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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레위기 24장 17-23절, 아모스서 5장 21-24절, 마태복음서 5장 38-42절
한 문 덕 목사
[4차 산업혁명과 교회]
지난 주 오후에 교육부서는 오래전부터 계획한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마당 행사를 하였고, 다른 교우들은 오후 집회로 서울북노회 신도부, 선교부, 교육부가 함께 주최한 “4차 산업혁명과 교회”라는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강사는 월곡교회 이혁배 목사님이셨는데, 독일에서 박사를 하시고 숭실대에서 가르치시는 교수답게 깔끔하게 정리된 강연이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비판이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과학기술의 혁명적 변화는 분명히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 주행 자동차, 빅 데이터, 3차원 프린트 등으로 대변되는 핵심기술은 분명 인간들의 삶을 지금보다도 훨씬 더 편리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 앞에 서서 “오늘 무얼 먹으면 좋을까?”라고 물으면 냉장고가 자기 안에 보관되어 있는 식재료를 살펴보고 추천메뉴와 레시피를 알려줍니다. TV는 주인의 취향에 맞게 영화나 드라마를 추천해 줄 것이고, 집에서 자동차 열쇠를 들고 나가면 주차장에 있던 차가 바로 현관 앞까지 자율주행을 통해 와서 주인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3차원 프린터를 사용하고, 사물인터넷을 도입하여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은 모든 기계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이런 공장을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라고 하는데, 스포츠 용품들을 만드는 기존의 아디다스 공장에서 연간 50만 켤레의 운동화를 만들어내려면 600명의 노동자가 필요한데, 스마트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10명이면 충분하고, 신발 한 켤레를 만드는데 그동안은 6주가 걸렸지만, 지금은 5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전기세탁기가 도입되어 17㎏의 빨랫감을 세탁하는 시간이 ‘4시간’에서 ‘41분’으로 단축된 것과 비슷합니다. 현대자동차도 이미 8,000개의 부품을 3차원 프린트로 만들고 있고, 그래서 비용의 80%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에 의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여러 가지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일자리가 크게 감소합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자리 감소의 수는 사무행정직에서 약 480만개, 제조업에서 약 160만개, 금융과 컴퓨터 관련분야에서 각각 40만개가 될 것으로 예측합니다. 의사나 변호사, 통역사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전반에 걸친 실업률이 더욱 더 높아질 것입니다. 새로운 신기술은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하겠지만, 이 새로운 일자리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가령 농업 기계화로 더 이상 농사를 질 수 없던 이들은 트랙터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고, 공장의 기계화로 실직했던 이들은 다른 서비스 직종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50년 로봇에게 밀려난 이들은 과연 드론 조종사나 정보 분석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면, 많은 중산층 노동자들이 기술적 실업을 당할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곧 소득의 양극화로 이어져 불평등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1%가 99%를 지배하는 세상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아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에 따라 적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이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사를ㅇ 좌지우지 하는 권위주의적 사회가 다시 도래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혁배 목사는 이런 부작용들을 대처하기 위해 교회가 할 일로 정부가 기본소득을 도입했을 때 그것을 적극 지지해 줄 것과, 핵심기술을 만들어내는데 교회가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소수가 기술을 독점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로봇에 세금을 매기자는 제안을 하였고,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와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라는 책으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는 책에서 그동안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했던 양육이라든가 시민 공동체의 조직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새로운 일자리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보호하겠다는 새로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각 계 각층에서 4차 산업이 몰고 올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교회도 이런 사회의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도 이 변화를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실직이 많아지면 교회의 운영 자체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실업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생존의 밑바닥을 흔드는 문제입니다. 급격한 사회변화는 또한 우리의 마음을 휘저을 것입니다. 허무와 불안이 늘어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 또한 헝클어지기 쉽습니다. 교회는 이런 닥쳐올 위기 상황을 내다보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아모스가 외치는 공의>
1세기 갈릴리도 로마와 헤롯이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매우 살기 좋았던 갈릴리는 로마가 점령하고, 또 괴뢰 정부인 헤롯 정권이 들어서면서 점점 살기 어려운 땅이 됩니다. 로마에게 잘 보이려는 헤롯의 무리한 헬라식 건축으로 갈릴리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2중 3중의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작농들은 점점 가난하게 되어 땅을 팔아야 했습니다. 일자리를 잃어 날품팔이로 살아야 했고, 남에게 빚을 지는 일들이 잦아졌습니다. 생계가 어려워지고 빚마저 갚지 못하면 이제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같은 마을에서 형제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빚더미에 앉게 되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그렇게 갈릴리 마을은 급격하게 쇠락해 갔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경제 환경의 변화가 우리의 생계를 오히려 위협하지만 예수님 시대는 정치환경의 변화가 갈릴리 주민들의 삶을 위협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일종의 마을 살리기였고, 예수님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사람대우 받지 못하며 곤궁에 빠진 이들과 함께 살기 운동을 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아모스 예언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던 시대도 비슷했습니다. 법정에서는 시비를 올바로 가리지 못하고,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며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일이 빈번했고, 신 한 켤레 값을 받고 빈민을 팔았으며, 폭력과 강탈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창고에 가득 쌓아 놓고, 가난한 백성들이 죽건 말건 지도자들은 겨울 별장, 여름 별장을 지어 놓고 흥청망청 즐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시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데, 소수의 엄청난 부자들과 기득권들은 상아 침대에 누워 양 떼에서 골라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맛좋은 송아지만을 골라 잔치를 열며, 다윗이나 된 듯 악기를 타며 흥얼거리고,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까요?
오늘 우리나라도 상위 10%가 전체 부의 45%를 가지고 있고, 많은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편의점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데, 교회가 3000억원이나 들여 건물을 짓고, 비자금으로 천억원 이상 모아 두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까요?
“나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모이는 부흥회가 싫다. 추수감사절 행사들이 역겹다. 새벽기도니 철야기도니 하면서 나를 찾아도 나는 그것이 싫어 얼굴을 돌린다. 너희들이 바치는 거룩한 예물이라고 하는 것들도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다. 교회를 크게 지어 바친다 하더라도 나는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손을 들고 거룩한 체 하며 부르는 찬양의 노래를 집어치워라. 오케스트라 대동하고, 전문 연주가들 불러 오지만 모두 귀찮다.”
아모스 예언자는 예배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모스서의 말씀은 이제 21세기에,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는 시기에 교회가 진정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사회, 바른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공의가 물같이, 정의가 강처럼>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이 되면 생각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욱하는 감정으로 상대를 대합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리고, 두 대 맞으면 서너 대로 복수를 합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한 번 상한 감정은 매우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억울함과 분노, 서운함과 모욕감, 수치심들만이 작동하면 물불을 가리기 쉽지 않습니다. 인류는 오래도록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개인의 복수는 집단 간의 갈등과 전쟁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들 또한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레위기의 말씀은 짐승 같이 살던 시절 한 걸음 더 인간답게 되려는 노력의 한 산물입니다. 이 율법의 핵심 중에 하나는 절대 생명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율법은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모든 풍조에 대한 강력한 비판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인류 전체가 모두 지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0절에는 우리가 자주 들었던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매우 원시적이고 과격한 것처럼 들리지만 이 율법은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감정에 의해 폭력이 확대되면서 악순환하는 것을 방지합니다. 눈을 다치게 했다면 상대편도 눈만을 다치게 해야지 눈에다가 코나 귀까지 더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에는 숨겨진 더 중요한 속뜻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이나 이를 다치게 해 놓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눈을 다치게 하거나 이를 상하게 하는 경우가 보통 언제 발생할까요? 물론 보통 사람들이 화가 나서 치고 박고 싸움을 할 때도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눈을 눈으로 갚으라는 말이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고대에 누군가의 눈이나 이를 다치게 하는 일은 보통 주인과 종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일을 게을리 하거나 잘못한다고 주인이 종을 체벌하였기 때문입니다. 종의 실수로 주인의 재산이 손실을 입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주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마구 폭력을 행하면 노예는 눈을 상하거나 이가 부러지는 등 매우 심각한 상해를 입게 됩니다. 주인과 종이 있던 시절, 주인이 종에게 체벌을 하더라도 정확한 규칙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해야지 화가 나는 대로 맘대로 종을 때렸다가는 주인도 동일한 방식으로 혼이 날 줄 알라는 계명입니다. 또한 남을 불구로 만들어 놓고 돈으로 해결하는 고대 근동의 제국의 법에 맞서, 종을 불구로 만들었다면 주인도 그렇게 될 줄 알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갑질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자기와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특히 우리의 말이 존댓말과 반말을 가지고 있어서 더합니다. 저는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고는 거의 존댓말을 합니다. 처음 본 사람에게는 절대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나이 들었다고, 자신은 고객이라고 하면서 나이 어린 종업원들에게 다짜고짜 반말 하는 사람들이 많고, 갑질을 하면서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똑같이 그렇게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식당에 가면 홀 서비스 하는 직원이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여 주문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이것도 매우 불편합니다. 꼭 그렇게까지 주문을 받아야 할까요? 앞으로 소득불균형에 의한 사회적 지위의 양극화가 발생하면 이렇게 비인간적인 모습들이 더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적인 복수를 율법에 따른 사법적인 처벌로 바꾸었고, 발생한 피해만큼만 동일한 수준에서 보복하도록 함으로써 상호 피해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고, 동일한 신체형을 부과함으로써 살인과 상해를 미리 방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벌어진 폭력에 똑같은 폭력으로 되갚아 주는 것을 정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저항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악을 악으로,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굴복이 아니라 비폭력저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대해서는 작년 7월 2일 설교에서 자세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모두 더 적극적인 선으로 악을 이겨내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는 너를 모욕하고 무시하고 폭력으로 대하지만, 오히려 너는 선으로, 친절함으로, 양심으로, 인간다움으로 저항하고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 속옷을 빼앗긴 사람, 억지로 오리를 가야하는 사람은 모두 가진 것 없는 약자입니다.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극빈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무엇을 주어야 하는 걸까요? 바로 그것은 올바름입니다. 선한 양심입니다. 인간적 자존감입니다. 높은 도덕성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열정입니다.
직장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우리네 삶에는 빈부귀천이 있기 마련입니다. 직장에서는 직위가 다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상사는 명령하고 아랫사람은 복종합니다. 가진 사람은 많은 것을 쌓아놓지만 없는 사람은 그 날 쓸 것도 부족합니다. 그런 삶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다보면 무시당하고, 억울하고, 모욕감을 느끼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때에 가진 것이 없어도, 낮은 직위에 있다 하여도 우리는 인간다움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참된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가, 어떤 자세와 태도와 정신을 지니고 사는가는 다 드러낼 수 있고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보여 주고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과 금은 없지만 우리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진리를 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보다 먼저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양심과 창조적 자유를 내어 줄 수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여 인간이 하는 많은 일들을 로봇이나 인공지능, 기계들이 대체하면 인간은 다시 한 번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서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로봇과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로봇은 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앞으로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처럼 창조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 존재합니다. 이 둘은 아직 인공지능이나 로봇에게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앞으로 이런 가치들이 더욱 소중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고 가난한 교회이지만, 우리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좋은 뜻을 품는다면, 대형교회가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깊은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는 제 안에 짠 맛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으로 어둠을 빨아들입니다. 즉 빛은 모든 악을 자신 안에서 선으로 바꿔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깊은 신앙의 차원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함석헌 선생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길 하나를 제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독재정권이 칼날을 마구 휘두르던 엄혹한 시절, 함석헌 선생은 4.19 의거 10주년을 맞아 독재정권의 칼에 맞서 싸울 붓을 듭니다. <씨ᄋᆞᆯ의 소리>라는 잡지가 창간된 것입니다. 그리고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하여 8명이 처형되고, 긴급조치 9호가 발동하고, 장준하 선생이 죽임을 당하는 등 독재정권이 절정에 달하던 1976년 1,2월호 <씨알의 소리>(통권 50호) 뒷면에 “우리가 내세우는 것”이라는 함석헌 사상의 기본원리가 되는 8개의 명제를 싣습니다.
ㅇ 씨ᄋᆞᆯ의 소리는 순수하게 씨알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기 교육의 기구입니다.
ㅇ 씨ᄋᆞᆯ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ㅇ 씨ᄋᆞᆯ의 소리는 어떤 종교ㆍ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ㅇ 씨ᄋᆞᆯ의 소리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ㅇ 씨ᄋᆞᆯ은 어떤 형태의 권력 숭배도 반대합니다.
ㅇ 씨ᄋᆞᆯ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ㅇ 씨ᄋᆞᆯ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 나가려고 힘씁니다.
ㅇ 씨ᄋᆞᆯ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래로 삼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들 중 씨ᄋᆞᆯ의 소리는 생명사랑교회의 소리로, 씨ᄋᆞᆯ은 여러분 자신으로 생각하시고, 두고 두고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생명사랑교회 교인이지만, 그 전에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 전에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인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참으로 멋지게 살고 싶다면 오늘 주신 말씀들을 깊이 묵상하시고, 그대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 땅에 강처럼 흐를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새 시대를 열어가는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한 모험에 나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뢰 속에서 자신의 속사람을 알차게 만드는 일에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내일부터 3박 4일간 교단 총회가 열립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총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신의 뜻에 알맞게 회복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지난 세월을 지켜 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서 성장하도록 허락하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급속한 사회 변화 속에서도 든든한 바위가 되어 주시고, 생명의 말씀에 깊게 뿌리내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당신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명령을 지켜 행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 주소서. 우리가 오늘 거룩한 주님 앞에 나올 때 우리의 마음과 삶과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결실들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우리의 예물을 받아 주소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께 정성껏 예물을 드리오니, 받으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하늘 시민으로 살려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참된 평화와 지혜를 내려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역인 생명, 평화, 정의가 이뤄지게 하시고, 우리가 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기숭배와 맘몬숭배의 우상을 걷어 버리고,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흘러넘치는 세상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을 참된 뜻을 받들어 오롯이 그 길 따라 가려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