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銀行)의 사전적 의미는 고객들로부터 돈을 받아 그 돈을 자금으로 하여 대출 및 어음 거래 등을 업무로 하는 금융 기관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은행에 대한 개념이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변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류의 미래와 안전을 보관하는 다양하고 기발한 개념의 과학관련 은행들이 등장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최후의 날을 대비하기 위해 30만점의 종자가 보관된 종자은행 ‘시드볼트’ ⓒ 백두대간수목원
무형의 기술과 유형의 종자를 저장하는 은행 등장
과학과 관련한 국내 은행들 중 대표적 사례로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운영하는 ‘기술은행’을 꼽을 수 있다. 정식 명칭은 ‘국립기술은행(NTB, National Tech-Bank)’으로서 국가의 자산으로 등록돼 있는 기술들을 민간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관이다.
NTB도 은행인만큼 기술을 보관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다만 기술이 무형의 자산이다 보니 금고 같은 곳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DB를 구축하고 분류하는 일을 한다. 물론 기술을 구축하고 분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기술이전설명회를 통해 기술을 소개하고 이전과 관련한 상담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시중 은행이 새로운 금융상품을 출시했을 때 다양한 홍보와 마케팅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비슷하다. NTB도 보유하고 있는 기술을 판매기술, 나눔기술, 기부채납기술, 신탁기술 등으로 구분해 필요로 하는 곳에 제공하는 것이다.
NTB가 무형의 기술을 관리하고 보급하려는 은행이라면, 시드볼트(Seed Vault)는 유형의 종자를 보관해 인류의 생존이 지속가능하도록 돕는 일을 하는 한국형 종자은행이다.
국립기술은행의 홈페이지 초기 화면 ⓒ 산업기술진흥원
시드볼트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은행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지어진 종자은행이다. 경북 봉화군에 위치한 국립백두대간 수목원 내에 자리잡고 있다. 지하 40m 땅속에 터널을 파서 만들어 연중 영하 20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종자 보관소로는 최적의 환경을 자랑한다.
이 곳에는 현재 30만점이 넘는 종자들이 보관돼 있다. 이에 대해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관계자는 “미래 식량 확보는 물론 온난화나 환경오염 때문에 사라져가는 식물 종자를 보존해 산림유전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밝혔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사람의 뇌와 관련한 은행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뇌은행’이라 부르는 ‘한국뇌은행네트워크’다.
이는 알츠하이머 치매, 자폐증, 간질 같은 다양한 뇌 질환을 앓는 환자와 가족으로부터 뇌조직의 일부를 기증받아 보존한 뒤 이를 필요로 하는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기관을 말한다. 한국뇌연구원과 대학병원들이 주체가 돼 사람의 뇌조직을 수집하고 보관하며 분양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뇌은행은 꼭 네트워크가 구성돼야 한다. 기증자가 사망하게 되면 곧바로 뇌를 부검해 조직의 일부를 보관해야 하는데 이 때 여러 병원과의 연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각 대학병원들의 뇌은행에서 보관하는 조직들의 정보를 공유하면, 필요한 연구자에게 안성맞춤으로 조직과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핵 확산 위험을 줄이는 우라늄 은행도 최근 설립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해외에는 핵무기의 원료를 저장하는 은행도 있다. 지난해 카자흐스탄에서 문을 연 저농축우라늄(LEU) 은행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전 세계의 핵 확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설립했다.
LEU 은행은 최대 90톤의 저농축우라늄을 저장할 수 할 수 있다. 이는 대도시 한 곳에 3년간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IAEA의 발표에 따르면 LEU 은행은 저농축우라늄을 사들여 저장하고 이를 다시 회원국들에게 판매해 기관을 운영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IAEA 관계자는 “LEU 은행이 있으면 예상치 못한 우라늄 공급 중단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안심이다. 또 별도의 우라늄 농축시설이 없어도 상관없다”라고 전하며 “은행이 본격적으로 운영되면 저농축우라늄이 핵무기로 전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노르웨이에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기록은행이 존재한다. 정식 명칭이 ‘북극세계기록보관소(Arctic World Archive)’인 이 기록은행에는 각국의 헌법에서부터 고전문학과 논문, 그리고 최신 저널까지 인류가 창출한 모든 정보가 보관돼 있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관하고 있는 북극세계기록보관소 ⓒ wikipedia
물론 텍스트로 이뤄진 기록물외에 사진 및 영상물 등도 보관 중이다. 이들 기록은 은행의 운영을 맡은 피클(Piql)社가 개발한 ‘영구 기록보관 기술’을 이용해 모든 데이터를 QR코드 형태로 변환한 다음 보관소에 저장된다.
피클(Piql)社의 발표에 따르면 기록은행의 경우 최소 500년에서 최대 1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데이터를 보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관을 의뢰할 수 있는 대상은 국가나 기업이 우선이지만 개인의 데이터도 여건에 따라 받고 있다는 것이 운영사 측의 설명이다.
한편 싱가포르에는 여성들의 기부로 운영되는 ‘모유은행’이 최근 설립됐다. 모유은행은 여러 산모들이 기부한 모유를 신생아에게 충분한 모유를 줄 수 없는 엄마가 공급받는 시스템을 말한다.
물론 기부받은 모유들은 신생아에게 공급되는 만큼 전염성 있는 질병들의 감염 여부를 철저하게 검사한 다음 제공된다.
이에 대해 모유은행의 관계자는 “미숙아에게 모유는 매우 중요하다”라고 강조하며 “하지만 미숙아를 출산한 엄마는 충분한 모유를 만들어내는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이 기간을 모유은행이 대신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