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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뱃길이었던 거제 해상족의 영고성쇠의 역사>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고대 거제도 지역은 독로국(瀆盧國, 두로국) 시절인 기원전부터 중국 일본 백제 가야지역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경유지로써,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제자유무역항의 역할을 해왔다. 또한 고대 거제도는 중국과 우리나라 서해안을 거쳐 남해안 연안을 경유해, 편서풍과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해서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과 도래인들의 기착지로써 그 역할을 이어왔다. 그러나 신라 문무왕 때 상군(裳郡)이 설치되면서 사실상 중앙정부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어 고려건국으로 개경이 수도가 되자, 거제지역은 그 역할과 기능이 약화되어 변방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 대외 교류에서도 중부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국(對中國) 교류가 부각되고 대일(對日) 교섭이 극히 미미함에 따라 대일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역할을 해왔던 거제지역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대마도를 거쳐 해상으로 이어진 뱃길의 중심에는 항상 거제도의 남동부 해안의 다대포, 도장포, 갈곶, 구조라, 지세포, 아주‧옥포가 위치하고 있었다.
○ 서기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멸망하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가야 제국(諸國)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당시 변진과 가야권역에 속했던 거제도도 함께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가야가 멸망했다고 해상무역로가 폐쇄된 것은 아니었다. 통일신라의 중앙정부와 관련 없이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명맥은 계속 이어져 왔다. 그러다가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846)가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해상왕으로 등장했다.
장보고가 이러한 활약을 펼칠 당시 동북아에서는 신라, 당나라,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죽음 이후 청해진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신라의 해상 무역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해상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족은 각자도생의 길로 나섰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그를 도운 전남 나주 오씨(둘째부인) 집안과 황해도 황주 해상세력 유씨 집안이 있었다. 물론 왕건의 집안도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했던 호족집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고려는 해상세력이 뭉쳐 나라를 건국한 것이었다. 1200년경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서 이르길, “아라비아, 인도, 태국, 베트남까지 상선들이 예성강 벽란도까지 오고가며 해상무역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개경의 고려정부가 북방민족과의 팽팽한 긴장 덕분에 남해안 지역 해상민족은 다소 중앙권력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었다. 결국 고려는 마지막 해상왕국의 역할을 다하고 우리나라는 고려중기에 동아시아 해상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 한편 ‘거제도 2000년 역사상 거제사람과 거제풍속이 크게 바뀌는 3차례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가 1128년 거제3속현의 항쟁이고 두 번째가 1271년 삼별초의 내습으로 육지로 소개령이 내려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거제 사람들이 죽거나 육지로 흩어지고 주민들도 다시 입도하는 새로운 유민들로 채워졌다. 그래서 섬의 고유한 풍속이 사라지고 다양성을 잃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후, 조선후기에는 유교철학이 거제사람들에 정착되면서 거제 특유의 풍속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에는 육지와 같이 남녀의 구분이 엄중하지 않았으며 남녀의 의복 또한 간편‧화려하고 세속적이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남녀 가사노동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이러한 역사의 토양 아래 거제 섬의 여자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억세며 노동에 능숙해졌다. 무속이 행해지는 일도 육지보다 몹시 현저하고 무당의 수도 매우 많았으며, 주술과 각종 신(神)들이 난무하는 다신사상(多神思像)의 고장이 되었다.
○ 그런데 고려시대 당시 거제도는, 육지와 가까운 사등면과 둔덕면 지역과 그리고 하청면 장목면은 진해만의 내해(內海) 지역으로, 견내량과 진해만의 남해연안 지역에 위치한 조창과 세곡선, 조운선의 해상 운송로에 위치한 관계로, 정부에서 거제현령을 파견하여, 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러나 거제 남동부 외해(外海) 지역인, '명진현(거제면)·송변현(남부면, 동부면)·아주현(일운면, 장승포읍)' 3속현은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해상민족의 문화권이 면면히 이어오던 지역이라, 지역유력자가 현을 다스리고 있었고, 관리를 '좌성(佐成)'이라 불렀으니, 좌성은 지방색이 뚜렷한 토호 세력의 수장이라 할 수 있었다.
○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약 900년 전 우리 거제도에 아픈 항쟁의 역사가 있었다. 고려 인종(仁宗) 6년 1128년 4월, “남쪽 경계에 해적(海賊)이 많이 일어남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응문(鄭應文)으로 선문사를 삼아 가서 효유(曉諭, 깨닫도록 일러 줌)하게 하였다.”라는 내용과 함께, 그해 10월 임자에는 "임자 초하루에 동남해 안찰사(東南海按察使) 정응문이 ‘명진(溟珍)·송변(松邊)·아주(鵝州) 세 현(縣)의 해적인 좌성(佐成) 등 820명이 투항하여 복속하였음으로 이에 합주(陜州)의 삼기현(三岐縣)에 귀순장(歸厚場)·취안장(就安場)의 두 장(場)을 설치하고 진주(晋州)의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두어 거처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하였다한다.<고려사(高麗史)15권> 이전 100 여년 前, 거란족 포로들을 집단 수용했던 곳을 ’거란장‘이라 불렀듯이 투항한 거제3속현의 백성 820명을 천민으로 강등하여 집단수용했던 안타까운 역사가 있었다.
○ 거제도 남동부는 약 2천년 전, 고대 거제 독로국 때부터 자유로이 바닷길을 항해하며 살아온 해상 민족이 터전을 일구어 온 곳이었고, 통일신라 때부터는 중앙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거제현의 3속현이 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1128년 이 사건을 계기로 거제도를 비롯해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일본으로 오고가던 해상민족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대마도, 일본과의 유대관계가 소멸하기 시작하였고, 소위 '왜구'라 불리는 해적이 보복성 약탈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정부에서 3속현의 토착인 모두를 잡아, 정부 통제를 굳건히 하고자 육지로 강제소개 시켰다고 볼 수 있다.
● 한편 거제도 해상민족의 역사는 고려중기 1128년 거제3속현의 항쟁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제가 해상민족이라고 하니까 무슨 특별한 민족, 종족이라도 있는 줄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까 말씀 드리건데, 당시 드넓은 해상을 오고 가며 대대로 오랜세월 동안 바다를 터전을 삼아 살면서, 무역에 종사했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총칭해서 일컫는 말일뿐이다.
거제3속현의 항쟁이 일어난 1128년 이전의 왜인은 거제도에 독로국(瀆盧國, 두로국)이 존속할 때부터 동아시아 뱃길의 해상민족으로,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자 곧 우리 자신이었다. 그러나 1128년 이후의 왜인은 우리 지역을 약탈하고 침략한 해적이자, 오랑캐였다. 실제로 고대 역사의 각종 기록에 의하면, 왜구 또는 왜적이 신라를 침략 약탈하고, 또 신라 해적이 대마도나 일본 본토를 침략 약탈한 기록은 상대의 각각의 국가 기록물(일본서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지만, 가야나 마한 백제를 포함한 거제도에, 왜구가 침략하여 약탈했다는 기록은 1128년 이전에는 없었다. 그러나 1128년(거제3속현의 항쟁) 이후부터는 아시다시피, 거제도도 침탈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1226년 거제현령 진용갑이 왜구와 사등 앞바다에서 싸운 사도전, 이어 1232년 거제도 하청북사 종을 강탈 당하는 등, 이후로는 왜구로부터 한 해도 그르지 않고 수많은 침략을 당해왔다.
●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예로부터 동일한 해상문화권인, 일본큐슈 대마도 남해안 연안지역의 관계가 단절되기 시작하였고 바다의 국경이 뚜렷하게 경계 짓게 되었다. 당시 1128년 3속현의 해상 활동은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남해연안의 해상조운(세곡선과 조운선)을 위협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정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무역 통상을 하는 이들이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들을 해적(海賊)으로 취급했겠지만, 또 이로 인해 유구히 이어온 거제도 대마도 이끼 큐슈북부 지역의 해상족은 오갈 데 없는 왜구가 되어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침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남부 연안과 대마도 큐슈 지역은 영원히 단절되었고 수천 년을 이어온 해상무역 지역이 일본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 거제군 3속현은 그 뿌리(근원)가 기원전 일본으로 이주한 도래인으로부터, 해상무역을 했던 고대 독로국을 바탕으로, 유유히 이어온 해상 민족을 계승한 곳이다. 1128년 4월 ‘명진(溟珍)·송변(松邊)·아주(鵝州) 세 현(縣)의 5개월 간의 항쟁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고로 고대 국가 독로국의 위치는 이 3속현 중에 하나임이 확실하다. 아주동, 다대포, 명진리 명진포(거제읍내 항구) 이 3항구 중에 현재 고분 발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다대포(다대산성)가 남아 있어 향후 더 두고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재까지 상황으로 볼 때 아주동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왜인조에 따르면, 김해 구야국이 가장 왕성할 때 독로국이 있었으니 김해에서 대마도로 건너가기 전에 거쳐간 항구로는 지리적으로 볼 때 아주동이 가장 타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양한 지역에서 만든 출토 유물이 이를 증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돌이켜 보건대, 조선초기 대마도 정벌부터 15세기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는 이러한 오래된 해상무역 뱃길인 거제도와 대마도를 경유하는 항해길을 계승한 것이다. 비록 16세기 삼포왜란 이후부터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는 뱃길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지만, 고대로부터 약2000년간 거제도가 항해 길의 기착지로 때론 경유지로 사용되었던 역사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고대 해상무역 항구 거제시 아주동(鵝洲洞)과 농소리 고분 출토 유물
경상남도 거제시에 속한 지명 아주동(鵝洲洞)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거제섬에 처음 상군(裳郡)을 설치 했을 때 3속현 중에 거로현(巨老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때 아주현(鵝洲縣)으로 고치고,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주(鵝洲)의 성으로 신(申)·문(文)·갈(葛)·조(曺) 4성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로(巨老)’는 큰 어른을 뜻한다. 이에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는 큰 어른이 다스리는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아주(鵝洲)’는 ‘거위(오리)배가 수없이 몰려드는 물가(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앞서 출토된 유물과 함께 아주동은 약1500년 전에 수많은 해상의 무역선이 대마도(일본)로 오고가던 기착지 였음을 알게 해 준다. 이로부터 추정컨대 그 옛날 독로국(두로국)의 항구 도시(왕도) 후보 중에 하나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건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뱃길에 위치한 아주동에는 언어, 문화, 종교 등의 다양한 종족이 더불어 소통하며 살아갔던 국제자유무역항으로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항구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 1996년 거제시 아주동 고분군 조사 발굴에서 발견된 ‘집자리 유적’은 기둥을 4개 세운 구조로 이루어진 마한 백제 지역 거주지와 동일하였다.
또한 출토 토기는 아라가야계 토기와 전남 마한백제계 토기 그리고 왜계 토기 3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적어도 3개 지역 이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해안지역이자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뱃길에 위치한 아주동에는 언어, 문화, 종교 등의 다양한 종족이 더불어 소통하며 살아갔던 국제자유무역항으로 개방적인 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동아시아 교역으로 묶어낸 열린 공간이었다. 다국적의 교역인들이 활동하며 거주했던 독특한 공간이었다. 독로국의 큰 어른이 정치적 중립성과 다양한 하이브리드 문화를 관리 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만나 교류 통합하여 잡거(雜居)했던 교역장(交易場)이었다.
아주동 고분 발굴에는 지석묘가 17기, 삼국시대 횡구식 석실고분(앞트임 돌방무덤) 30기에 청동기 시대 무문토기와 석기, 삼국시대 유개고배, 단각고배, 대부완, 배, 부가구연대, 부장경호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왜계 야요이 토기(수구식 토기)는 주로 붉은 빛을 지니고 대체로 무늬가 간결하며 형태나 모양이 다양하다. 또 전남 영산강 지역과 일본 본토에서 발굴되는 옹관묘 또한 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볼 때 왜인 또한 거주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쇠뿔 모양 손잡이 토기와 구멍 뚫린 시루 모양 항아리는 마한 백제계 토기이다.
또한 거제시 아주동 지역 집자리에서 일본 고분시대(古墳時代,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말까지의 약 400년) 토기인 하지키계(土師器, 일본의 고분시대인 4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야요이식 토기로부터 발달한 토기) 토기가 발견됐고 뒤이어 농소리 고분군과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 시기 일본과 거제도의 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됐다.
◉ 참고로 장목면 농소리 고분은 시기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의 단독고분으로 왜계 수장층 무덤이다. 왜계 철제 갑옷과 석실 고분에 문주석과 지방돌이 붉게 칠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왜계 토기도 함께 출토 되었다. 그리고 농소리 고분뿐만 아니라, 출토되는 우리나라 왜계 고분은 전부 소형 단독 고분인지라, 아마도 무역 실무자나 무역인 또는 왜인 집단 거주지 수장인 것으로 보인다.
농소리 고분 석실 내외부에서 발견된 원통형 토기와 철모(철제 창)·삼지창의 경우 의례 흔적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 후쿠오카의 반즈카 고분(전남 나주 영동리 고분과 동일)에서 발견된 철도자(작은 쇠칼)과 같은 형태로 묻혀있었다.
◉ 널리 알려진 ‘아주동 고분 출토 두껑(碗) 토우’는 실생활용보다는 장례, ‘제의용 굽다리 전대 항아리(臺附直口壺) 두껑(碗)’이다. 두껑에는 무덤의 주인으로 알려진 토우를 부착해 장식했고 두껑에다 물방울 모양 원점(원권문)을 빙 둘러 찍어 영혼의 영원성을 기원함은 물론, 둥근 조각이 일컫는 천상계를 빙 둘러 붙였다. 그리고 두껑에 빙 둘러 새긴 거치문(햇살, 삼각집선문)은 새 깃털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거나 또는 부활을 염원한 것이다. 그리고 웃고 있는 토우는 고깔을 쓴 것으로 보아, 변한(가야)계 무덤의 주인이자 이 지방의 유력 수장층이었던 큰 어른 노인을 묘사한 것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세계로 잘 인도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삶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토기는 두껑에 토우를 부착한 완(碗)은 희귀한 편이기도 하다. 아니 우리 거제도에선 최고의 보물이다. 그러나 경주박물관이나 경남경북 지역 토기를 전시한 박물관에 가보면 ‘굽다리 잔대(臺附直口壺)’ 완(碗, 두껑), 또는 굽다리 잔대 항아리 덮개(有蓋臺附直口壺)의 모습과 판박이 모양으로 일치한다. 두껑 아래 항아리나 접시와 함께 한 유물이라면 더욱 가치가 있었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