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초록이 눈부신 5월, 어느 방송국〈속풀이 쇼 동치미〉에 63세의 그녀가 출연했다. ‘원조 효녀 가수’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녀는 27년간 치매 어머니를 모신 효녀답게 히트곡도 〈우리 어머니〉이다. 한동안 방송에서는 통 불 수 없었는데 28년 차 가수라니 활동을 멈추진 않았나 보다. 반가웠다. 수려한 외모에 커다란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나는 아득한 날들과 더불어 소환해 온다.
그때 나는 뿌연 안개 속을 가고 있었다. 사방이 안개 터널이었다. 요양원에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번엔 엄마가 지병으로, 쓰러졌다. 아픈 엄마를 간병인의 손에 맡기고 허둥지둥 직장으로, 집으로 종종걸음을 처야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펼쳐진 삶의 행간에서 엄마는 맏이만 바라봤고, 나는 그렇게 간병인과의 바통 터치를 잇대어 가는 하루하루가 간당간당했었다. 꿈도 사위어 가고 내일조차 희미한, 그저 기진맥진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할까.
나보다 10년 쯤 젊은 그녀가 남편과 살뜰히 치매 어머니를 돌보는 장면이 TV에서 방영되었다. 울컥했다. 맞잡을 듬직한 손이 있다는 부러움도 찡하게 섞여 있었다. 놀라웠던 건 방송국 출연자 대기실에 그녀가 휠체어를 탄 어머니를 모시고 나타나면서다. 와락, 동병상련의 아픔이 안겨 왔다. “옥색 치마 차려입고 사뿐사뿐 걸으시면~ 천사처럼 고왔던 우리 어머니~” 물기 어린 눈으로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가 마음에 감겨들고, 그녀의 노랫말이 잔가시처럼 따끔거렸다.
사람이든 인생살이든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너 아니면 죽겠다는 남자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구애의 손을 잡았던 그녀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결혼 며칠 후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고, 6남매의 막내딸인 그녀가 어머니를 모셔 오면서 남편과 갈등이 생겼다. 치매 장모님을 모시는 게 큰 불만이었던 남편은 결국 바깥으로 나돌았으며, 숱한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나는 항상 죄인 같았다. 엄마를 달고 왔던 탓에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낌새가 보여도 어디에다 얘기할 수가 없었다.”
자칭 ‘15명과 남편을 공유한 여자’라고 실토한 그녀. 어머니가 92세의 생을 놓을 때까지 남편과 어머니 사이에서 부대낀 그녀의 결혼생활과 남편의 27년 이중생활은? 뜻밖의 사고로 남편이 사망하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십수 년 전 일이란다. 내가 효녀였을지 모르나 아내 역할은 잘하지 못했구나. 그동안 겪은 엄청난 일들이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었구나. 자책하는 화면 속 그녀가 눈물을 글썽인다. 과거가 많이 떠오르는 사람일수록 괴로움도 많을지니, 못다 흐르고 가슴에 담아 둔 눈물은 더욱 깊었으리라. 방송을 시청하며 지난 시절의 동동거리던 내가 새삼 오버랩되었다. 애달픈 생의 갈피에서 빛을 쫓는 사람들의 욕망과 집착도 스쳐 갔다.
삶이 괜스레 공허하고 아린 시간 줄을 타는 중이다. 사람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만큼 늙는다고 한다. 제 나름의 기를 써 보지만 몸이 무시로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노년은 가슴으로 삶을 볼 줄 아는 시점이라며 최면을 걸어 봐도 왠지 저릿저릿하다. 누구는 빈방에 한가로움이 넉넉하여 충만의 시간이라고도 하지만 이따금 가슴이 쿡쿡 쑤셔 댄다. 할 일이 없어 조용해도, 별 하는 일 없이 바빠도 마음이 먼저 절뚝거린다.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나서도 어쩔 수 없는 심란함이라니….
사람의 가슴엔 아물지 못하는 구멍이 있다. 앙금으로 들어앉아 용해되지 않는 통증이 있다. 태어날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존재 결핍’이 있는데 그것을 ‘소유 결핍’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 그러기에 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 더러 그 구멍에 술, 영화, 사진 등을 넣어도 봤지만 다 소용없었고 지금은 그저 구멍을 바라본다고 하던가. 어느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가 쓴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에서 했던 말이다.
선천적 가슴 구멍을 지닌 나, 그대, 우리, 어떠하신가, 돌발성 소낙비가 그치고 중천에서 짱짱하던 붉은 해가 빛깔을 희석하며 서천으로 이운다. 소멸의 전조가 깔린 하루 치의 날이 점점 저문다. 재빠르던 몸이 눈에 띄게 느려지는가 하면, 가끔은 백지영의 노래 한 구절이 되새김질 되는 오늘을 산다.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 총 맞은 것처럼…”
굽이치는 세월에 멀쩡한 사람은 없다. 모진 아픔도 배고 기막힌 슬픔도 녹아드는 법. 삶의 희로애락에 제법 의연해질 나이테를 새겼건만,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을 즈음이련만, 자주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직은 감정의 잎줄기가 마르지 않아서일까. 수 없는 은유를 간직한 채 애초부터 있어 온 그 가슴 구멍 때문일까. 그렇더라도 스스로 영혼이 깊어져 피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더 깊숙이, 더 그윽하게 자신의 안팎으로 도달했으면 좋겠다.
바람 살푼 부는 오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해 본다. 두 팔을 벌려 가슴을 펴고 촉촉한 바람의 소절들을 천천히 한껏 들이킨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