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하 교수의 “한국민족의 형성과 민족사회학”에서
중국 한족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한 직후인 BC 1세기와 AD 1세기경, 한사군의 주변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민족이 있었다.
- 고구려를 선두로 하는 貊族(맥족)
- 압록강 하구에 배를 잘 다스리는 良貊族(양맥족)
- 종래의 지배세력인 夫餘族(부여족)
- 신흥세력이던 高句麗族(고구려족)
- 퉁가강 유역의 小水貊族(소수맥족)
- 압록강 중류의 大水貊族(대수맥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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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섬)나라에 도착하다.
고원지대의 蓋馬族(개미족)이 판을 치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 고구려족이 우세로 판세는 기울어졌다. 부여족은 남하하여 백제를 건설하고 부여족, 고구려족, 양맥족 일부는 시간을 두면서 바다를 건너 섭라(섬라)에 도착하였다. 섭라에 도착한 그들은 각각이 부족을 거느리고 족장 지휘하에 정착하여 생활하다가 한라산 북쪽 해안가 모흥혈에 회의하여 연맹왕국으로서의 “탐라국”을 건국하였다.
그들은 모두 맥족 계통으로 언어와 문화가 비슷하였으므로 큰 무리 없이 곧 융화되었다. 즉 탐라국을 건국한 지배세력은 북방으로부터 이동하여 들어 온 맥족으로서 양맥족, 고구려족, 부여족의 귀족과 무사 계급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왕. 군장. 족장의 호칭인 `을나`를 고구려, 양맥, 부여 등 북방의 국가에서 사용한 점을 든다.
따라서 기원 전후 1세기경 제주도에 들어와 탐라국을 개국한 삼을나 인으로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는 양맥족의 군장, 고구려족의 군장, 부여족의 군장이라는 의미다. 타당한 원인을 용담동 고인돌 무덤에서 찾았다. 1984년 제주시 용담동 석곽묘에서 출토된 철재 장검은 만주 길림성 지방부터 대동강 이북이 서북쪽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제주 용담동에서 발견되어 큰 이슈를 일으켰지요. 그들의 부족장인 맥족 계통의 양맥족, 고구려족, 부여족들은 철재 장검을 사용한 증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