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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21.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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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
섬기는 일터
1.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전진국)
2. 화려한 메시아를 내려놓으라! (이상학)
3. 우리 중 하나가 되신 하나님 (팀 켈러)
4. 주님의 탄생과 우리의 거듭남
1.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출처 : 『목회와 신학』 두란노 2025년 12월호
글쓴이 정진국은 CGN 대표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믿는 자들은 예수로 인해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나간다. 그리스도의 날인 성탄을 맞아 그리스도를 원동력으로 천국의 지경을 넓히는 사역을 담은 OTT ‘퐁당’의 최신 콘텐츠를 소개한다.
1) <땅끝의 증인들 ‘웰컴투 아마존’>
아마존 선교라 하면 흔히 영화 <미션>(Mission)을 떠올린다. 영화의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문명과 단절된 원주민 부족 선교의 장면이 뇌리에 각인돼 있다. 그러나 <땅끝의 증인들 : ‘웰컴투 아마존’>은 오늘날의 아마존 선교를 훨씬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보여 준다.
‘레티시아’(행복)라는 뜻의 이 지역은 태초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만큼 풍요로운 땅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마약과 가난, 그리고 우상으로 신음한다. 거대 마약 밀매조직이 공공연히 활보하는 이곳은 세계 코카인 유통의 핵심지로, 마약은 주민들의 생업과 밀착돼 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마약이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는 생명과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배교를 택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마존의 크리스천들은 오늘의 생계를 위해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는 갈림길에 위태롭게 서 있다. 신앙과 물질 사이에서 끊임없이 시험받는 것이다. 마약 운반이나 포장 일만 해도 손쉽게 돈을 벌 수 있기에 대부분의 주민은 유혹에 타협하고,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마약 유통을 독려하는 비극이 태연한 농담처럼 골목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중독에 빠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며, 유혹은 올가미처럼 평생을 따라붙는다.
【어린 나이에 마약을 운반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여덟 살 때부터 열다섯 살까지요. 우울증에 빠졌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마약에도 손을 댔죠.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은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어요. ‘왜 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제가 가는 곳마다 왜 항상 마약이 있는 걸까요?’】(모이세스, '빵의 방주 공장' 직원)
이런 상황에서 홍성진, 김혜숙 선교사 부부는 아마존의 일상 곳곳에 그리스도를 심고 있다. 페루 산타로사에 자리한 ‘빵의 방주 공장’에서는 죄의 사슬을 끊어낸 청년들에게 제빵기술을 가르치고, 콜롬비아 ‘까사 데 아미고’(Casa de amigo, 친구의 집)에서는 마약과 연관된 가정사의 아이들에게 학업과 신앙을 훈련한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치유를 나누고, 복음을 경험한 아이들은 '작은 예수'로서 집과 가족을 선교지로 삼는다.
【가족을 일주일 내내 거의 못 보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으로 대하고 싶어요. 식구들 빨래를 하면서 주님이 제 영혼을 씻어 주시길 기도해요. 옷이나 그릇을 씻어내듯 주님이 제 가족도 씻어 주시길 바라요】(마르셀라, ‘친구의 집’ 학생).
마르셀라는 11세에 까사 데 아미고에 입소해, 얼마 전 18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는 부모의 권유로 어린 시절 마약 운반에 가담했지만, 예수님을 만나 삶을 새롭게 살기로 결단했다. 지금은 아마존의 또래 청소년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고 고백한다. 마르셀라는 말한다. “전 다른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하나님 이름이길 바라죠. 저를 볼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기를 소망합니다.”
선교 다큐멘터리 <땅끝의 증인들> 시리즈는 세상의 끝에서 복음을 전해 온 선교사들을 담은 CGN의 대표 선교 콘텐츠다. 2020년 공개 이후 많은 화제를 모았고, 최근 약 5년 만에 신규 편인 <웰컴투 아마존>이 공개됐다. <땅끝의 증인들 ‘웰컴투 아마존’>은 콜롬비아(레티시아), 페루(산타로사), 브라질(타바칭가) 3개국 국경이 만나는 아마존 극빈층 거주지에서 사역하는 홍성진, 김혜숙 선교사를 따라간다.
선교사 부부는 이곳에서 ‘부에노스아미고스’(Buenos Amigos, 좋은 친구들) 공동체를 설립, 16년째 현지인들의 ‘좋은 친구’가 돼 교회를 세우고, 기숙사를 짓고, 빵을 구우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아마존에 퍼뜨리고 있다. 한편, 다큐는 선교사와 그 사역만을 조명하는 기존의 선교 다큐 문법을 경쾌하게 깨뜨리고, 선교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냈다. 이를 통해 현지 크리스천이 땅 끝에서 핀 복음의 꽃임과 동시에 땅 끝의 증인임을 따뜻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나의 아빠예요. 그리고 나의 친구예요.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그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어요. 그분이 나를 알고 사랑하신대요. 이 마을에서 난 꿈을 꾸어요.” (힐손, ‘친구의 집’ 공부방 학생)
이 외에도 OTT ‘퐁당’에는 성탄 기간에 볼 수 있는 콘텐츠가 풍성하다. 조선의 작은 예수라 불리는 서서평 선교사(본명: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1880-1934)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다큐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에서는 낯선 땅을 품고 조선의 작은 밀알이 된 선교사의 뜨거움을 만날 수 있다.
<바울로부터 스페셜 마스터>도 추천할 만하다. 총 10부작이었던 기존 다큐멘터리를 80분으로 압축한 특별편으로, 바울이란 인간 개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사역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감정의 희로애락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 요소를 가미해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이 다큐멘터리는 작년 KBS 성탄 특집으로 방영됐다.
‘퐁당’ 검색창에 ‘성탄’이나 ‘크리스마스’를 입력하면 영화, 찬양, 말씀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날 수 있다. OTT ‘퐁당’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깊이 묵상하고 찬양하며 2025년 성탄을 맞이하길 바란다.
2. 화려한 메시아를 내려놓으라!
출처 : 『목회와 신학』 두란노 2024년 12월호
글쓴이 이상학은 새문안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누가복음 2장 8-12절)
어느 유대인 랍비가 성탄절에 아이들이 창밖에서 부르는 캐럴을 들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노래를 듣던 랍비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고개를 내밀어 사방을 훑어보고는 말했습니다. “오기는 뭐가 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걸 ….” 정말로 메시아가 왔다면 세상이 이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왔다면 이전보다 더 살기 좋아져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분이 오신 증거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보아라!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내 인생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지 않은가. 무슨 만민의 구세주가 왔다고 요란을 떨며 허세를 부리나” 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께서 정말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내 인생을 구원하셨다면 지금 내 삶이 이럴 수는 없는데, 그분이 정말 메시아라면 세상이 이렇게 악하게 돌아가선 안 되는데 ..., 2천 년 전에 오신 그분이 정말 메시아가 맞기는 할까? 그분이 진짜 메시아라 해도 내면의 메시아요, 영혼의 구세주일 뿐 이 세상을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하나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분은 아니지 않은가?’ 이 같은 질문의 조각들이 마음에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의구심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해 온갖 미스터리와 스캔들, 의아함으로 가득했습니다.
1) 메시아의 표적 :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오늘 본문은 메시아, 곧 세상의 구원자라 일컬어지는 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모습을 마치 사진처럼 찍어냅니다. 첫 번째 성탄절 밤, 바깥 추위에 잠들지 못하고 깨어서 자기의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놀라운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천사가 와서 깨어 있는 목자들에게 전합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이 말을 들은 목자들은 얼마나 놀랐으며 얼마나 흥분했을까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가 오신다니 말입니다! 고난 많고 눈물 많은 자기 민족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그 메시아 말입니다.
그분을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린 지가 1백 년이 지나고, 2백 년이 지나고, 무려 4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구약의 계시가 끝나고 신약의 새 시대가 열리지 않은 사이의 4백 년을 신구약 중간기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4백 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시고, 마침내 이 땅에 메시아를 보냈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고, 감격스럽고, 흥분된 순간이었을까요. 그런데 그 뒤에 이들의 귀에 들어온 천사의 말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2). 어느 마구간에 가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한 아기를 볼 것인데, 이 광경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다는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입니다. 일종의 길을 알리는 표지판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일이 진실인지 아닌지 표시하는 사인(sign)입니다. 복음서에서 ‘세메이온’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지금 천사가 그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메시아가 오신 표적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바로 그 표지입니다. 여기 나오는 세 명사인 ‘강보’, ‘구유’, ‘아기’가 목자들의 귀를 연이어 때립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그동안 이들이 생각해 온 메시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기’는 연약하다 못해 어떤 힘도 없어서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그 생명조차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아기는 ‘강보’에 싸여 있습니다. 강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속에 솜이 뽀송뽀송하게 들어간 폭신한 포대기가 아닙니다. 그냥 천입니다.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는데 그 몸이 초라하게도 천으로 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누일 곳조차 없어 ‘구유’에 맡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구유가 신비화(神祕化) 돼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유는 짐승에게 주는 음식물을 담는 여물통일 뿐입니다.
2) 누추한 모습으로 온 메시아를 거부하는 세상
아기가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천으로 몸이 싸인 채 가축 여물통에 누워 있다면, 어느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왕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믿을까요? 이분이 정말 메시아라면 이렇게 초라하고 왜소하게 오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소박하고 담백하다 못해 누추한 모습으로 와서는 거칠고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의 메시아는 함량 미달이고 역량 부족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2천 년 전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살았다면, 이렇게 천에 둘둘 말려서 여물통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고 구세주라고 믿고 경배할 수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그렇게 왜소하고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성탄절부터 ‘성탄’의 성스러운 탄생 장면은 의심과 의문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을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려 온 유대인들은 도저히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서두에서 랍비가 “오기는 뭐가 와?” 하고 말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만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첫 번째 크리스마스부터 진정한 성탄을 알아차리고 감격하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내려놓고 포기하셨기 때문에, 누가 봐도 이분은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서 연약한 인간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 도무지 신(神)으로 보이지 않는, 너무도 약하고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이 아기 예수가 내 인생을 살린 구주이신 것을 믿습니까? 30년 뒤 '십자가'라는 그 치욕스런 나무에 매달려 죽은 이 예수가 세상의 구원자인 것을 믿습니까?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자기 인생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소박하고 담백하다 못해 세상적으로 누추해 보이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때, 그는 이처럼 소박하고 담백하며 심지어 세상적으로는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단다”(참조, 마 13:31).
묵상해 보십시오. 어떤 농부가 자기 밭에 겨자씨 하나를 갖다 심는다고 할 때, 누가 이것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누가 주목이나 하겠습니까? 인삼과 같은 특수 작물도 아니고 너무 작아서 손에 그 씨를 쥔 사람조차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겨자씨 한 알, 그것을 남의 밭도 아니고 내 집 뒷뜰에 심는데 누가 호기심을 갖겠습니까? 아무도 관심 갖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한 사람의 인생에서든 역사의 한복판에서든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소박하게 지극히 평범하게 시작됩니다. 2천 년 전 12월 25일 새벽, 베들레헴의 한 여관 마구간에서 벌어진 일을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천사가 알려 준 그 목자들 그리고 하나님이 알려주신 동방박사들 외에는 아무도 이날의 이 출산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밭에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듯 하나님은 그렇게 살포시 소박하게, 심지어는 누추해 보이게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3) 일상적이고 평범한 하나님의 나라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이며, 평범하게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즉 그것을 갖다 심은 자신만이 이것이 생명의 씨앗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성실히 물을 주고 가꿉니다. 남들이 보든 안 보든, 남들이 주목하든 외면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엔 씨앗을 심은 그조차 이 씨앗이 앞으로 어떤 나무가 될지 알지 못하고 그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저 천부께서 시키시니 담백하게 순종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씨앗은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가지를 뻗어서 자라가기 시작합니다. 이 성장의 순간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습니다. 이 농부의 집 뜰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어느 날, 씨앗은 자라서 담장 위로 쑥 솟아나 거대한 나무가 돼 있습니다. 그제서야 이 나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당깁니다.
원래 겨자는 식물의 분류로 보면 나무가 아닙니다. 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은 겨자는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은총으로 역사하셔서 풀이 아니라 거목이 되게 하십니다. 마침내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깃들입니다. 그 새들이 내는 소리가 온 마을의 아침을 깨웁니다. 그때 비로소 동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자기들에게 온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한 일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걸음이요, 예수님을 믿는 인생의 걸음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소박하고 겸손하게 우리에게 오셔서 자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메시아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았던 세례 요한까지도 시간이 지나며 의심했습니다.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마 11:4). 세례 요한조차 화려하고 힘세고 강력한 메시아의 상을 벗어던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앵글로만 본다면 절대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메시아의 비밀이 있습니다!
4) 눈물로 씨 뿌리는 자들에 의해 변해가는 세상
일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고, 심지어 왜소해 보이는 일상 속에 생명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어떤 소중한 일을 위해 씨를 뿌리고 애쓰며 경주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 과정이 생각보다 느리고 심지어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아 낙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힘들어 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혹시 자신이 화려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십시오. 오직 믿음의 눈으로 내가 처한 현실을 보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말은 엄청난 역설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눈물을 흘립니까? 정상적인 농부는 환한 얼굴로 소망 속에서 씨를 뿌립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것은 뿌리기 싫은데 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도 소용이 없을 것 같지만 자기를 부정하며 씨를 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어가면서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뿌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실낱 같은 소망을 품고서 씨를 뿌립니다. 낙심한 마음과 기대와 회의가 뒤범벅된 채 뿌립니다. 이렇게 자기의 한계를 이겨내고 유혹을 견뎌내면서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기쁨으로 거둘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후 승리를 절대로 믿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로 인해 조용히 변화돼 갑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두 왕이 나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세상의 왕(1절)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하나님 나라의 왕(12절)입니다. 세상의 왕이 다스리는 세계에 다른 한 왕이 아기의 모습으로 너무도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왕은 33년이 지난 뒤 하나님 나라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의 왕이 승리를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그의 제자들은 백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로마 세계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결국 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 아기로 세상에 온 지 3백 년이 지난 후에는 세상의 왕이 아기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듯 소리 없이, 심지어 누추해 보이게 내 인생에서 시작됩니다.
5) 오직 하나님의 일에 초점을 맞추라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그 일이 초라해 보입니까? 초라하지 않습니다. 누추해 보입니까? 누추하지도 않고, 왜소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씨가 아래로 뿌리를 내릴 때에도 겉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화려한 메시아상을 내려놓으십시오. 화려한 인생을 꿈꾸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일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세상을 소리 없이 변화시키는 그 일은 당신을 통해 이미 시작됐습니다.
3. 우리 중 하나가 되신 하나님
출처 : 『팀 켈러, 사랑으로 나아가는 오늘』 두란노 2024년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예수님은 우리 중 하나이시다. 즉 인간이시다. 성육신과 크리스마스 교리는 예수께서 온전히 참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온전히 참인간이시라는 것이다. 성육신은 우주를 가르고 역사를 뒤바꾸고 삶을 변화시키고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궁극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토록 높고 멀기만 한 진리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온전한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리스도인들은 빌립보서 2장 5-11절 같은 본문들을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이해해 왔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실 때 신성을 잃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이셨으나 자신의 영광, 곧 신으로서의 특권을 버리셨다. 그분은 연약하고 평범해지셨다. 권력과 아름다움을 잃으셨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2). 다윗과 모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말했으나 이사야에 따르면 성육신하신 메시아는 인간적인 매력이나 아름다움조차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바울은 그들에게 성육신을 본받아 살라고 명했다(빌 2:5-8). 그리스도인이라면 외적인 조건을 마냥 동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자신의 영광을 비우셨다는 사실은 당신도 권력 있고 호화로운 사람들, 인맥이 넓어 당신의 앞길을 터 줄 수 있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권력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정신이다. 하나님이 우리 중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
4. 주님의 탄생과 우리의 거듭남
- 주님이 우리에게 오심 -
출처 :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집』 김병삼 / 토기장이 2021년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오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우리는 ‘강림’(advent)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나오신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강림이란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주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주제로 아주 오랫동안 신학적 논쟁을 해왔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이실까요? 아니면 하나님이실까요? 올바른 신학적 교리를 말한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 갇혀계신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초월적인 일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기독론'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하지만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알고 기념한다고 하면, 과연 그분이 우리와 구체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역사 속에 오신 주님이 우리와 관계를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챔버스는 이전에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외부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인생을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베들레헴'이 되게 한 적이 있습니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곳이 바로 베들레헴의 마구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베들레헴'이 된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방법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주님은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육신적인 방법을 생각하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진리의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초자연적인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즉 ‘거듭남’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거듭남의 특징은 내가 나 자신을 완전하게 하나님께 드릴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형성되는 순간, 그리스도의 속성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꽤 어려운 말들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조성된다’, ‘내 안에 형성된다’. 또 ‘그리스도의 속성이 나를 통해 역사한다’와 같은 개념들입니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동안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챔버스의 말을 통해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의 속성이 무엇인가요?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속성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면 우리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성’, 즉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니 우리를 통해 구속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듭났다고 우겨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속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질과 욕망으로 하나님께 양도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다면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우리가 어떤 ‘완전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내 안에 내적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지로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들과 씨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학창 시절 다니던 교회에 성가대를 지휘하던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예민함이 조금 지나쳤던 분이죠. 연습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도 내고, 주변에 있는 것도 집어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간증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인상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휘자는 은혜를 받았지만 성가대원들도 전부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니, 늘 일어났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예전 같았으면 화를 냈어야하는 순간에 그 지휘자가 밖으로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교회 마당 화단에 있는 큰 돌을 집어던지고는 다시 들어와 성가 연습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참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이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타고난 기질을 바꿔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단지 그 속에서 원하지 않는 본성과 맞서 싸울 용기가 생겼다는 의미임을 알았습니다. 챔버스는 이 구속의 사건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