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6막50장 (2부-2)
나주이모는 인상이 호적하고 편안하며 상대방을 편하게 하는 부처님 상을 지니신 스님과 같이 사셨다.
나이는 60대 중반은 되여 보여 나랑은 10년 차이가 났었고, 항시 우리 가족을 위해 법당에 우리 가족의 등불을 밣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 주셨다.
둥근 얼굴에 두툽한 입술에 미소가 드리우면 나도 모르게 스님의 얼굴에서 행복감을 한없이 받곤 하였다.
지금은 암자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그당시에는 네비에도 암자가 나와 찾아가기가 편리하였다.
그암자는 나주시내에서 10분 거리의 드넓은 들판이 한없이 펼쳐보이는 한적한 야산의 암자에 살고 계셨다.
2차선 도로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200m
따라 가다보면 끝자락에 다소곳이 보이는 절이 바로 이모님이 스님과 기거하는 곳이였다.
불상을 모시는 불당과 이모님과 스님이 동고동락하는 단층짜리 기와집이 있었다.
조그마한 거실과 단출한 방2개와 음식을 요리하는 부엌간이 뒷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해우소는 마당 한켠에 있어 약간은 불편하였으나
이모님은 전혀 개의치 않는것 같았다.
이모님은 상냥하고 자상하셨고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소유하셨다.
음식솜씨가 유별나셔 이모님이 끓여주신 오리참깨백숙은 절대 별미 였다.
그리고 어느날은 "후"와 아내와 나를 위해 저녁초대를 하셨다.
풍천민물장어를 한관을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저녁나절 어눅해진 하늘아래 오색 별빛이 빛나고 달빛이 우리를 비춰줄때 스님과 이모님과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즐겁게 만찬을 즐긴것이 지금도 아른 거린다.
너무나 평안한 스님의 보살핌에 나는 몸둘빠를 몰랐고, 거나하게 주고받은 술잔에 나는 호남의 공기를 한없이 마셔 보았다.
오늘따라 그때가 그리운 것은 왜이뇨?
※ 그 이유는 다음편에서 말씀 드리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