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불교문예 2024 봄호/ 김승필/
창신 빌라
김 승 필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이 있다
태풍 매미로 어미 아비 잃은 일층 봉구슈퍼 사내아이들이 좁아터진 방에서 창문을 벌컥 열어두고 잠을 잔다 팔뚝을 서로 포개놓고 배때기를 막 긁으면서 쓰러져 자고 있다 별 만 촉짜리 방파제 호텔을 불쑥 찾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름 피부인 윤슬을 숟가락으로 파먹고 테트라포드에 해종일 앉아 있는,
기다란 목을 가진 저녁,
어디선가 소독차 소리가
꽉 막힌 계단을 뚫고 지나갈 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장마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독 안에 허옇게 골마지 끼고
김 승 필
멀구슬나무가 보랏빛 카펫을 만들자 보리 바심 끝난 밭머리에 하늘의 구름들은 흡반을 대고 있다 처서도 한참 지나 좌심방 우심실을 오가며 목을 쳐들고 외피를 공고히 늘려가던 낙화생落花生 독 안에 허옇게 낀 골마지가 울짱 바로 옆 무화과 그늘을 당겼다 놓아 내 키만큼 자랄 때 흑염소의 앞무릎에 몽돌 같은 옹이가 박혀 가던 내 열한 살 허물이 검지와 약지 새새로 빠져나갔다 귀를 열고 등뼈를 곧추세우며 수없이 뜨고 지던 별 하나를 앞마당에 우두커니 되던지던 큰누이, 적멸보궁에 들기 참 좋은 날 슬몃 괴어 놓은 짧은 생의 도록圖錄
2019년 계간 <시와정신> 등단, 시집<옆구리를 수거하다> 황금알 2021, 청소년 고전 <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 청소년 문학 <국어 선생님의 시 배달>에 참여. 2021년 광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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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힘
김 승 필
아파트 주차장에 새겨진
생의 기척
작디작은 몸 사이사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저녁
젖은 발목
땅의 피부
정지선 바깥에 무춤하게 서 있는
똬리 튼 지렁이
한 자 한 자 생을 복기 중이다
모든 통점은 바닥의 힘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점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의 모든 성체는 하나의 작은 세포에서 발아되었다. 세상을 경영하거나 운행하는 모든 힘은 먼지보다 작은 미세한 입자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 모든 출발점을 바닥이라고 부른다. 땅바닥, 강바닥, 물체의 평평한 밑면이라는 의미보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지점, 혹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시인은 바닥이라고 부른다. 지렁이 한 마리가 기어간다. 생을 복기 중이라고 한다. 바닥은 힘의 원천이 된다. 바닥을 경험한 사람만이 바닥을 안다. 여전히 우리는 생을 복기 중이다. 아주 천천히. (김부회)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2023.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