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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4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자 막8:27-9:8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도 하는데 단가까이 있는 고원이 바산지역 지금의 골란고원이며 그 북쪽에 헬몬산이 있다. 헬몬산은 백두산 보다 더 높은 산으로 2815m이다. 헬몬산 정상에 오르면 이스라엘을 한눈에 볼 수 있으므로 헬몬산을 일컬어 이스라엘의 지붕
(시133:3) 헬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주께서 복을 명령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 헬몬의 이슬이 남쪽 시온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풍요해진다 .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슬과도 같은 영생의 복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이다. 이 산을 높은산 또는 변화산이라고도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기 엿새 전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BC 20경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시절 명령을 받은 헤롯은 감사한 마음으로 이곳에 궁궐과 신전을 만들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보답으로 가이사랴로 불렀는데 그의 아들 빌립이 황제 가이사랴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의미로 이 도시를 황제와 자신 이름을 합성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정하였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 약 227km 지점으로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 이 성의 현재 이름은 바니아스(Banias)인데, 이것은 헬레니즘 시대에 판 신전 (Pan theo)을 섬겼기 때문에 ‘파니야스’라고 불리다가, ‘ 예나 지금이나 헬몬산에서 내려온 물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거쳐 요단강을 만들고 갈릴리호수로 흘러가 마지막은 사해로 들어간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더 내려오면 델단에서 흐르는 물과 가이사랴빌립보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서 바니아스 폭포를 보게 된다. 한편 헬몬산 아래쪽에는 이스라엘의 북쪽 끝 텔 단이라는 성읍이 있는데 지금도 단으로 가는 길가에서 살찐 암소들을 볼 수 있는데 이 헬몬산 암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바산의 암소들이다. 기름진 땅에 펼쳐진 바산의 암소들이란 아모스 선지자가 말했던 사마리아 상류층 여인들
(암4:1) 사마리아의 바산에 있는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오늘날 골란지역을 성경에서 바산지역이라 바산지역이 비옥하기 때문에 암소들이 살이 쪘다는 것인데 실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 사치하는 사마리아 여인들을 향해서 아모스 선지자는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외쳤 이곳 단지역은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듯 우거진 숲과 풍부한 물 그리고 물이 만들어내는 폭포소리가 장관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이다. 지난 과거 당시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을 때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막고자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벧엘과 이 곳 단에 있는 (호4:13) 단 지역의 큰 상수리나무 밑에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인도해 낸 하나님이라 부르며 여로보암이 우상숭배를 했던 그 악한 장소가 단이다.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단지역은 그때나 지금이나 헬몬산의 눈녹은 물이 땅에 스며들어 단에서 발원된 물줄기는 단에서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빌립보 가이사랴까지 그 풍요로움을 더하고 있다.
1. 십자가의 여정은 가이사랴 빌립보로 부터
예수님은 벳세다에서 소경을 치유하신 후(막8:22-26)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로 들어가실(막8:27) 그 때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말하기를 어떤 이들은 주님을 가리켜 침례 요한이라 혹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에레미야나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했을 때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시니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막8:29)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고백을 한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 신전 앞에서 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고백이었다. 베드로 신앙고백을 들었던 주님은 비로소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예루살렘에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날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니(막8:31). 이제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이미 삼년이 지나 마지막을 예수님의 발걸음은 십자가를 향해 성큼 성큼 한발자국씩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베드로는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주님을 말렸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마16:24 막8:34 눅9:23) 신앙을 새롭게 전환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비장한 말씀
2.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말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예수님 안에서 가졌던 자기의 야망, 꿈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단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 받는 것으로 알았기에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런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고 부활함을 확실한 방법으로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오순절에 신약교회 모습이 드러나게 될 때 제자들은 교회의 기둥으로 설 수 없다는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사 자신의 변화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 주므로서 그들이 유대교 메시야관에서 벗어난 올바른 메시야관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1) 제자들 앞에서 변화된 예수님
(막9:2-3) 2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취해 따로 그들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사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3 그분의 옷이 빛나며 땅위의 어떤 세탁공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처럼 매우 희게 되었더라.
그 산이 바로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헬몬산으로 알수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서쪽으로 약 4km정도에 떨어져 있는 산이다. 잠들었다가 예수님의 대화소리에 깨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제가지 본 모습과는 전혀 새로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는 육신을 입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려면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형된 모습 제자들은 빛속에 감추어진 예수님 얼굴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변형된 모습은 예수님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로부터 해같이 광채가 나왔으며 또 이 광채는 옷에 반사되어서 그 옷이 빛같이 희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예고를 3차례에 걸쳐 말씀하셨는데
(2) 제자들의 지녔던 잘못된 메시야관
(막9:34)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무거운 여정과는 아랑곳 없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언가 한자리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누가 크냐고 서열다툼하는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옵소서(막10:37) 주님께 구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였지만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말린 결과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무서운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들에게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십니다(마16:24 막8:34 눅9:23). 예수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던 까닭에 십자가를 통한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를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이러한 확신에 찬 예고대로, 지금은 예수님 돌아가신지 2000년 후에는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계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3) 인류를 구원하고자 자신을 부인하시는 예수님
태초에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땅도 지으셨고 땅의 흙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자가 먹은 후 남자에게 주어 이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은 깨어지면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자신이 지은 피조물과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지만 죄에 빠진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공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할 첫 단계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칼로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뿔이 나무에 걸린 숫양을 잡아 이삭대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사건을 죄를 용서하기 위한 마지막 희생제물을 준비하시기 까지 양이나 다른 동물이 우리 죄를 위해 죽어야만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다.
(고전13:10) 완전한 것이 오면 그 때에는 부분적인 것이 없어지리라고 하였듯이 예수님 오시기까지는 양이나 짐승으로 제사지내던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제물이 되어 대속의 제사를 드렸던 이후부터는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린 숫양이 이삭을 대신 했듯이 구세주가 온 인류를 위해 죽어야만 인간은 용서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구약의 핵심입니다. 선지자들은 이미 수백년 전에 오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에 대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미 5:2) 미가도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선지자 스가랴는 메시야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과 제자중 하나에 의해 배반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부인해야만 질 수 있는 일이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앞에 놓인 이 고난의 쓴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셨으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자기부인입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막8:34-36)
이 말씀을 예수님만 십자가 지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셨던 주님처럼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3.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
성경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우리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바울의 신앙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야만 우리의 죄짓는 몸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마10:37-39)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찾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찾으리라
(1) 자기를 부인 하자 (눅9:57-62)
(눅9:57) 그들이 길을 갈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주를 따르리이다 하니 58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59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거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하옵소서 6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61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62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밭을 갈기 위해서 지금 손에 쟁기를 잡고 있다면 쟁기로 밭을 갈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때로는 자기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요구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심지어 자기 가족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 세상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보다도 더 우선이라는 것이다. (마16: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다시말하면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라는 말은 이순신 장군만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미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다. 내가 정말 살려면 나를 죽여야 하는 것인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십자가를 진다는 일은 고난을 의미 하는 것인데 실은 너무나 편안한 신앙생활속에서 십자가를 지을 만한 일들이 무엇이 있겠는가?
(2)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1) 생명을 얻게 되는데 더 풍성한 삶을 얻게 된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신15:4-6) 네가 만일 네 하나님 말씀만 듣고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네게 큰 복을 주시리니 네가 남에게 꾸어주되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많은 민족을 통치하되 그들이 너를 통치하지는 못하리라
(막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심지어는 우리가 죽은 자까지라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마귀들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보다도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14:12-13)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2) 겸손과 주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명예와 생명이니라.(잠22:4)
(시112:1-3) 1 할렐루야 주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신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4.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
(1) 손양원 목사 특히1940년 3월경 안동화합에서는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신사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등을 결정하고 각 지역에서 이러한 운동을 확산시킵니다. 신사불참배로 투옥된 이는 대략 2,000여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침례교단은 그때 폐쇄되었다가 해방후에 다시 일어선 교단입니다. 당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일제의 억압과 교회의 변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것인데 손양원목사는 당시는 목사는 아니었지만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교회 장로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연행(1939년) 되어 5년간 옥살이를 하다 광복을 맞아 애양원으로 돌아와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1946년)를 받았는데 손양원 목사에겐 손동인과 손동신 두 아들과 동희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두 아들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으로 안재선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후 안재선은 체포되었고 이 사실을 안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의 탄원을 위해 노력한 결과 양아들로 입적을 하다. 그리고 손양원목사는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학생이 안 잡혔다면 또 모르되 일단 잡힌 이상 모른 채 할 수가 없구나. 내가 신사참배 거부 때문에 5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어떻게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예수님이 주신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동희야. 그 학생을 죽여서 아들의 원수를 갚은 들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그가 죽는다고 오빠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 원수를 보복하면 또 보복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골육상잔은 민족의 비극이고 국가의 참사인데 이 민족이 이래 죽고 저래 죽으면 누가 남겠느냐?” 이후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는 참으로 무자비하며 잔혹했는데 왜냐하면 손양원 목사는 해방되기 전에는 신사불참배로 옥고를 치렀는데 이후에는 두 아들을 잃고 서울이 3개월만에 수복되는 1950년 9월 28일 북한군에 의해 총살 당하는 순교를 당하는 손양원목사야 말로 진정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2) 피살당한 김진욱 선교사
2019년 11월 16일 터키에서 피살당한 김진욱 선교사는 비교적 자유롭다고 하는 터키에서 순교당하였다. 한기총 회장은 장례식에서 우리나라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우리 민족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터키에서도 故 김진욱 선교사가 흘린 순교의 피로 놀라운 영적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김 선교사는 시리아 전쟁 소식과 난민들의 고통을 전해 듣고 위험지역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을 위한 사명감으로 2016년 봄에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로 터키에 도착하자마자 시리아 난민들을 섬기기 위해 터키 동부 국경지역이며 아브라함의 유적지이기도한 우르파로 가서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나누며 전쟁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난민들을 도와왔던 중 난민을 위한 유럽의 지원이 원활하지 않고 올해 난민정책이 바뀌게 돼 터키 난민들의 상황과 그들을 돕는 외국인 사역자들의 입지도 좁아지게 되면서 김 선교사는 우르파를 떠나 지난 여름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디야르바크르로 옮겨 소규모의 기독교 공동체의 목양을 담당하며 난민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해왔는데 이날 시리아 난민과 쿠르드족을 위해 사역하던 김진욱 선교사(41)가 11월 19일 터키 디야르바키르시 거리에서 16세 청소년으로부터 칼과 가슴에 등을 세 차례 찔려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에서는 과거 2007년에도 독일 선교사가 살해당했으며, 지금도 기독교 단체장들이 이슬람 열혈당원들에 의하여 협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터키는 터키인 99.8%가 무슬림인 이슬람교 국가로 지난 3년 동안 터키 내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한 박해와 위협 등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십자가만 자랑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또한 십자가에 못박힌 내 모습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십자가는 가장 귀한 십자가입니다. 사람마다 십자가는 다를 수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끝가지 지고 갈 수 있는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