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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0편 8절-15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8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법은 하늘의 법이요, 하늘의 뜻이요, 천국백성의 법이요, 신령한 법이요, 영의 법으로서 이 법이 자기 마음에 있는 사람은 이 법대로 하늘나라의 일을 땅에서 한다. 반면에 땅의 법이 심중에 있는 사람은 땅의 생각을 가지고 땅의 일을 하게 된다. 땅의 생각과 땅의 일은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부귀와 명예와 영화를 누리며 잘 살다가 가는 거다. 땅의 법은 이게 아니면 없다. 주님의 뜻은 이런 게 아니다.
주님의 뜻을 즐기는 다윗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는 일, 그리고 그 일에 수종드는 일을 한다.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요, 하나님 보시기에도 영원히 선한 일이다. 사람 만들어지는 일에 수종드는 것이 참 아름다운 일이다. 선한 일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 마음중심에 주님의 법이 있다고 보는 거다. 반대로 자기의 마음중심에 주님의 법이 없는 자들은 자기의 세상적인 뜻을 펼치기 위해서 교회적으로 보면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성경구절을 인용할 때 그 성경구절을 어디에 목적을 두고 인용하는지를 잘 봐야 한다. 충성봉사 종교사업에 성경구절을 인용하느냐,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그 일에 성경구절을 인용을 하느냐?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할지라도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하나는 육의 일이 되고, 하나는 영의 일이 되는 거다. 이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9절: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회’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고, 이 모임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는 거다. 다윗이 이렇게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자신이 죄에 빠졌을 때 영을 위한 다윗의 기도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건져주셨고, 이 들어주심은 육 목적으로 들어준 것은 아니라 영을 위한 다윗의 기도소리를 듣고 건져주신 것이고, 또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자기가 죄에 빠졌을 때 여기에서 건져서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역사를 체험을 했는데도, 자기의 신앙 양심적으로 생각할 때 자기에게 행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의 역사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람이 무서워서, 육신의 것이 손해가 날까봐, 가난해질까봐, 목 떨어질까봐, 왕따 당할까봐, 겁이 나서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 인격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다 숨기고 종교의식만 지키고, 시간 땜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다윗은 자기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의의 역사를 항상 말을 한다는 거다. 말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겠다는 거다.
말을 거의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있느냐? 말을 안 하고 있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면 이상한 말이 툭툭 튀어나오게 된다. 자기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다른 사람보다 주로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지? 말을 너무 안 하는 사람도 있고,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는 어느 쪽에 속하느냐?
사람이 말을 너무 많이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말을 하는 것은 자기 주위에 누군가 있기 때문인데,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면 듣는 사람이 좋아하겠느냐, 짜증을 내겠느냐? 말이 너무 많으면 쓸 만한 말이 없다. 또 말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자랑이 많다. 그리고 자기가 다 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속은 없다. 그런가 하면 말은 잘 안 하는데 일을 잘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말은 잘 안 해도 한 번 했다 하면 쓸 말만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말에 실수가 많게 되고 듣는 사람이 피곤하다. 그리고 말을 너무 안 하면 사람이 재미가 없다. 말을 너무 많이 해도 어느 때 가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고, 말을 너무 안 해도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이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맛있는 것을 자기들끼리 다 먹어버리지 않느냐? 어쨌든 쓸 말만 하고 할 말만 하되 적당한 게 좋다. 그리고 자기 속에 들어있는 의사를 표시할 줄 알아야 하고, 아울러 남의 의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라고 사람에게 귀와 입이 있는 거다.
그리고 자기 말만 너무 고집하게 되면 이 사람 옆에는 사람이 붙기가 힘들다. 반대로 말을 너무 안 해도 사람이 붙지를 않는다. 재미가 없다. 먼 길을 가는데 서로가 대화가 있으면 언제 도착한지도 모르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을 한다. 어쨌든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적절하게 지혜롭게 말을 하는 게 참 좋다. 부부 간에 말을 너무 안 하면 사는 게 아무 재미가 없다. 그런데 한 쪽이 너무 시끄럽게 하면 다른 쪽이 도망을 가는 수가 있다. ‘떠드는 여자와 함께 사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게 낫다.’ 누가 이 말을 했느냐? 솔로몬이다. 아마 솔로몬이 여자에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방 세상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는데, 주로 무슨 말을 하느냐? 사업얘기, 세상생활 얘기, 놀았던 얘기, 나이 많은 사람은 젊었을 때의 얘기, 기쁘고 슬펐던 얘기, 싸움을 한 얘기, 남을 저주하는 얘기, 들은 얘기, 본 얘기, 느낀 얘기 등등의 말을 한다. 어쨌든 사람은 눈만 뜨면 말이다. 그런데 눈을 떠서 잠잘 때까지 하루 온 종일 한 마디도 안 하는 사람이 있느냐? 자기가 누구와 싸워서 성질이 났을 때 그 날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러면 누구만 손해냐? 여기 있는 분 중에 부부싸움을 한 후에 그 마음이 오그라져서 제일 오래 말을 안 한 날이 며칠이나 갔느냐? 먼저 말을 하는 사람이 속이 넓은 사람이다.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는 것이니까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꽁’ 하고 있고, 지나가는 것을 가지고 ‘꽁’ 하고 있으면서 한 달 이상 말을 안 한다면 이건 병이다. 나쁘게 말을 하면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똬리를 틀고 있는 거다. 얼른 털어버려야 한다.
다윗은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많이 하는가 하니 하나님의 의에 대한 말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고, 바른 도덕성을 주고, 기쁨을 주고, 참 소망을 주고, 사람의 도덕성을 고상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우리는 말을 할 때 명령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려주어야 한다. 명령조로 들어가지 말아라. 특히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가르칠 때 명령조가 많은데,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혹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교회에서 교육적인 면에 있어서는 성경을 들고 명령을 하는 게 아니라 말씀을 이치적으로 펼쳐서 이해를 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서 듣는 사람이 이해가 되면 그것을 자기가 붙잡고 깨닫고 나가는 거다. 그런데 이해를 시키는 게 아니라 ‘이게 옳고 이건 나쁘다’ 라고 하면서 ‘이걸 가져라’ 라는 식으로 하게 되면 이건 교육의 방편에 문제가 있는 거다.
물론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한 번 권고하고 두 번 권고하고 세 번 권고하면서 이해를 시키는데도 계속 듣지를 않으면 이제는 명령이 나가는 거다. 여러 번 권고를 해도 듣지 않고 계속 죄를 짓게 되면 죄를 짓는 자신도 몹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주기 때문에 이럴 때는 명령이 나가는 거고 징계도 나가는 거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명령조로 강압적으로 하게 되면 방법적인 면에서 교훈이 안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이는 귀머거리와 같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벙어리와 같다. 사람은 옳은 인격에서 옳은 진리이치의 말이 나가야 한다. 의사가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면 이건 귀머거리요 벙어리다. 못 들었으니 말을 못하는 거다. 우리는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면 안 된다. 주님은 이것을 고쳐주기를 원하신다.
10절: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성도가 주님의 의를 아는 데도 이 의를 숨기면 불의한 자가 되고, 드러내면 의로운 사람이 된다. 그러니 자기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주님의 성실’은 성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취하심이고, ‘주님의 구원’은 성도를 죄악 가운데서 의로운 길로 끄집어내신 것이고, ‘주님의 인자’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사랑이요, ‘주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영원히 절대적 옳음이다. 성도가 이런 것을 안다면 이걸 모르는 척 숨길 수 없는 거다. 또 모르면 전할 수 없는 거다. 주님의 진리를 알면서도 이것을 숨기면 그 자는 저주요 앙화다.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아는 데도 숨기고 있다면 이건 자기의 저주고 자기의 앙화다.
우리가 세상인간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주님의 옳음을 숨기겠느냐? 성도 자기에게 주님의 구원역사의 증거가 있는데도 하나님보다 인간이 더 무서워서 이것을 숨기겠느냐? 진리성도 다윗은 주님의 의를 다 드러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를 높이시겠느냐? 자기가 높이 올라가고 싶으냐?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옳음을 선포하라. 전하라. 그러면 자기가 올라간다. 세상 쪽으로 치우쳐서, 세상 때문에 하나님의 옳은 것을 전하지 못하고 살았다면 본인에게 앙화다. 본인의 저주다.
11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성도다윗이 하나님께 자기를 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다. 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거냐? 돈이 없고 가난해서? 육신에 병이 들어서? 부모형제가 없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서? 다윗은 이런 것 때문에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윗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죄를 이길 힘이 없고, 이룰구원을 이루지 못하니 이런 자기를 쳐다보면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는 거다. 미련하고 둔탁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나, 아무 것도 모르면 죄를 짓게 되고, 모르면 저주를 받게 된다. 다윗은 자기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거다. 모르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옳음을 깨닫게 해 달라는 거다. 이건 옳은 기도다.
사람마다 부족 투성이다. 오늘날 자기를 쳐다보면 어느 면이 부족하냐? 어느 면이 비뚤어져 있느냐? 어느 면이 꼬부라져 있느냐? 우리 모두는 너무 부족한 게 많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겁이 많고, 비굴하고, 쩨쩨하고, 욕심 많고, 잘못된 게 참 많다. 이런 자기를 스스로는 못 고친다.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고쳐주시든지, 어떤 상황에 부딪치게 해서 고쳐주시든지, 옳은 진리를 깨닫게 해서 인격적으로 바로 잡혀서 고쳐주시든지 고쳐야 한다. 주님께 고쳐달라고 해야 한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세상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면 기독교인인 자기는 누구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느냐? 물론 의례히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한다고 말을 할 거다. 그러나 말은 맞지만 보호받기를 원하는 내용이 문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질을 많이 가지고 오셔서 물질적으로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겠다는 거다.
그러면 성도다윗도 이런 식의 보호를 원하는 거냐? 성도다윗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써 보호 받기를 원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자체화 되는 것이 주님의 보호요 하나님의 보호다. 주님의 보호란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걸 말한다. 이 보호에는 주님의 것으로 자체화 되는 게 들어있다. 주님으로부터 보호를 입는다고 하면서 말씀으로 자체화가 안 된다면 이는 주님의 보호가 아니다. 말씀에서 한 두 이치가 깨달아지고, 아는 면이 자꾸 들어가고, 익은 곡식처럼 믿음이 점점 커져서 일 년 전보다 올해가 다르고, 십 년 전보다 올해가 더 다르고 하는 이게 주님의 보호다. 주님의 보호는 이렇게 나온다. 세상보호는 세상 쪽으로 나온다.
우리교회에서는 ‘예수 잘 믿어라. 못 믿어라’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없더라도 예수를 똑바로 믿는 게 좋으냐, 엉터리로 믿는 게 좋으냐? 예수를 똑바로 믿는 게 좋다. 그래서 나는 교인들에게 충성봉사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잘 안 하고 어찌하든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교회 교인들이 충성봉사를 하지 않아야 하느냐? ‘하자. 안 하자’ 주의가 아니라 말씀에 붙들려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대로 충성봉사를 하면 자기의 이룰구원의 복이 따라오는 거다. 거짓되고 죄악이 많고 마귀의 시험이 많은 이 땅에서 성도가 사랑과 진리로 무장이 되는 것이 주님의 보호다. 우리 기독자들은 늘 주님의 이 보호를 받아야 한다.
12절: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왜 무수한 재앙이 다윗을 둘러싸고 있느냐? 다윗이 자기 머리털보다도 더 많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여기 죄를 많이 지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죄를 지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또 나와 다른 사람이 다 아는 큰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양심이 부끄러워서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물론 이런 죄도 다 죄이지만 영적인 면에서 죄가 많다는 의미에서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할 수도 있는 거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죄보다 눈에 안 보이는 죄를 더 많이 짓는다.
어쨌든 사람이 죄를 많이 지으면 자기에게 재앙이 겹겹이 오는 것이지 그 재앙이 남에게 가지 않는다. 그림자는 남 안 따라가고 자기를 따라다니듯이 죄는 죄를 지은 자기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림자는 어두운 데서는 숨는 것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데서는 죄를 잘 모른다.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죄를 잘 모른다. 그러나 빛 앞에서는 그림자가 명확하게 나타나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명확하게 다 나타난다. 빛이신 하나님과 가까울수록 죄가 더 많이 나타나고, 멀어질수록 죄가 숨어버린다. 그러니 어느 게 좋으냐?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게 좋으냐, 멀리 있는 게 좋으냐?
우리 모두 경험했지만 한 주일 구워먹고 두 주일 구워먹고서 교회에 나오려면 왠지 부끄럽다. 아무도 이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는데도 자기 양심이 부끄럽다. 이 부끄러움이 없어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교회에서 먼 곳으로 가버리거나 아예 교인들을 안 보면 안 부끄러운 거냐? 그럴수록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나와야 한다.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자기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많아서 차마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다윗이 양심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자기의 죄가 너무나도 많아서 ‘이것이 나의 죄입니다. 이것이 나의 의입니다’ 라고 할 수가 없다는 거다. 자기가 죄에게 삼켜져 버려서 자기가 없는 것 같다는 거다.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서 자기에게 재앙이 오고, 이로 인해 악한 자들의 놀림감이 되어서 주님의 얼굴을 더럽혔으니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거다. 자기가 죄를 지어서 재앙을 받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 앞에서, 그리고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낯이 없다는 거다. 할 말을 잃어버렸다는 거다. 변명을 할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이 사라졌다고 하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볼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고상한 인격자요 참 사람이다. 이러면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못 받고 하는 것은 성경구절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 하겠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어나가는 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거다.
13절: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처지를 발견한 인격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게 된다. ‘은총’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다. 특별한 사랑이란 영적인 면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거다. 영적인 면은 다 특별한 거고 특수한 거다.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이 자기를 어디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거냐? 일반적으로 보면 세상에서 자기 일이 잘 되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면 다윗도 이런 도움을 청하는 거냐? 다윗은 자기를 죄에서 탈출시키는 이 구원을 달라는 거다. 신앙 사상적, 영적인 면에서 참 자기의 미래를 발견한 사람은 하루 빨리 자기를 진리의 사람으로 바로 세워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많지를 않다.
우리는 항상 진리에 서 있어야 한다. 진리를 붙잡고 서 있어야 하고, 진리 인격화로 자꾸 세워나가야 한다. 크게 세워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지게 되고, 한 번 넘어졌다가 일어나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 빈 몸으로 일어나려고 해도 힘이 드는 건데 짐을 짊어지고 일어나려고 하면 더 힘이 든다. 이게 다 자기 짐이다.
14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성도다윗이 어떤 마음을 품은 자를 욕을 당케 해 달라고 하느냐? 사람의 영혼을 찾아다니면서 영혼을 멸하는 자로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고, 성도들의 해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이 곤욕을 당케 해 달라는 거다. 그래서 저주를 하는 거다. 사실 사람의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영혼을 해치는 자들은 천국복음을 지상의 소원 목적으로 끌어내리는 일을 하고, 사람을 주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특수한 영적인 은혜를 못 받게 하고, 진리이치를 못 깨닫게 하고,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중단되게 하고, 옳게 믿는 성도들 헐뜯고 비방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리성도들에게 사건 환경을 교체시키면서 영혼이 잘 되라고 각별히 신경을 쓰시는데 악인은 성도를 찾아서 영인성장과 이룰구원 면에 초를 치고 다닌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면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더 기뻐하고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보면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라 하는 자들이 있다. 자기는 안 믿을 때 이런 일이 없었느냐? 있었다면 지금은 다 회개했느냐?
진리운동을 방해하고 배격하는 것은 악인들만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도 이런 짓을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거나 훼방하지는 않지만 비진리 운동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은근히 그것을 쫓아가면서 진리운동에 호응하지 않고 등한시 하며 그 마음이 세상 쪽으로 항상 가 있는 사람도 결과적으로 진리를 훼방하는 거다. 이처럼 어정쩡한 것은 마귀 짓이다. 이런 마귀의 짓은 주로 교인들로 통해서 나타나는데, 이런 일들은 그 상태나 양상만 살짝 살짝 다를 뿐이지 다 마귀 짓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에는 그 일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수치와 부끄러움과 낭패를 당하게 되어있다.
15절: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우리는 윤리 도덕성적인 면에서 노골적으로 자타를 해롭게 한 잘못이 많이 있다. 또는 노골적으로 해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성질이 급해서 남에게 해를 주고, 또 성격이 너무 느려 터져서 어떤 일을 제대로 못한 잘못도 많다. 너무 급해도 잘못된 일이 많고, 너무 느려도 잘못된 일이 많다. 성격이 너무 급해서 ‘밥이 빨리 안 되나?’ 하며 솥뚜껑을 자꾸 열어보다가 밥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성격이 너무 느려 터져서 밥을 다 태운 일은 없느냐? 아버지가 성격이 급하면 자기 자식들을 달달 볶는다. 그러면 그걸 보며 자란 자식이 또 그런다.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이 또 그걸 보고 또 그런다. 이게 뭐가 좋은 것이라고 이런 걸 물려주느냐? 어쨌든 우리는 이런 저런 잘못이 참 많다.
우리 인간은 깨닫고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성격을 다 뜯어 고쳐라. ‘아이고, 내가 이런 면으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는구나’ 하는 걸 알았을 때는 그걸 고치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리고 항상 자기 주위를 살펴보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되게 할 일이 없나?’ 라고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참 부드러운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이고, 따뜻한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야 되겠다’ 라고 하지는 않고 남의 잘못을 보고 손가락질하기 바쁘다면 자기가 수치를 당케 된다. 본 절의 다윗의 기도가 바로 이거다.
사람은 평생 깨닫고 만들어 가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섣불리 너무 급하게 하지 말고 조금씩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 채 무슨 일을 하려다가 큰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짓게 되면 그 수치가, 그 후유증이 평상을 갈 런지, 아니면 자자손손 내려갈 런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시려고 진리이치로 깨닫게 해 주실 때 빨리빨리 고쳐야 한다. 그래야 자기 행복이고, 자기 명예 영광이고, 자기 기쁨이고, 자기가 올라가게 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시간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매 순간마다 자기를 고치려고 애를 쓰며 건설적으로 돼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