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욥8:8~10
8.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설교>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나님의 율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전통과 규범이 후손에게 가르쳐지고 전달되는 방식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신앙의 권위로 존재했던 것은 하나님의 율례가 아니라 조상의 전통과 규범이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례를 무시하고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조상의 전통과 규범을 곧 하나님의 율례로 여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상의 전통과 율례가 결국은 하나님의 율례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조상의 전통과 규범을 권위로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 사회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기독교도 조상의 전통과 규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의 형태와 규범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권위로 자리한 채 전통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다른 해석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전통을 권위로 내세워서 전통에서 벗어난 생각을 굴복시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본문에서도 빌닷이 자신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욥을 굴복시키기 위해 조상의 전통을 앞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상의 가르침이 이러하니 고집을 버리고 자신들의 말을 받아들이라는 취지였을 것입니다.
빌닷은 8절에서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는 말로 조상이 터득한 일, 즉 조상의 지혜를 언급합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생각하고 그 지혜로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입니다. 욥의 생각보다는 옛날 조상이 경험하고 배우고 깨닫게 된 지혜가 더 옳고 권위가 있지 않느냐는 취지인 것입니다.
9절의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조상의 지혜는 단기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쌓이고 그것이 진리로 굳어진 것입니다. 반면에 욥이 알고 있는 것은 조상이 터득한 일에 비하면 욥이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짧습니다. 또한 그림자가 해가 지면 사라지는 것처럼 욥이 세상에 있을 날도 그러하니 조상의 지혜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빌닷의 말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조상의 전통과 규범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당연하고도 옳은 충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빌닷과 함께 이스라엘이 이해하고 있는 조상의 지혜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 하는가입니다. 설사 일치 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이라면 조상의 지혜와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전통과 규범에 붙들려 있는 현대 교회도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지만 정작 주장하는 것이 전통과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욥에 대한 자신의 충고가 조상 대대로 가르쳐지고 전달되는 전통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욥으로 하여금 자기의 말을 따를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빌닷은 자신을 포함하여 친구들의 말이 조상의 지혜에서 어긋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욥이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닷이 욥의 상황을 조상의 지혜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처한 상황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회개에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스라엘 조상의 전통임과 동시에 인간 역사에 담겨 있는 종교의 전통이고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은 조상의 전통과 지혜로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재앙이 주어질 만큼의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욥의 생각이 조상의 지혜와 전통의 기주에서 어긋난 것이기에 빌닷과 다른 친구들도 욥이 틀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틀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은 조상의 지혜와 전통을 따르지 않는 불신앙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고 말합니다.
왕골이나 갈대가 비록 크게 자라기는 하지만 물 없는 곳에서는 자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지혜라고도 할 것이 없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빌닷은 이것을 조상이 터득한 일, 지혜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아무리 잘나고 열심이 있다 해도 하나님이 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없는데 있는 것은 다른 풀보다 일찍 말라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의 길도 다 그와 같다는 것이 빌닷이 말하는 조상의 지혜고 전통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지혜이고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빌닷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욥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욥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에 해당하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역시 욥이 처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재앙을 겪고 하나님을 잊지 않았기에 재앙을 겪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의 기독교 현실 또한 이러한 전통과 세상 지혜에 묻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빌닷의 사고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라는 뜻입니다.
잠 2:17,18절에 보면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의 집이 사망으로, 그 길이 스올로 기울어졌다는 것은 언약을 잊어버린 것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잊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잊지 않았는데 언약을 잊어버린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언약 자체가 곧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만약 빌닷이 언약을 잊지 않았다면 욥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을까요? 시 50:5절에서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라고 말씀한 것처럼 언약은 제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제사는 이스라엘의 죄를 제물로 인해서 책망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약을 잊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감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누구든 죄인 된 자신을 제물의 피로 인해 용서하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잊은 자일뿐입니다. 이것을 시 50:22절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언약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한다면 정작 하나님을 잊은 자는 빌닷입니다. 물론 욥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상이 자신은 재앙이 없다하여 욥과는 다르고 죄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르다고 생각한 빌닷에 더 가깝기에 언약을 잊은 빌닷에서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부터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이 20-22절에서는 욥에게 듣기에 좋은 말을 합니다. 위로해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말 그대로 듣기에 좋으라고 한 말일 뿐입니다. 이 또한 지금의 기독교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을 버리지 않고 붙들어 주시며 결국 웃음과 즐거움으로 채워주신다’는 기독교의 전통적이지만 공허한 말이 난무하는 현재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잊은 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조상의 전통과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 이끌려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임을 고백할 뿐이지 나의 잘됨을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이러한 믿음의 길로 가게 합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