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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나 칼럼>
새해 신수를 보아하니
글| 이원익
묵은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맞는다. 비록 고국을 떠나와 살게된 이국땅에서 맞는 양력설이지만 설날을 맞아 지난해를 큰 재앙 없이 마무리함에 감사를 드리고 새해에도 무사히 한 해를 보낼 수 있도록 빌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내가 정말 새해에는 아무 탈 없고 복 받으며 한 해를 보낼 수가 있을까? 그런 것은 누가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주위에 흔한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그런 것은 여기 말로 당연히 하느님의 잡이라고, 하느님이라면 예수님이겠지, 그 분이 그리 하신다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다른 이름인 여호와 하느님, 곧 신의 뜻이란다. 잘 되고 안 되고는 전적으로 그분의 생각과 의지에 달린 것이니 우리 피조물들의 바램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어지간히 놀랐는데, 말하자면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따르고 안 따르고 하는 것과 그분이 내게 주는 점수, 성적표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씀 때문이다. 상식과는 어긋나는 말씀이고, 제멋대로 학적부를 매기시는 참 이상한 선생님이시다. 착하면 상을 주고 못됐으면 벌을 주는 게 인륜도덕에 합당한데 하느님의 논리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이다.
무슨 처분을 내리든 그분의 뜻이니 우리 아랫것들은 무조건 그에 순종해야 하며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저 어른께서 깊은 뜻이 있어 그러시려니 여기고 덮어놓고 복종해야 한단다.
이를테면 착한 이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도, 나쁜 놈들이 호의 호식하는 것도, 지진이 나고 산불이 나는 것도, 비행기가 떨어지고 배가 가라앉는 것도 다 그 분의 어떤 계획, 프로젝트라고 한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냄’ 이라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산불 안 나게, 비행기나 배가 사고 안 나게 인간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도 해야 한다니 나 같은 보통 인간의 머리로는 그 말씀들이 아귀가 잘 안 맞아 참 답답한 노릇이다. 산불이 나는 것이 하느님의 하시고자 한 일일 경우 만약 그것을 막는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일텐데, 그 막는 것도 하느님이 하고 싶어 시키셨다 하고, 그러다 다시 불이 더 번져도 하느님이 그렇게 하고 싶으셨던 거고…, 까짓것 될 대로 돼라, 그게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 버려야 하나? 아무튼 골치 아프고 헷갈려서 그러시는지 묻지 말고 무조건 일단 믿고 보라고 강권하시는 우리 집사님 말씀이 왜 그러시 는지 일면 이해가 간다. 우스개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위에서 말한 그런게 진리이고 사실이라면 나 같으면 시간 쪼개 가며 교회에 가거나 성경을 읽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리 하나 안 하나 결국은 하느님 뜻에 달려 있는데 뭣 하러 그 고생을 사서 하나? 그런데 이런 반론에 대비하여 또 얼핏 그럴싸한 이론이, 신학 이론이 개발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내 생각엔 내가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고 안 하고도 결국 하느님의 뜻에 달렸을 것 같은데 무슨 자유의지를 주었다느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가 이어지더라. 아무튼 기독교인들이라면 새해를 맞아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더욱더 그 말씀에, 가르침에 복종하기를 맹세하며 확신에 젖은 새해를 맞이하리라. 그리고 살다가 혹 불행을 당하더라고 절대 반발이나 불평을 하지 말고 순응하라는 내외의 압력을 느낄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하느님이 이래도 되시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이웃 종교 이야기는 아무래도 이 정도로 하는 것이 새해 벽두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일 것 같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나?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로는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우리가 이리 고생을 하거나 때로 큰 복을 받는다고 한다. 전생에 내가 어떤 업을 지었는지, 악업인지 선업인지, 얼마만큼 지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금방 알 수가 없다. 태어날 때 다 잊어먹게 돼있다고 한다. 잊어 먹든 일부나마 기억하든 전생의 업이란 게 사실이라면 이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미 지어 놓은 업이 이 생의 내 운명을 결정한다니 내 한 평생의 행복과 불행도 이미 백 프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혹시나 싶어서 제 딴엔 애를 써 보지만 다 헛일일 수밖에 없다.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데 말이다. 김이 빠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김이 빠지게 할 리는 없으니 이 전생의 업이라는 것이 정말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맞는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좀 잘못 알고있는 것이다.
해탈에 이르지 못한 중생들에게 있어서 이 전생의 업이라는 것은 이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조건일 뿐이다. 내가 가난한 시골의 농가에 태어났다면 그건 환경이요 조건일 뿐이다. 가볍지 않은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조건을 안고 이승에 태어났다고 해서 꼭 이승에서도, 그리고 내세에서도 반드시 대대로 가난한 농투성이 노릇만 해야 된다는 법이있나? 부잣집에 태어났어도 마찬가지다. 부자 삼대 가기 어렵다는 말도 있지 않나! 확실히 가난한 집 아이는 살아가기에 여러 모로 불리하고 가난을 대물림하기가 쉽다. 반대로 부잣집 아이는 여러 면에서 유리하며 대를 이어 자산가가 되기 편하다. 크게 노름하거나 방탕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그 모든 조건보다도 우위에 있는 조건이 있으니 그건 그 당사자의 평소 마음가짐이다.
그 마음을 다스려라. 전생의 업이 큰 힘을 발휘하지만 혹시 악업이라면 그것을 힘써 극복하고, 혹시 선업이라면 그에 따른 복락을 낭비치 말고, 어떠한 조건하에서도 비굴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마음을 맑히고 추슬러 선업을 지을지어다. 이승에서 힘껏 선업을 지으며 행복을 추구하고 혹시 그것이 여의치 않더라도 그 선한 공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내생을 위한 좋은 조건이 됨을 믿어라.
너 자신 운명의 주체는 하느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며 당연히 너 자신 이니라. 네가 처해진 조건, 운명에 너무 반발하지 마라. 그러나 거기에 짓눌리지도 마라. 일단 받아들이되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더 나은 것으로 바꿀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그러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가? 그야 부처님께서 친절히 밝혀 놓으신 팔정도를 비롯하여 산뜻하고도 친절하신 경험담, 그 가르침이 있지 않나.
그런데 팔정도도 좋고 육바라밀도 좋지만 때가 때인 만큼 새해 신수나 한 번 보고, 토정비결이라도 참조한 후에 숨 한 번 돌리고 하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 설마 하니 곧이곧대로 믿기야 하련마는 용하다는 점쟁이한테 한 번 가 보는 것은 또 어떨까? 한국에서 새로 왔다는 무슨 보살 점바치가 그리 용하다던데…. 물론 이런 것들이 사회 문화의 한 요소로서 어느 나라 어느시대에나 형태와 이름을 달리하여 있어 온 것이고 너무 백안시하여 진멸의 대상으로까지 삼을 것은 없다 하겠다.
속된 말로 그 사람들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고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도 아니며 그 또한 먼 원시시대부터 내려온 어떤 인연의 결과물이라 기가 서려 있고 불가사의한 점도 전혀 없지는 않다.
더군다나 이런 데 종사하는 많은 이들 중엔 절집과 한 때 인연이 닿았던 이들도 있고 무슨 보살, 무슨 동자, 무슨 법사하며 지금도 불가의 이름과 옷을 빌려 입고 있어 민중을 현혹케도 하고 위무하기도 한다. 무릇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들도 폐해와 공덕 중에 하나만 전적으로 짓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결코 이런 것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점 치고 복 비는 일은 분명 불가의 일이 아니니라. 그런데 더러 그런 일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니라. 실은 우리끼리 얘긴데, 절간이든 교회당이든, 모양과 말씀만 그럴듯하게 바꾸어서 날마다 점치고 예언하고 복채 내고 기복하느라 온통 야단법석이라고 세간에 비판이 자자하니라.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만 해도 넘어가겠는데 안 믿으면 벌받는다고 으르기까지 하면서 우리 동포들 가운데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은 오늘도 새해 새벽기도에 나서 엎드려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하느님이 주신 복을 받아 ‘시작은 비록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앞날을 확신하며 남들이 보기에는 일종의 자기 최면 같기도 한 기원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특히 한국사람들이 하는 종교 행위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강하니 누가 비꼬듯 그런 사람들만이 모여 앉아 빌고 있는 집이라면 좀 크고 잘 지은 점집이나 무당집이라고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이런 점에서는 불교도 대차가 없어 보인다.
부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 같진 않은데 여러 경전, 가령 지장경에 보면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거나 공양공경하면 넓고 풍요로운 곳에 나게 되며, 평안하고 안락하며, 죽은 조상들과 친척들이 좋은 곳에 나고 수명이 길어진다. 온갖 재앙이 사라지고 원하는 바를얻게 되며, 천신이 보호하며, 훌륭한 스승을 만나 필경 진리를 깨달아 중생계를 벗어난다’고 되어 있다.
부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고 당당하게 여러 경전 구절에서 기복을 부추긴다. 그러니 이쯤 되면 기복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 한다. 기복은 종교의 필수 요소라고. 기복을 무시하거나 잘 다루지 않으면 세속에서 종교로서 유지를 할 수가 없다고. 현실이 그렇지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왜 말끝마다 기복, 기복 하며 자기와는 무관한 양 손가락질만 하는 것일까?
내 결론은 이렇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기복을 위한 것이다. 중생의 이 원초적인 욕망을 종교는 거두어 달래고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 머무르면 타락한다. 나 하나, 내 식구, 내 동아리만을 위한 좁은 기복에서 벗어나 자기를 버리는 큰 욕심, 중생을 향한 발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의 이름으로 설해진 모든 기복적인 요소는 중생구제를 위한 발원과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가는 전단계 방편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깨달음이란 결국 복을 구하는 마음, 복을 찾아 헤매는 그 목마름과 같은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말하자면 복을 버려 해탈을 얻음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다.
그리고 이 새해 벽두, 그래도 버릇대로 신수 한 번 꼭 보고자 할 양이면, 심심풀이 파적으로 재미 삼아 뒤적이되 거기에 결코 끄달리지 말지어다. 그럴 자신 없으시면 아예 쳐다도 보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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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멋진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