태조가 세 번씩이나 이곳을 찾아 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삼방리(三訪里)라 하고 그 산의 이름 또한 어래산이라 칭하였으며, 배극렴이 땔나무를 하던 골짜기를 배나무골, 그 부인이 베틀을 놓고 베를 짜던 굴을 베틀굴이라고 부른다.
또 이태조가 배극렴과 첫 번째 만나서 국사를 의논했던 산정(山頂)을 국사봉(國事峰)이라 부르고 있다.
제공자 또는 참고문헌 : 충주의 향토사 (1998) 충주문화원
[증평에 잠든 조선 초대 영의정 배극렴]
【증평=뉴시스】강신욱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신임 국무총리 후보에 문창극(65) 전 중앙일보 주필을 지명하면서 충북에서는 지역 출신 첫 국무총리 탄생에 기대감이 높다.
현재 국가의전 서열 5위인 국무총리는 조선시대 영의정에 곧잘 비견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은 정1품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중앙관직이었다.
임금 아래 권력 서열 2위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불리는 조선의 영의정은 170명 가까이에 이른다.
이 가운데 초대 영의정(문하좌시중)은 배극렴(裵克廉·1325~1392)이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극렴은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돕고 조선 건국에 앞장선 공로로 개국공신 1등(좌명개국공신)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 1000호와 식실봉(食實封) 300호, 전지 220결, 노비 30구 등을 받았다.
개국공신 1등으로 공신록에 가장 먼저 오른 배극렴은 조선을 개국한 1392년 11월 병으로 세상을 떴고 당시 청안현 근서면 두타산 남쪽 기슭에 예장(禮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배극렴이 세상을 뜨자 태조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고기나 생선이 들어있지 않은 반찬)을 했고 친히 빈소에 가서 조문했다.
배극렴은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이 장례를 주관했고 태조가 친히 빈소에 가서 조문했다.
1994년 12월30일 충북도 기념물 98호로 지정한 배극렴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 산 28에 있다.
묘는 직사각형으로 봉분 아래 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묘역에는 1888년 세운 신도비가 있다.
배극렴이 영면한 이곳은 조정에서 개국공신에게 하사한 지역이라는 것이 성산 배씨 종친회에서 보관하는 완문(完文·조선시대 부동산에 대해 해당 관아에서 발급한 증명서)에 보인다.
배극렴은 태조가 왕세자를 정하려 할 때 막내아들 이방석을 추천했고 태조가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배극렴은 이 일로 사후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폄훼를 당한다.
괴산군 불정면과 충주시 주덕읍에는 어래산(御來山)과 삼방리(三訪里) 마을이 있는데 태조가 배극렴을 세 번 찾아왔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