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30분. 하카타 항의 첫인상은 정갈했다. 접안부두를 비롯한 항만 시설들이 어딘지 모르게 깔끔했다. 전날 밤 10시에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을 출발한 카페리가 5시간 30분 동안 달려 도착한 일본 후쿠오카 하카타 항. 한·일 두 나라를 연결하는 가장 짧은 뱃길이지만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청동기 문명·벼농사 기술 전수했던
한반도 도래인 숨결 가득한 가라쓰
임진왜란 때 왜군 진영 구축했다는
모모야마 덴가이치 올레길 안내판
나고야 성 옆 사가 현립 박물관엔
이순신 장군 거북선 모형도 전시
첫 번째 방문지 가라쓰 시. "BC 3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청동기 문명과 벼농사 기술을 전해 준 곳이지요. 그렇게 농사 기술을 배운 일본 사람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곳입니다."
고려대와 경북대에서 4년간 역사학을 전공했다는 통역 가이드 고가 씨는 가라쓰를 '일본 최초로 문명의 서광'이 비친 곳이라고 설명했다. 어제 밤새 달려온 뱃길이 일본에 문명을 전해준 바다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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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이 조선을 침략할 배를 정박시켰던 해안. |
■문명 전해 준 바다를 침략 루트로 이후 가라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출병시킨 전초 기지가 되었고 그 전쟁 때 볼모로 잡아간 도공들을 앞세워 일본이 세계 최고 도자기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심 도시가 되었다고 덧붙인다.
가라쓰 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언덕에는 가라쓰 성이 있다. 사무라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성곽이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군 14만여 명을 이끌고 침략의 깃발을 올렸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선입관 탓일까. 가라쓰 항에서 도선을 타고 10분가량 달려서 도착한 다카시마 항. 복권 당첨에 영험이 있다는 호토 신사가 있는 섬이다. 100가구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조그만 섬이지만 연간 수십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복권을 사기 위해 모여든다는 신흥 관광지다. 복권을 통해 신분이 상승하는 기적을 꿈꾸는 심리를 상품화한 상술이 얄밉기도 하지만 적은 비용으로 미래에 대한 염원을 담은 오락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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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지휘했던 나고야 성터. |
두 번째 코스로 찾아간 모모야마 덴가이치 올레길. 가라쓰 항에서 자동차로 50분가량 달려서 도착한 시골 마을에서 출발하는 산책로다.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10분가량 걷다 보면 갈대밭처럼 넓은 평지가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전국의 영주를 이곳으로 불러 모았을 때 그의 오른팔 격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군사를 이끌고 묵었던 진영이 있었던 터라고 했다.
올레길을 계속 걸어가면 호리히데하루 진영 터, 우에스기가이케츠 진영 터 등 당시 일본 열도 곳곳에서 몰려온 영주들이 진지를 구축한 으로 소개하는 안내판들이 줄줄이 서 있다. 이웃 나라에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준 역사의 현장을 상품화시킨 일본의 의도가 의심스럽지만, 풀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는 올레길은 평화롭기만 하다.
1시간 코스인 올레길 끝자락에는 나고야 성터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전황을 보고받고 작전 계획을 하달했던 곳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전 국토를 황폐화시켰던 사람. 요즘 말로 하면 동북아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전범의 소굴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만든 일본 정부의 속내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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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성 박물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
■우리 문화재 가득한 나고야 성 박물관 나고야 성 옆에는 사가 현립 나고야 성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우리나라 북제주군에서 가져왔다는 돌하르방이 서 있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안내 데스크 바로 옆에 전남 해남에서 가져왔다는 나무 장승,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앞 줄에는 신라 금관과 금동미륵보살 반가상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조그만 글씨로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라고 적어 둔 안내문과 함께. 홀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의 모형이 놓여 있다.
이웃 나라 국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의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는 나고야 성 박물관. 그 이유를 물으니 나고야 성 박물관 소속 한국인 학예사 이경현 씨는 "한·일 두 나라 문화가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 대로라면 일본의 어떤 문화재가 신라 금관이나 거북선과 비슷한지에 대한 보충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일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기초 지식이 없는 서양인들이 그곳에 전시된 우리 문화재들까지 모두 일본 것으로 착각할까 두렵다.
씁쓸한 마음에 마지막 코스로 찾아간 가라쓰 해안 길. 부산에서 불과 190㎞ 떨어진 해변으로 날씨만 맑으면 남해안이 보일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초록빛 들판이 펼쳐진다. 이런 절경을 가진 가라쓰 앞바다에서 우리 국토 전역을 피로 물 들인 왜군들이 출병했다는 말인가. 겉으로는 웃지만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사람들의 속성을 경계하라는 속설이 되새겨진다.
먼 옛날 수렵과 채취 생활을 하던 일본에 문명의 불빛을 전해주었던 뱃길. 그 물길을 따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침략을 자행한 일본. 그런 두 나라 사이에서 물결치는 바다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돌아오는 뱃머리에서 지켜본 대한해협은 말이 없었다.
하카타(일본)=글·사진 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선박;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후쿠오카 하카타 항으로 가는 카페리가 매일 밤 10시(승선 시간 오후 7시)에 출발한다. 새벽 3시 30분에 도착하지만, 입국 수속은 오전 7시 30분부터 시작한다. 운임 9만 원.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최대 50%까지 할인받을 수 있다.
항공편; 부산 김해공항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비행기가 하루 6번 운항한다. 에어부산 3회 (오전 9시 55분, 오후 2시, 오후 6시). 대한항공 (오전 9시 15분, 오후 5시 55분). 제주항공(오후 1시 15분).
하카타 항에서 가라쓰 시까지는 시내버스가 운행한다. 기차는 하카타 항에서 2㎞ 떨어진 하카타 역에서 70분가량 달리면 가라쓰 역에 도착한다.
■환전
일본에선 카드 사용이 우리나라처럼 일상화되어 있지 않다. 고객에게 카드 수수료를 부담할 것을 요구하는 곳도 있다. 특히 식당의 경우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곳이 많아서 필요한 만큼 환전을 해 가야 안전하다. 환율은 100엔에 1천 원 내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