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성 시인의 첫 시집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푸른사상 시선 171).
오랜 시간 종교적 상상과 생태적 사유를 천착해온 시인은 시를 통해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사랑과 고통을 깊게 인식한다. 30여 년 써온 작품들을 묶은 이번 시집의 주제는 종교와 영성, 생태주의, 사랑과 고통, 앙가주망 등으로 서로 긴밀하게 맞물리며 신비로운 연대기를 형성한다. 2023년 3월 7일 간행.
■ 시인 소개
1973년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랐다. 오랜 시간 종교적 상상과 생태학적 사유를 천착해온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현재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96년 대학문학상 시 부문, 1997년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2013년 김준오 시학상을 받았다. 2003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와 『문학과경계』에 소설로, 2007년 『시사사』에 시로 등단하였다.
주요 학술서로 『한국 현대시와 불교 생태학』 『한국 현대시와 종교 생태학』 『현대시의 신비주의와 종교적 미학』 『한국 현대시의 전통과 불교적 시학』 외 다수가 있다.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등에 선정되었다.
■ 시인의 말
쉰 살이 되어 천명(天命)처럼 첫 시집을 묶는다
볕 좋은 봄날
응달의 잔설을 들여다보듯
내게 허락된
일몰들을 사랑해야겠다
일어나 다시 걸어가야 할 때다
비로소 먼 길 떠날 채비를 다한 기분이다
■ 작품 세계
시집 원고를 통독하고 떠오른 생각은 ‘말들의 벼락’이었다. 시를 따라가며 읽다 보면 말들의 격렬한 파도에 광기마저 느껴졌다. 김옥성 시인을 직접 만났을 때 느꼈던 단정한 인상과는 달리, 이 시집을 읽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떤 회오리,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꽃배」에서 말한다. “누가 내 심장 속에서 양철북을 두드리는가/지구의 혈관을 떠돌던/작은 입자들이 여기 잠시 머물러/두근거리고 있다”라고. “눈을 감아도/꽃의 환(幻)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의 심장을 두드리는 피의 흐름과 지구의 혈관이 등치되고, 나아가 그는 “궤도 없는 혜성”이 되고는 “근원을 알 수 없는/향기에 실려” “우주 밖의 우주, 그 우주의 바깥으로까지/흘러가곤 했다”는 것이다. ‘우주 바깥의 우주’를 ‘꽃의 환’에 취해 떠돌아다니는 상상력, 그리고 그 무한우주를 자신의 혈관과 유추하는 상상력은 한국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략)
이 시집에서, ‘여행자’로서의 시인은 세계의 이면에 감추어진 죽음들을 들추어낸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 내재한 죽음과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인 자신이 다른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여기 있는 우주의 죽음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의 세계를 가로지르면서 지금 여기 우주의 경계가 찢어지고 다른 우주가 열리며 시가 현현한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하나의 죽음을 거쳐 가면서 정처 없이 여행하는 것, 그것이 김옥성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의 길이다. ― 이성혁(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시란 생의 비밀을 풀기 위해 시도되는 기약 없는 여정이다. 그것은 어쩌면 한 줌 지혜를 구하기 위해 떠나야만 하는 저주받은 영혼의 하염없는 구도의 과정과도 같다. 끝내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깨우침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어쨌든 떠나야만 한다. 그 길 위에서 김옥성 시인은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그러한 선문답은 결국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담은 명상 내지 성찰일 텐데, 수수께끼와도 같은 그 과정 속에서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잔잔하게 흩뿌려져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리하여,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한번 떠나면 영원히 멈출 수 없는 그런 저주와 축복의 미로 속에서, 한 나그네가 마주쳐야 했던 내면의 자유로운 상념들일 것이다. ― 김유중(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 시집 속으로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김옥성
피처럼 노을이 퍼진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쌀 씻는 소리
밥 짓는 향기
화인(火印)처럼 이마가 불탄다
누군가의 육체로 연명하는
이 도시는 절대로 유령들에게 점령당하지 않는다
방금 전생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피 묻은 육체가
악몽이 열리는 나무처럼 펼쳐져 있다
저 죽은 육체는 왜
이승에 정박한 닻처럼 무거운 것일까
심장을 파헤쳐보니 너의 슬픔은 한 송이
영산홍이었다
마지막 울음을 뱉어낸 너는 더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후생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꽉 들어찼다
어쩌면 나는 그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는 내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는 수천수만 번의 생 동안 수천수만 번 자신을
살해한 자들을
도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아무도 알아선 안 되지
순항하는 목숨들은 없는 것일까
그러게 순항하는 슬픔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다
여기는 좌초한 목숨들이 흘러들어오는 곳
그는 빛바랜 일지에 오늘
도살된 육체의 이름을 기록한다
목숨이 갈라질 때마다 저절로 새어 나오는 비명의 기록은
생략한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