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덕 (1918-2002)
한국 사회와 개신교에 큰 영향 을 미쳤던 벽안(碧眼)의 성공회 노신부가 영면했다. 개신교 수도 공동체 '예수원' 설립자인 대천덕 (戴天德·84, 본명 루벤아처 토리) 신부가 6일 오전 7시 40분 별세했다. 대 신부는 지난 1965년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에 예수원을 세운 후 40년 동안 개신교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돈을 사랑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며 평생을 청빈과 나눔으로 일관한 '살아있는 성자(聖者)'였다.
70여명이 함께 생활하는 예수원은 하루 세 번의 기도와 묵상·대화·독서 등으로 영성을 키워나가고 목장과 목각 등 공동 노동을 통해 자급 생활을 하고 있다. 회원뿐 아니라 매년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2박3일 동안 이곳을 찾아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는 대 신부의 설교를 들으며 삶의 방향을 잡아왔다. 또 대 신부는 매일처럼 날아드는 상담편지에 일일이 답장하면서 정신적 스승의 역할도 해왔다.
1918년 중국 산둥성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대천덕 신부는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1946년 성공회 신부가 됐다. 1957년 한국으로 돌아와 성공회대 전신인 성(聖) 미가엘 신학원 원장을 맡았던 그는 보다 근본적인 삶을 위해 해발 920m의 태백 산골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12명의 노동자·농부들과 함께 예수원을 설립했다. 대천덕 신부는 개인적 영성뿐 아니라 이를 사회정의와 연결시키는 작업에도 노력했다. 그는 토지정의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노동세를 폐지하고 토지세를 올려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2002.8.6.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