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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허초희)의 자취..그녀의 무덤에서 띄우는 엽서....
조선에 태어난 것을 한(恨)하고 ..또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했던 조선조 최대의
여류시인,.,,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조선에도..대한민국에도 여성 대통령이 태어난 것을 그녀가
안다면....그녀의 감회는 ..
조선조 최고의 여류작가 허난설헌(허초희)작품입니다.
조선조 사회혁명가이기도 했던 허균의 누나입니다...
조선의 3대 여류시인은 ..황진이..허난설헌(허초희) 그리고 이매창(선조때)
기생입니다..신사임당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은데 사실은 이매창입니다..
채련곡(採蓮曲)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가을의 긴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荷花深處係蘭舟(하화심처계난주) 연꽃 깊은 곳에 목련배 매어두고
...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님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 했네.
蘭舟(난주) : 한사람이 타는 작은 배. 쪽닥배.
遙被(요피) : 遙는 멀리. 被는 -함을 입라. 피동의 뜻
人知(인지) : 남이 알다
시 해설
맑은 가을날이다. 길게 펼쳐진 호수의 물결이 벽옥처럼 푸르다.
그 호수 위에 수천 평의 무성한 연밭이 어우러져 있다.
한 낭자가 연밥을 따기 위해 난주(蘭舟)를 타고 연밭으로 들어간다.
난주란 목련나무로 지은 배인가? 굳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여인이 타고 있는 배이니
고운 치장을 한 작은 배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그 배가 연밭 깊숙한 곳에 이르러 정박한다.
그런데 연밭 너머 저 물 건너에 님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그 님은 낚싯대라도 드리우고 있을 것만 같다.
여기서 님을 보게 될 줄이야. 어쩌면 주인공은 연밥을 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님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그 님을 보기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곳에 배를 세우고 숨어서 님의 동정을 살핀다.
그런데 님은 드리우고 있는 낚싯줄에만 마음을 두고 있을 뿐 주위의 정황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낭자는 연밥을 따서 가만히 님이 있는 곳으로 던진다.
연밥은 님이 있는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그만 물에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연이어 던져보지만 야속하게도 님은 눈치채지 못한다.
멀리서라도 누가 보면 어떻게 하지? 낭자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반나절을 그렇게
보낸다. ......
-허난설헌 '곡자(哭子)'
지난해 잃은 딸과
올해에 여읜 아들
울며 울며 묻은 흙이
두 무덤으로 마주섰네
태양 숲엔 소슬바람
송추(松楸)에는 귀화(鬼火)도 밝다
지전으로 네 혼 불러 무덤 앞에 술 붓는다
너희 형제 혼은 남아
밤이면 따라 놀지
이 뱃속 어린 생명
또 낳아 잘 자랄까
어지러운 황태사(黃台詞)
피울음에 목이 멘다
강원도 명주군 사천리에 있는 애일당(愛日堂) 옛터를 다녀 왔습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서 그리고 소설「홍길동」의 작자로서 널리 알려진
교산(蛟山) 허균이 태어난 곳입니다.
지금은 작은 시비 하나가 그 사람과 그 장소를 증거하고 있을뿐이지만 시비에 새
겨진 누실명(陋室銘)의 한 구절처럼 정작 허균자신은 그곳을 더없이 흡족한 처소
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환로(宦路)에서 기방(妓房)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두량
넓은 학문의 세계로부터 모반의 동굴에 이르기까지 그가 넘나들지 않은 경계는
없었습니다.
당대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지나간 한줄기 미련없는 바람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그의 최후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언덕과 시원하게 트인 바다 그 어디
에도 회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애일당 옛터에서 마음에 고이는 것은 도리어 그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정한(情恨)
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던 그녀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을 결심을 한 것은 오죽헌을 돌아 나오면서였습니다.
나는 교산을 찾아보고 오리라던 강릉행을 서둘러 거두어 서울로 돌아온 다음 오늘
새벽 일찍이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자욱한 새벽 안개속을 물어 물어 찾아왔습니다.
오죽헌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무덤은 우리의 상투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신빙
성이 있어보이는 판단에서 한발 물러나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낸 결론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
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도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리 현실을 창조하는 문화속에서 우
리가 역사를 제대
로 만날 수 있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마저 <상품>이라는
교환가치형태로 갖도록 강요되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아픔과 비극의 화
신인 난설헌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집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앞에 냉수 떠놓고 소지올려 넋을 부르며“밤마다 사이좋게 손
잡고 놀아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
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새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 신영복의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칭송받는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다. 기방(妓房)문학은 있지만 규방(閨房)문학은 없다는 남존여비의 각박한 조선사회에서 허난설헌은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비운의 천재시인이다.
헌데 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 조금 까다롭다.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내려 광주시(경기도) 쪽에서 접근할 경우엔 광주시에서 동쪽 퇴촌면 방향으로 이어지는 338번 도로로 진입해야 한다. 그리하여 경안천을 옆에 끼고 이어지는 이 길을 줄곧 따라가다가 송정동 끝자락, 경안천과 곤지암천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338번 도로와 헤어져 우회전해서 초월읍 지월리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후 1.5km 정도 진행해 지월교를 만나면 거기서 좌회전해 곤지암천을 건넌다.
그리고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IC에서 접근할 경우, 곤지암 IC에서 5km 정도 북상하면 이정표에 ‘도평리입구’라는 삼거리에 이른다. 길 왼편엔 GS칼텍스 주유소가 있고, 전봇대엔 ‘남촌풀장 앞’, ‘현산로’ 등의 작은 이정표도 보인다.
거기서 약간 내리막인 길로 우회전해서 500여m 곤지암천을 따라 동쪽을 향해 들어가면 길이 갈라진다. 오른편 길은 강변(곤지암천)을 따라 이어지는데, 그쪽으로 가면 대성학원 앞을 지나 결국 막다른 곳에 이르러 길이 끝나므로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
조금 분위기가 이상하지만 갈림길에서 왼편 아파트촌이 있는 번잡한 시가지 쪽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러면 얼마 가지 않아서 시가지를 벗어나게 되고, 이어서 헤어졌던 곤지암천을 다시 만나 강변을 따라 동북진하면서 지월리로 길이 이어진다. 곤지암천이 멀리 휘돌아서 여기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 가지 않아서 지월교를 만나게 되면 거기서 우회전해 곤지암천을 건너가야 한다.
지월교를 건넌 후엔 그대로 동쪽을 향해 직진해 1km 정도 진행하면 저 멀리 중부고속도로가 보이는 곳, 그 부근에 이르면 왼편 들판 가장 자리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시멘트포장길이 있다. 거기서 좌회전해 그 길로 북진해야 한다.
지월2리 마을회관
그러면 멀리 보이는 중부고속도로와 병행해서 북진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길 오른편에 새로 지은 지월2리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마을회관에 들어가서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굳이 마을회관에 들어가서 묻지 않아도 그 길로 계속 전진하면 결국 그 길이 중부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로 빠져나가게 돼 있다. 그 굴다리 직전에 왼편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있고, 그 길목에 허난설헌 무덤이 있는 곳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 표지석 앞에서 100여m 산자락으로 다가가면 허난설헌 일가의 묘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90호인 허난설헌의 묘는 현재 묘역에서 약 500여m 오른쪽에 있었으나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1985년 현 위치로 이장했다고 한다. 새로 조성된 묘역엔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선영의 묘를 모두 이곳에 이장했으며, 이 묘역의 맨 아래에 허난설헌의 묘가 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유언에 자기의 시를 모두 불살라라 했다는데, 다행이 친정에 남아 있던 시편들을 동생 허균이 모아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했고, 이 시집을 당시 중국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의 대문장가 주지번(朱之番)에게 보였던 바, 주지번은 난설헌의 시를 보고 ‘빼어나면서도 화사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뚜렷하다’고 감탄한 나머지 이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1606년 역시 ‘난설헌집’이란 이름으로 출판함으로써 난설헌의 명성이 대륙에 떨쳐지게 됐다.
헌데 이 책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에서도 1711년 출판돼 일본열도를 뒤흔듦으로써 동양 3국에 그녀의 명성이 빛나게 됐다.
이런 허난설헌이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남존여비 사상을 극복하지 못해 푸대접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허난설헌 평전과 함께 소설도 출간돼 그녀의 명성이 재조명 받고 있어서 다행이다. 시대가 만든 벽에 갇혀 처절하고 처연한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시어로 승화시킨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묘 앞에는 1985년 11월 24일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건립한 시비가 서 있다.
시비에는 ‘곡자시(哭子詩)’의 원문과 역시가 새겨져 있으며, 그 시의 대상인 어려서 죽은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 묘 우측 전면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서 지하에서나마 자식들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하다.
난설헌과 그 애기들의 둘 무덤
그리고 애기 무덤 앞엔 허난설헌의 재능을 끔찍하게 아꼈고, 그녀에게 문학적 영향을 끼쳐 마치 스승과도 같았던 둘째 오빠 허봉이 조카 희윤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피어 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로 시작되는 시가 새겨져 있다.
첫댓글 곳곳누비며 좋은정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운날씨 따뜻한 방구석에서 사랑님 전해주는 소식 듣자니 웬지 죄송해지네여 ^^ 전 오랜만에 주일예배 다녀왓네여마태복음에 나오는 한 이방여인의 믿음에 대한 설교말씀이 이글보니 떠오르네여 ^^
평생에 미친마음을 품다가 가는 인생 딸의 고통이 자신이 고통스러운것보다 싫었던 모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시간되심 함 찾아보세여 감동....
저도 예배드리고 왔습니다...이방여인의 믿음의 설교가 있으셨군요....추운날 주님 안에서 건강과 평강을 기도드립니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