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가을 축제 "백일홍 축제장에서" (평창,,, 어디로 가시는가...1부)
후세백작 2018.09.26 11:18
2018 이번 추석 고향을 다녀왔다.
평창의 백일홍 축제가 완연한 봄을 맞이하듯 성시를 이루는 성공으로 잘 정착되어 고향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머금길래 그래도 반갑다. 남부 어디쯤 성묘를 다녀오는길에 축제의 장에 들어서니 한가한 로얄박스엔 군수님 이하 후배님들이 모여 담소중이라
그냥 만나도 반가운 체육회장님등 후베님들의 노고에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어느 후배에게 이제 백일홍 축제는 성공의 장으로 앞으로 융성한 문화의 꽃으로 영원키 위해서는 키 워드를 좀 더 두텁게 해야 하지 않냐고 이야기했더니 그러지 않아 여기에 양사언이나 강소사, 권두문 군수님등을 곁들일 것이란 후문이다.
일전 본인은 어느 글에서 백일홍 축제는 주 모터를 더욱 부각시킬 문제를 논 한적이 있다.
예를 들어 봉평의 메밀꽃 축제에 가산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의 배경무대로서의 이미지처럼 평창의 백일홍 축제를 지난 2년전 하리에서 발굴된 번쩍이는 고조선식 청동검을 찬 20대 여자의 수장(족장이라 함부러 단정할 수 없기에,,,)아래 단결한 2500여년 전의 이 고장 선인들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이 고장의 기상과 가을하늘 높은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며 살기좋은 고장임을 증명하는 청동검의 고조선 시대 이 지역의 제전의 면류관이 이어져 내려온 것임을 자랑하는 기치를 드높이면 좋치 않을까 역설한 적도 있다.
그것도 DNA 검서를 통해 식생활과 나아가 자연환경등을 통한 시뮬레이션 영화를 만들어 준다한다. 부여에서 실제 하고 있다. 이것을 박물관에서 이동하여 백일홍 셋트장에서 상영도 할 수 있는..
하리 출토의 청동기 유적은 평창 역사의 태동을 여는 전령사이다
2,500여년전 이곳 평창의 들녘엔 여명의 햇살에 빛나는 청동검을 높이 들고 평창의 시원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 먼 후손인 우리들은 그 문명을 외면했기에 평창의 선인은 갈 곳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사학자든 사학 단체이든 모든 평창인들은 평창의 시원을 여는 조상님들의 역사를 방관했기에 어찌보면 그것은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평창의 조상님은 지하에서도 2,500년을 기다려 다시금 고조선 청동검을 높이 들어 이 땅에 역사를 밝게 비추어 주려 하였지만 못난 우리시대는 수석 박물관은 차리고 내 물건은 쌓아도 고조선식 청동검을 높이 쳐 들고 이땅 평창 역사의 시원을 알리는 고(古)인골은 집 (박물관)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한 후대 평창인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고고학 연구원에서 그의 고향 평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디론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셋방살이(박물관)으로 이사를 가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평창인들의 현 주소이다.
(다시 올수 없는 점의 이해는 앞으로 쓸 4부에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참으로 평창에 제일 슬픈일이로다.
어느 지역에 이러한 시원을 알리는 고조선식 청동검을 높이든 고인골이 있는가??
평창 시원의 역사의 조상님도 몰라보는 이보더 평창에 더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한민국 어느 페스티벌에서 고조선을 말할 수 있을까?? 백일홍 축제장에서 고조선 시대인의 생활상을 영화로 감상하며 백일홍 축제는 역사에 단 한점뿐인 2,500여년 전 유골의 고조선 시대인을 접할 수 있는 문화가 되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련가??
이곳에서 출토된 고 인골은 2년후 밝혀진 바로는 20대 여자이며 2,500여년전의 유골은 이것 단 한점 뿐이다.
하지만, 평창의 그런 훌륭한 문화 역사는 이제 떠나간다. 이로서 고향을 저버리고 타 지역 박물관에서나 만날 듯 다시는 평창으로 올 수 있는 평창문화는 아닌 것이다. 못내 아쉽지만 내 혼자 대여섯 번의 게시글등의 이야기로는 충족치 못한 상태라 여러 사람이 알 수 없었기에 아쉬움은 남는다
그러지만 백일홍 축제에 평창의 역사를 가미하겠다는 언 후배의 이야기는 본인의 게시글을 이해라도 한듯이 여러 역사적 사실들이 나열되길래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양사언 강소사, 권두문 군수등 많은 사료를 어떻게 연계시킬 수 있을까...
그에 방법으론 백일홍 축제장에 평창 역사의 몰(mole)을 만들고 단순한 역사 이야기를 미니어쳐등 밀납인형등으로 제작하고 영상으로 역사를 연출한다.
(1) 양사언은 선정을 베푸는 평창군수로그가 상소하여 세금의 부담을 덜어주자 군민은 그의 임기를 연장해줄 것을 청하여 1년더 군수로 재직하였다는 평창군수로서 기록에 의해보면 가장 군민을 위한 어진 군수였다는 점과 나아가 양사언의 시조 "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라는 시조가 평창군수 재임시 그가 삼방산을 보며 쓴 것 아닌가 하는 점을 주창하는 분도 있다. 물론 정확한 기록이나 단서는 없어도 그 시조가 삼방산을 보며 쓴 시조 아닌가 하는 사색의 점은 충분하 이해 할 수 있다.
그는 군수로서 군민 계도를 위한 시조 한 수에서 평창인들은 눈만 뜨면 저 멀리 보이는 평창의 목멱, 주작의 삼방산은 높게만 보인다. 이러한 우리의 시양에 높은 산도 즉, "삼방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라고 쓰고 싶어도 타 지방 사람들이 삼방산이 높은지 큰지도 알지 못하기에 태산이라고 바꾼다면 그가 의도하는 높음이 이해 될 수 있다.
이러한 가설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려질 수 있는 것으로 삼방산의 의중을 담은 양사언의 생각이란 점과 또한 모든 소설이나 詩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양사언의 "태산"이란 시조도 체험율의 소산이라면 그것은 평창의 남산의 높음을 비유한듯한 인상이란 점이다.
또한 양사언이 평창군수(종 4품직) 부임시에 군민ㅇ의 인상이 머리는 흐트러지고 옷은 헤져서 몸이 다보이는등 이러한 모습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고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당시 본군이나 여타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조선 중기의 정치적 쇠약현상에 군 수입이 군 재정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해동지도에서 보면 군졸 34명 관리등을 합하면 50여명의 녹봉과 군량미 비축등 세수가 재정을 따르지 못하는 현상에 사자(死者)도 명단에 제명되지 않고 세금이 부과되어 자식들은 2배의 세금을 물기에 힘이 들어 외지로 도망가면 그곳에서는 자기것의 세금만 물으면 되는 기 현상도 속출하고, 당시 사회엔 세금을 못이겨 성기도 자르는 사태도 속출되는등 힘든 시기에 양사언은 상소하여 평창군민의 세금을 일부 유예시키게 되는등 조세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가지는 선정을 베푼 군수임을 자랑으로 모심도 훌륭한 생각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평창 역사관 코너를 마련하여 그림과 만화로 간결한 문장으로 평창역사를 이해하는 코너의 선행先行)도 좋을 듯하다.
(2) 평창 제 1의 기상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군수와 단결하는 평창군민의 기상을 기려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정선은 왜장이 보낸 사신이 항복문서에 정선군수 정사읍은 쓸개도 없이 넙죽 절을하며 항복하지만,, 권두문 평창군수는 왜장의 항복문서를 가지고온 자의 목을 베고 臣은 君의 신하로서 항복이 아닌 항전의 기치를 높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의 대군이 몰려오기에 할 수 없이 응암굴로 숨어 들어간다.
또한 임란때의 권두문 군수 아래 우리 평창의 선인들의 곧은 절개와 그 기상은 적과의 병력수에서 본다면 중과부적의 수 이지만 당시 권두문 군수는 앞으로 유린당할 주민들을 생각하고 君과 백성의 臣으로서 목숨을 바치는 충정의 각오로 임 하셨던 것입니다. 이 기상은 우리에게 또, 언제라도 충분한 귀감입니다.
아마 혹독한 대가 였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평창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선 기상....
우리의 역사에 제 몸 하나 편코져 탐관오리들의 사대사상과 아첨꾼들의 짓거리가 난무하지만 군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권두문 군수님의 충정의 기상과 그에 화합된 평창인들의 단결,,,,,여타 현들의 현감의 마누라가 왜장의 소첩이 됨보다는 우리 선조님들은 일어서고 나아가 싸우자는 이것이 우리의 평창의 선인들의 큰 자랑거리 입니다.
그리고 무과에 급제한 무인 지사함 장군을 ( 여기서 장군은 지방군수가 내려준 별칭)은 평창 군 관만은 분연히 일어서서 대항하였고 죽음을 무릎쓰고 군민을 보호 하고자 하였으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왜병ㄱ에 대항해 싸우던 늠늠하게 그 기상은 시대를 넘어서서 높이 기려야할 충정으로 평창인들에겐 귀감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 평창의 선조님들의 용기와 그 기상은 우리 평창의 앞날에 희망으로 용기를 불어주는 우리들의 표상인 점이다.
(3) 강소사 이야기.
평창사람들은 강절부님을 권 군수의 후실 부인이라 격을 낮추고, 또한 강소사란 이름을 부르나 당시 조선시대의 후실부인은 지금의 후실이라는 명분과는 사뭇 다른 점이다. 물론, 서른두 살의 강소사 부인은 젋었다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 있으나 당시 본 부인은 군수의 고향인 영주에서 노환의 노모를 봉양하느라 따라 움직일 수 없었으며 후실 부인은 지금과 같은 놀이문화의 위치는 아닌 것이다.
또한 평창 사람들은 지금 "강소사"라 부르지만 기실 광해군은 그의 순절의 인품에 "절부"라고 추증하였다. 그러기에 강소사라 부르는 것보다 임금님이 내려준 휘호의 강절부님 이라야 예의 표시에 합당한 존어이다.(광해군 4년에 경상감사의 상소로 절부(節婦)로 추승 정려되어 그의 고향인 영주시 구성공원내에 정려각이 세워졌다)
천동리에서 강절부님의 진혼제도 울렸지만 진주의 논개보다도 더 굳은 지조의 상징으로 한때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다녀갔는데 그들의 역사에는 아마도 절부님이 천인절벽에 투신하여 지조를 지키자 적장 모리길성은 시신을 거두어 화장을 하고 장례를 지내고 전투를 다시하였다는 일본인 쪽에서 바라보는 미덕이 어디에 어디에 무엇이라 기록되어잇는지 권 군수 13대 종손 권태하 님(명동성당 장로, 작고)은 일본의 역사 교수친구에게 부탁하였는데 회신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동경제대 도서관 등지에 임란사중 소서행장의 기록편 중에서 4번대 모리길성의 감원감영 접수 직전의 대목에서 나타나든 이 전사속에 추려진 여인상등에 나타날 것이다( 소서행장은 일본으로 돌아가 35세에 재판에서 사형당했으며 모리길성은 31세였기에 전시 여인들이란 책도 나왔을지도)
이런한 기록도 찾아서 일어판 안내문도 마련하고 앞으로도 일본인 방문객이 한국을 찾아올때 답사 1번지 코스로 연중 상시 접할수 잇는 문화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렇게 목숨을 받쳐 지조를 지킨 조선 3대 여인상에는 강절부님과 영월 고씨 동굴속 물에 투신한 조씨 부인, 그리고 논개가 있다.
(고씨동굴의 내력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조씨 부인을 모르신다면 본인의 글 ""고씨동굴과..."라는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영월사람들도 잘 모르는 미완의 의병장 고종경 어른의 이야기 중에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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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인은 그간 밀린 과제중 엄기종님과의 첫 만남에서 대화의 정리와
그리고 정원대님이 찾아 이야기하는 황새여울에 본인의 생각.
마지막으로 평창의 역사는 어디가서 물어야 됩니까?? 란 글로서 본인은 평창 역사 이야기는
하고픈 이야기도 많치만 이로서 종결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4장 평창의 역사는 어디로 갑니까 에서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