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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샬 롬
계시록으로 본 교회개혁 (계 1:9-16)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에 대해서 저자는 수신자와 이질적인 삶이 아니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았다. 나이 많은 요한도 사형선고를 받고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니 살아남게 된 일을 말한다. 환난은 천년왕국 마지막에 있는 고통을 내포하며 나라는 메시야적 축복이라는 미래의 기간을 말한다. 주의 날은 장차 올 재림의 날로 환상 중에 이끌려 간 요한은 그 후의 경험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초대교회로부터 지켜온 성일인 매주 첫째 날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첫날은 우리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인자 같은 이란 그리스도의 인성을 영광스럽게 표현한 말이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에스겔 다니엘 등에 사용되었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고난 죽음 승천 재림 등에만 인자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땅에서 하늘의 왕으로 사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인자는 천사와 같은 존재를 묵시문학에서 표현하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좌우에 날선검이란 말씀으로 만국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심령 골수를 쪼갬과 같이 사실과 법리를 갈라내며 죄를 날카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양면의 칼은 율법과 복음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메시야의 심판권을 가리킨다. 저항할 수 없는 거룩한 심판의 능력을 말한다. 네 본 것과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에 대해서 네 본 것은 요한이 목격한 1장을 이제 있는 일은 일곱교회에 관한 2-3장을 장차 될 일은 미래에 전개될 계시인 4-22장을 말한다. 요한 당시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까지의 연대표를 예표하는 것이다. 19절은 계시록의 내용이 과거 현재 미래의 계시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등이 있습니다.
복음으로는 ‘온전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자기 계시>
본문은 밧모섬에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계시가 주어지면서 나타나셨고 아시아 일곱 교회를 특정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신앙훈련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하게 하실 능력을 갖추셨고 그 손길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훈련의 중요성>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와 바벨론에서 훈련하셨는데, 훈련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훈련을 받았어도 제대로 그리고 많이 받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훈련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순종한다면 영광스러운 구원의 온전함을 누리며 나아가 성령님과 동역하는 이 시대 귀한 일군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좁은 의미에서는 사역자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입니다.
<10가지의 훈련>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 10가지입니다. 숫자로 본다면 10은 전부를 의미하는 만수로 온전히 주님을 닮으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나타나신 주님의 독특한 모습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원하시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도록 온전히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본격적인 제자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훈련 목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교>
앞에서 다룬 본문을 교회개혁의 관점에서 다룬 설교입니다. 이 시간에 “계시록으로 본 교회개혁”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회개혁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개혁은 대단히 절실하고 좋은 일이지만 교회개혁은 영적인 부분이 많기에 말씀과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에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예로 남쪽 유다의 예언적인 개혁자 요시야가 유다는 물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죄까지 개혁했지만 길게 가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개혁일 뿐 백성들의 영적부흥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주님은 이 땅에 새로운 부흥을 일으킬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개혁은 본문의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오직 예수교회로 개혁하는 것입니다.
12-13절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라 했습니다. 아시는 대로 촛대는 교회요, 금은 신성이나 믿음입니다. 그리고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신령한 교회가 교회개혁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이 현대교회를 보실 때 ‘이 교회는 나의 교회가 아니야.’ 하신다면 슬픈 일입니다.
"인자 같은 이", 인자는 육체를 입고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를 일컬으시던 명칭입니다. 이처럼 참 교회는 죄인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 함께 하신 교회입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직 그 예수, 다른 예수여서는 안 됩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한국에는 자칭 예수가 많고, 한국교회에도 다른 종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세례서약처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뿐이신 줄 알고 그를 믿으며 의지한다.”는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개혁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요 핵심입니다.
2. 보혈로서 개혁해야 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모습은 13절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셨는데 이 모습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을 나타냅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죄를 덮으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보혈의 공로를 모르고 사탄의 결박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의 죄를 다 덮었다. 보혈로서 양심의 자유함을 얻으라’ 하시는 메시지입니다.
한국교회의 시급한 문제가 보혈신앙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보혈을 노래하면서도 양심의 평안을 모르고 정죄감에 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도 영이 눌려 설교가 나오지 않고 경건하다는 사람들일수록 사탄의 결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천사들의 보고가 올라갑니다. ‘하나님, 지상의 성도들이 모두 결박당해 있습니다. 사탄이가 성도들을 거짓으로 결박시켜 놓고 지금 지옥의 참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계12:10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했어요. 그 덫에 걸렸습니다.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도 이신득의를 누릴 만큼 명확하게 찝어서 가르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누리는 사람은 더욱 드믑니다. 한 마디로 복음을 잘 모릅니다.
롬5:1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8:1-2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8:11), 롬8:33-34에도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했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요, 이신득의를 부정하는 자들과 싸울 만큼 주장하면서도 누리지를 못하는 원인이 뭘까요? 적용 부분에서 서툴러 결박을 당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개한 후에만 보혈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느라 보혈을 믿을 새가 없습니다. 보혈을 제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기 전에도 회개하면서도 회개한 후에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탄의 참소를 회개의 심정으로 착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을 믿고, 이 모습 이대로, 예수 이름으로, 이신득의의 믿음으로, 보혈의 공로로, 담대하게,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약간은 뻔뻔한 듯하면서도 밝고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보좌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지만 주님은 죄를 덮으십니다. 이 결박이 풀리는 날 한국교회는 그 영성으로 온 세계를 뒤덮고 말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모습은 13절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모습은 왕의 모습입니다(단10:5-6). 가슴은 마음의 중심이요, 띠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금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의 금띠는 예수를 주로 삼고 절대 충성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정권에 복종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나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목회자로서 양무리를 목회하고 가르치는 장로로서 배나 존경할 자이고 당회장으로서 교회를 대표하는 정치적 수반이지만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혹은 교회가 회합하는 등 민주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교인들이 주인이 아닙니다. 장로교회라고 하여 장로들이 주인이란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장로는 오늘날 목사에 해당하고 현재의 장로는 칼빈에 의해 시작된 대의원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헌법에 의하면 당회의 구성원이 되어 목사를 돕는 직책입니다. 공로가 있고 헌금을 많이 했다고 주인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의 논리대로 힘 있는 자가 왕노릇한다면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성경을 중심으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명령하신 것을 위하여 각자의 직무에 맡게 교회의 질서 가운데 충성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일군을 선정하거나(행1:20) 모든 일을 할 때(행1:8) 항상 주님의 말씀과 성경에 근거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경우 선교사역에 구체적인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금식하며 기도하므로 응답을 받고 실시했습니다(행13:2). 일곱 집사들도 밖으로 나가 민간에 표적을 행하거나 핍박을 당하여 공회에서 증언하였지 예루살렘 교회의 일은 사도들에게 맡기고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역시 여러 사도들이 있었지만 베드로가 그 중심점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교회가 목사의 교회는 아니지만 주님이 교회를 맡기셨다는 점에서 행정의 수반으로서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회계담당자나 힘 있는 교인들이 재정과 정치를 주도한다면 어떻게 목회 계획을 세우면서 교회를 이끌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벧전5:5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했습니다. 주님을 교회의 주인과 왕으로 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질서 가운데 주의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4. 복음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의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머리털만 아니라 머리까지도 흰 양털과 눈 같았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신 것은 우리의 지식과 의식과 사상까지도 온전히 새로워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복음의 새 시대가 왔으니 복음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고후5:17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말도 바뀌고 자화상과 타화상까지도 바뀌어야 합니다. 육신적 선입견도 버려야 합니다. 성도를 볼 때도 예수 안의 복 있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 예수 안의 새 사람, 성령이 임하면 아름답고 귀하고 크게 쓸 사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고 귀하게 여기고 날마다 사랑하고 축복하면 좋은 성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만 가져도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날마다 거울 앞에서 복음적 자화상을 훈련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대중 전도자인 캐드린 쿨만처럼 담대하게 회중을 위하여 기도하고 명령한 결과 주님이 더불어 역사하시는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에 설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역시 복음적인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없고 비판만 하는 싸늘한 율법적인 교회여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아닌 사람을 위한 기복적인 교회도 안 됩니다.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 교회도 안 됩니다. 이방종교나 세속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속화시키는 세속적인 교회도 안 됩니다. 천주교와 교리와 직제를 일치하려는 혼합주의도 안 됩니다. 이런 연합은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배도와 같습니다.
나아가 교회의 울타리인 나라를 사랑하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행1:6-7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하셨는데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 알 바가 아니란 뜻이지 나라에 무관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했습니다(딤전2:1-2). 종교의 자유가 마음껏 보장되는 복음적인 나라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교인들을 나라의 일군으로 세워 복음화된 나라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5. 거룩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4절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본질과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이 불꽃 같은 눈앞에 어떤 죄도 다 드러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죄를 행하고 있다면 알려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영적 상담도 필요합니다. 성도는 보혈로서 양심의 자유를 누리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는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약4:8-10).
한편 예수님의 이 모습은 교회의 세속화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강단의 세속화, 교회정치나 행정의 세속화, 신앙의 세속화, 사역의 세속화, 방법의 세속화, 돈 받고 판결하고, 돈문제, 윤리문제 등등, 찬송도 복음송도 더 거룩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신앙을 고취하는 찬송이 아닌 육신의 흥만 돋구는 찬송이어서는 안 됩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의 포로들이 슬펐던 것은 압제자들이 자기들의 흥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를 하도록 했을 때였습니다(시37:2-5).
6. 훈련하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5절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발은 심판의 발입니다. 풀무불에 단련했으니 연단시키는 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빛난 발이니 변화시키는 발이요, 주석 같은 발이니 강한 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거하면 지근지근 밟아버립니다. 마21:44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나를 깨뜨림에서 출발합니다. 자아처리란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과 권위에 항거하려는 자아를 깨뜨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교회 역시 이런 사역을 하기를 바라심입니다. 교회마다 나를 못 죽인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왜 이리 소란합니까? 왜 다들 잘났습니까? 말 없이 주님을 따르는 자가 왜 이렇게 적습니까? 은혜를 받지 못해서도 그렇지만 참다운 제자훈련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계17:14). 제자란 나를 내려놓고 주님과 그 말씀을 배우는 복사판이 되기를 희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자기를 죽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고 목을 매어 죽은 것은 사탄이 넣어준 생각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나 말씀하시고 유다가 희망하는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를 팔아 곤경에 빠뜨리면 전능하신 예수께서 드디어 메시야적 왕권을 발동하사 무슨 일을 하실 것으로 생각했다는 유도설을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육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한 결과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을 통해서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아처리훈련을 실시하여 주님의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 아래서 온전히 부서지고 깨어지기를 바랍니다.
7. 풍성한 강단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5절 하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많은 물소리는 풍성하고 불가항력적인 말씀입니다. 이 모습은 교회가 말씀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영양가 없고 부실한 메시지 때문에 예수님께서 진절머리가 나시면 안 됩니다. 양떼들을 풍성한 꼴로 인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면서 기도 많이 하고 발음도 분명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설교학과 음향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양 떼를 지킬 수 있으므로 영분별도 잘해야 합니다.
어느 분이 누가 골프 치자는 걸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다들 재미있다고 하는데 설교보다 더 재미있으면 설교 못하기 때문에 아예 맛을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없게 해주세요.' 기도한다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성경해석과 설교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8. 쓰임 받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6절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별은 주의 종들이요, 예수님의 오른손은 능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팔에 붙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쓰임 받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 뜻을 앞세우거나 성령을 부리는 자세로는 연단만 길어집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손에 붙들립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의 기도로 옥에 갇힌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말씀을 전할 수 있었듯이 성도들이 기도부대가 되어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권능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었듯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행20:20-21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 했다고 했듯이 주님이 주신 말씀이라면 다가올 핍박을 두려워 말고 목이 끊어져도 전해야 합니다. 사역자가 안정을 추구하고 생활을 걱정하면 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담대함을 실상은 교인들이 더 좋아하고 따르며 그 카리스마 앞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9. 진리를 지키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6절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날선 검은 계2:16에 니골라당을 허용하지 말라고 하실 때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 모습은 이단과 이설을 분별하고 대적하라는 교훈도 되지만, 우리를 향하여 성경을 더 밝히 깨닫고 교리적으로도 더 완전해지라는 교훈도 됩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정확히 제시하는 천국 길의 안내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득의를 알지 못해 심지어 칭의는 예수로 받고 변화는 이방종교식으로 받으려는 웃지 못할 일도 생겼습니다. 예수 안에 선택도 칭의도 성화도 영광도 다 들어 있고 이것 역시 믿음으로 받는 그 비밀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유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정통신앙을 파수한다는 보수주의도 얼마나 빗나갔는지 성령을 믿지만 은사는 부정하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어느 신약학 교수가 기도하다 방언을 체험하고 그동안 신학생들에게 잘못 가르쳤음을 사과하고 확신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천국간증을 하러 다니십니다. 어떤 사람이 무당식 은사운동을 하다가 잘못됨을 깨닫고 돌아섰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보니까 이번에는 은사부정으로 돌아섰어요. 교인들이 무슨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식입니다.
계시록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계시록을 좋아해서 많이 읽으시고 출판된 책 만해도 셀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역사의 종말과 세속사의 전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계시록이 성경인데 구속사이지 어찌 세속사입니까? 계시록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인재앙은 어린 양 예수로 성경이 열리는 과정입니다. 이어지는 나팔재앙은 성경이 열렸으니 이제는 전파되는 복음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 것입니다. 대접재앙은 대접이 고난이듯 고난 중에 연단을 받아 완전해지는 성령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더욱 성숙시킬 예리한 검을 가진 자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0. 해처럼 밝게 개혁되시기를 바랍니다.
16절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예수님의 얼굴이 해여야 맞는데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뭔가 이상하죠? 그러나 이 모습은 바로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밝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악하여 웃을 일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해처럼 밝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없어 어둡게 사는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그래서 살전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시면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을 받은 나의 자녀들아, 더 밝게 살아라.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살아라. 늙었다고 슬퍼하지 말고 천국 갈 날이 더 가깝다고 기뻐하여라.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밤에도 기도하고 주무시고,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해처럼 빛나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기 전에 이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행6:15). 그랬기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원수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행복을 보고 주 앞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개혁자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교회 역시 개혁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개혁교회란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성경에 근거하여 더 나음을 위해 끊임없이 발전해 가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개혁될 때 성도들도 개혁되고 세상도 개혁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시아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우리를 향한 간절하신 그 모습처럼 말씀과 기도로 내가 개혁되고 교회가 개혁되고 모두가 개혁되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는 귀한 일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