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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조선열전>
會孝惠、高後時天下初定,遼東太守□約滿為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以聞,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皆來服屬,方數千里。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효혜제 고후 때였다.
요동태수는 위만과 약속하기를, 조선은 한나라의 외신이 되어 만이를 통제하되 변경에서 그들의 노략질이
없도록 하며, 만이의 군장들이 입조하여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아서는 않된다.
이를 듣고 천자는 허락하였다. 이 후 만(滿)은 군사와 재물을 얻어 가까운 소읍들을 쳐 항복시키고 진번,
임둔 등도 복속해 왔으므로 사방 몇 천리의 영역을 지니게 되었다.」
*注索隱東夷小國,後以為郡。
색은은 동이소국의 주석에서 이 동이소국들이 후에 군으로 편성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한사군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동이소국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뒤에 나오는 주석에 있습니다.
*
注正義括地誌云:「朝鮮、高驪、貊、東沃沮五國之地,國東西千三百里,南北二千里,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南至新羅國六百里,北至靺鞨國千四百里。」
정의 괄지지의
주석에는 위만이 동이소국을 략속시켰거나 스스로 항복하여 복속된 소국들은 <조선,고려,
맥,동옥저오국지지, >등으로 나라 동서는 1300리,남북 으로 2000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경사에서(서안=서한) 동쪽으로 큰바다에 이르러 400리이고, 북쪽으로는 영주계까지
920리 남쪽으로는
신라까지 600리 북쪽으로는 말갈까지 1400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위만이 통치하던
낙랑조선의 속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조선에 소속된 동이소국들이 한사군이 된것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맥,동옥저,오국지지등은 예외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조선은 이때부터 열국시대로 들어가게 되지요.
그렇다면 한사군은 서한의 경사였던 서안으로 부터 동쪽으로 큰바다에 이르러 400리 내에 설치되었다고
보는것입니다.
낙랑조선과 소읍이었던 한사군은 바다안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서안의 동쪽은 산동이 됩니다.
산동의동쪽 큰바다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필자가 주장해 온 등주 주변의 바다 즉 지금의 장도를 말합니다.
발해해협은 약 400여리가 됩니다.첫번째 올려진 지도 〈산동총도>를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한사군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조.한전(朝漢戰)을 유발한 섭하(涉何)의 도주로
지도설명: 황명일통방여비람(皇明一統方輿備覽) 지도의 수몰전 요동만 부분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요하가 산해관 근처까지 통과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요하로 합류되는 강들의 그림이 보이지 않고 대능하와 소요수가 합류하는 그림도 빠져 있습니다. 요하의 서쪽이 되는 그림으로 표시된 백색 사각형과 윗부분 지역이 초기 요동군이고, 그 오른쪽으로 요하의 동쪽이 요동의 동쪽으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시 오른쪽의 빨간선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소요수일 가능성이 많고, 그 남쪽으로는 패수(沛水)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나라때 국경을 좁힌 이유는 붉은색 바탕의 요하 동쪽이 조선에게 수복되었기 때문이기가 쉽고, 이때 한나라는 국경선을 패수(요하)의 서쪽으로 축소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지도는 1625년에 제작되어 런던과 홍콩의 과학기술대학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크기:30.37 Purchas,Samuel 제작 ) |
지금은 거의 청색 대각선 부분이 수몰되어 요동만으로 변하였고, 백색 사각부분의 왼쪽에 섭하가 패수를
건너 도망하였던 임유관(산해관)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네요.
산해관에서 패수를 건너 정동쪽으로 개주가 있었고 그 남쪽으로 문현과 번한현이 있었습니다,
산해관의 북동부에 있었던 광령에 조선왕의 구도였던 험독현이 있었던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곳에 진번조선의 구 왕도였던 왕검성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 아래 지도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는 요하의 서쪽을 요서라고 하였습니다.
요하가 다른강 즉 대능하와 소요수가 합류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초기의
광령땅(양평?)도 보입니다.
*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두번째 지도의 2번화살표 아래에는 청주라는 '靑'자를 원안에 표시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산동반도에서 부터 요동만 지역까지 모두를 청주지역으로 구분하였음을 볼수 있습니다.
*
秦漢時遼東郡地唐沒於渤海
<독사방여기요> 의 기록입니다. 진.한시의 요동군 땅은 당나라때 이르러 발해로 윤몰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요동만 내의 초기 요동군 땅을 말하는것이겠지요.
* 通雅 明 方以智 撰 권15
夾右碣石入于河 非長城所起之碣石也
平州石城縣西南有碣石 即漢右北平郡驪山縣 水經注曰 驪城枕海今歴乆
為水所 淪入海去岸五百餘里
此則禹貢夾右碣石入于河之碣石也...今以平州之赴海者為右碣石以髙麗中為左碣石
* 鹽鐵論, 卷10, 和親 第48
『燕塞碣石絶邪谷繞援遼』
(연나라 장새는 변방의 갈석을 지나, 사곡에서, 요수에 접하였다.)
元封二年(B.C.109),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 元封二年(B.C.109),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師古曰: 「譙, 責讓也,
音才笑反.」 何去至界
[校勘 014], 臨浿水, 使馭[校勘 015]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註028] 師古曰: 「長者, 裨王名也. 送何至浿水,
何因刺殺之.」 卽渡水[校勘 016], 馳入塞,[註029]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弗詰[校勘 017],
拜何爲遼東東部都尉.[註030] 【補注】先謙曰, 地理志, 東部都尉治遼東武次縣. 朝鮮怨何, 發兵攻襲
[校勘 018], 殺何
校勘
014]『史記』에는 ‘界’ 다음에 ‘上’字가 있다.
[校勘 015]『史記』에는 ‘御’로 되어 있다.
[校勘 016]「宋本」에는
‘度’로 되어 있으며, 『史記』에는 ‘水’자가 없다.
[校勘 017]『史記』에는 ‘卽不詰’로 되어 있다.
[校勘 018]「宋本」과
『册府』·『史記』에는 ‘襲攻’으로 되어 있다.
元封 2년(B.C.109)에 漢나라는 使臣 涉何를 보내어
○ 원봉元封 2년(B.C.109) 에 한漢나라는 사신 섭하使臣 涉何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涉何가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자기를]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註028]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수[浿]水를 건너서 새塞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註029] 드디어
천자天子에게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天子가 그 공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涉]何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註030]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何에게 원한을 품고 군사를 출동시켜
기습 공격하여 何를 죽이니, 天子는 죄인罪人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어] 조선朝鮮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사료의 출전은 <한서><조선전>입니다. 위의 지도에서 아래쪽에 원으로 표시된 지역이 위만조선입니다.
산해관에서 위만조선이 있던 장도 까지는 약 500여리입니다.
이와같이 패수의 비극으로 시작된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피아간의 피해가 막심하자
한무제는 항복을 유도하도록 사자를 내 보냈는데 한나라가 저지른 과거의 불신때문에 다시 패수에서 서로
등을 돌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5천필의 말과 군량을 헌상하려 하였으나 한나라 사자의 실수로 회담은 깨지고 조선군은 철수하였습니다.
이 회담의 실패로 한나라 사자는 주살되었습니다.
말이 5천필이라면 작난이 아니지요. 이를 전송하는 병력만 만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은 조선측의 의견은 전연히 없습니다. 오직 한서를 저작한 한나라측의 일방적인
기록입니다.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 頓首謝: 「願降, 恐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餽[校勘 028]軍糧. 師古曰: 「餽亦饋字.」 【補注】先謙曰, 官本,
注末有也字. 人衆萬餘持兵, 方度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令[校勘 029]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校勘 030]之, 遂不度浿水, 復引歸. 山報[校勘 031], 天子誅山. 【補注】先謙曰,
此又一衛山, 非表中義陽侯衛山也.
[校勘 028]『史記』에는 ‘饋’로 되어 있다.
[校勘 029]『史記』에는 ‘命’으로 되어 있다.
[校勘 030]『史記』에는 ‘詐’
다음에 ‘殺’字가 있다.
[校勘 031]『史記』에는 ‘山還報天子’로 되어 있다.
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이로움이 없다고 여겨
○ 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이로움이 없다고 여겨 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使者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웠었는데, 이제 信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太子를 보내어 들어가
謝罪하게 하고 말 5천필을 바치며, 또 軍糧을 공급하였다.
무리 만여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浿水를 건너려 하는데, 使者와 左將軍은 그들이 어떤 變을 일으킬까
두려워 太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다. 太子도 使者와 左將軍이 속이는게 아닌가 의심하여 마침내 浿水를
건너지 않고 다시 부하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衛]山이 天子에게 보고하자, 天子는 山을 誅殺하였다.
다음은 요동만의 윤몰을 기록한 사료입니다. 워낙 긴시간에 걸쳐 서서히 윤몰된 터라 많은 기록을 발견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역도원의
저서 <수경주> 에 대하여 〈수경주소> 로서 해설한
기록입니다.
昔在漢世,海水波襄,吞食地廣,當同碣石,苞淪洪波也.守敬按:《河水注》,漢王璜曰,往者天嘗連雨,
東北風,海水溢,西南出,侵數百里.故張晏云,碣石在海中,蓋淪于海水也.
"해수가
땅에 슴여들어, 넓은땅을 삼켜버리더니, 같은 지역에 있던 갈석도 넓은 파도에 휩쌓여 윤몰 되었다".
<하수주 河水注> 한나라 시대의 왕횡이 말하기를 "가을비가 쉴사이 없이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대더니
서남쪽으로 해수가 넘쳐 수백리의 땅을 침식 하였다".
옛날 장안이 말하기를 "바다에 있던 갈석은 산 머라까지 바다물에 빠저버렸다."
위에 제시한 역도원의 저서 <수경주>의 본문입니다.
<爾雅釋名碣石者碣然而立在海旁也
<水經注>碣石山在驪城縣西南枕海有石如甬道數十里
當山頂有巨石如柱
形立於巨海中莫知深淺世謂之天橋柱舊在河口海濱歷世旣久爲水所漸淪入於海去岸五百里
漢平帝時司空椽王橫言昔天嘗連北風海水溢西南出浸數百里故張郡(晏)云碣石淪在海中
班固亦云商碣周移也
<사기> <조선열전>은 조선에 들어와 왕을 설득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던 섭하가 패수에 이르러 비왕
장을 살해하고 패수를 건너 새(塞)로 도망하였는데 황제는 그에게 요동군 동부도위직을 제수하자 조선은
병을 이르켜 동부도위부를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게
됩니다.
*섭하가 건너간 새(塞)는 평주 임유관(平州 臨楡關)이란 설명이 정의의 안사고 주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본문에는
주 29란 기록으로 대치되고 설명은 빠져 있습니다.
이때 섭하를 살해한 장소를 선겸은 요동 무차현(武次縣)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차현이 어디쯤일까요.
<한서><지리지>의 요동군편을 봅니다. 이때는 이미 초기 요동군의 위치가 요하의 동쪽으로 동진한 뒤었기
때문에 섭하를 살해하였던 무차는 요하의 서쪽에 있던 요동군을 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요동군이 요하의
동쪽으로 이동한 후의 요동군치는 양평, 무차는 동부도위의 치소로 평곽의 주변인
개주, 해성이기가 쉽습니다. 아무튼 중요한것은 무차는 발해의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기><조선열전>
[補注】先謙曰, 地理志,
東部都尉治遼東武次縣. 朝鮮怨何, 發兵攻襲[校勘 018], 殺何
<한서><지리지>
요동군
遼東郡,秦置。屬幽州。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有牧師官。
莽曰昌平。新昌,無慮,西部都尉治。望平,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長說。
房,候城,中部都尉治。遼隊,莽曰順睦。遼陽,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莽曰遼陰。險瀆,居就,室?山,
室?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顯,安市,武次,東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鐵官、鹽官。西安平,
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사기><조선열전>
卽渡,馳入塞.(正義曰入塞 平州楡林關也) 즉도,치입새. 정의왈 입새 평주유림관야
(섭하는 패수를 건너자 마자 유림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본문에는 임유관(臨楡關)으로 되어 있으나 주석에 유림관으로
기록됨.
*그러니까 섭하는 패수를 건너 평주의 유림관(임유관) 즉 지금의 산해관 지점으로 도망했다고 함으로
패수가 대동강,혹은
청천강,압록강등으로 비정되던 학설은 당연이 부정이 됩니다. 따라서,
1)만약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왕험성(평양성)은 대동강의 북쪽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한나라의 새(塞)인 임유관이 있어야 되는것이지요.
그렇다면 대동강 남쪽에 있었던 낙랑토성을 평양성으로 삼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적국과 대치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한나라는 조선과 전쟁을 위해서 57000명의 병력과 누선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이미
자기네 한나라 세력이 대동강 북쪽을 점령하고 있는데 이러한 해상작전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2)복수를 위하여 조선이 벙력을 이르켜
섭하를 살해하기 위해서는 대동강 이북에 포진한 한나라 세력을
뚫고 요동반도를 지나 발해 연안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역시 불가능한 얘기지요.
만약 청천강을 패수로 본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리를 하여서라도 대동강 평양설을 주장 해 보려고 하는 노력은 이해를 하지만 순리가 아닙니다.
이 대목을 해명하기 위해서 이병도 박사를 위시한 몇가지 설이 나와 있지만 검토를 해 보면 옹색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전쟁 얘기들
한 무제는 기원전 109년 가을,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누선장군(해군) 양복(楊僕)은 죄수들을 모집하여 7천을 거느리고 산동반도 제남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북으로 건너서 갈석의 열구에 도착하여 좌장군 순체가 지휘하는 5만명의 육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체가 약속한 기일에 나타나지 않자, 한의 수군은 내심 선공하여 전공을 세워보려는 옥심으로
단독으로 출병하여 왕험성에 선착하였으나 오히려 조선의 방어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패배하고 수군장수
양복은 산으로 뿔뿔이 흐터져 10여일을 헤매이다 겨우 병력을 수습하여 반격하게 되는데...
한편 수색 임무를 맡았던 졸정 다가 통솔하던 다수의 육로군도 먼저 국경인 패수 방면에서 위만조선 군
에게 발각되어 초장에 격파 되었으며 순체가 이끄는 본진도 조선의 패수 서군에게 격퇴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상황이 어려지자 한무제는 양국 간 에 협상을 추진하였는데 특사로 위산을 파견하여 화의를 타결코자
하였으나 화의 진행과정에서 위산의 실수로 협상은 무산됩니다.
이 결과 책임을 물어 위산을 참수하고, 선봉에서 수색임무를 맡았다 실패한 졸정 다도 참수합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한나라 병사들의 출동상항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양복이 통솔하는 수병의 출발지는 산동의 제남입니다. 당시 한나라가 해상의 제해권 을 가졌더라면
수군이 왜 바다도 아닌 황하의 항구인 제남에 주둔하고 있었을까요?
때문에 한나라 수군은 발해의 제해권을 갖지못하였다고
보여집니다.
더구나 그들이 바다를 이용하여 한반도의 평양을 목표로 하였다면 보다 평양에서 가까운 요동반도 서남
쪽의 항구들을 두고 바닷길로 수천리인 제남에서 출발할 이유가 없는것입니다.
이미 한나라의 기병들은 천하무적인데 좋은 지상의 기동력을 발동하지 않고 수상전이 취약한 바닷길을
이용할 이유가 없는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지인 왕험성은 장도인 사문도에 있었다고 봅니다.
이로부터 약
700여년이 지난 뒷날 수, 당군 이 출전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벌리던 같은 경로를 비교하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전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까?
한나라가 침략할 당시 위만조선은 군사력이 막강해져 함부로 넘볼 수 없다고 하였는데 도대체가 조선의
육군들은 다 어디로가고 겨우 패수의 상군과 서군만 나타나는 것일까요.
당시 위만조선이 확보한 영토가 수 천리에 달했다면 남쪽으로 진국과 삼한을 제외한다면 남는게 만주
땅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로를 거쳐 조선을 치려면 요동반도를 저항없이 지날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구려
당시처럼 무슨무슨 성에서 싸웠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동반도를 거친일이 없었던 것입
니다.
세상의 어느나라도 강을
지키기위해서 수군을 두는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조선에는 패수에
상군과 서군을 두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싶이 발해에서 上軍이라면 북쪽을 말합니다.
그리고 西軍이라면 중국의 대륙쪽을 말합니다. 사문도가 남쪽에 있었다면 충분히 타당한 얘기가 됩니다.
그럼 남쪽에서는 공격할수가 없었는가? 그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급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동력선이 없던시대에 배의 운항은 계절을 기다렸다가 바람을
이용했고, 또 해류를 이용했을뿐이니까요.
다음은 <위략> 의 삼국지 동이전 배송의 주 입니다.
[초 우거미파시, 조선상 역계경,이간우거불용,
동지진국.....역여조선.공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 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歷與朝鮮.貢
번(진번의 오)
불상왕래]
蕃 不相往來
이 기록은 한나라와 전쟁을 앞두고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신하인 역계경간에 주고받은 대화 입니다.
역계경의 한나라와의 화의를 요청한 건의를 우거왕이 거절하자 역계경은 2000천여 가구를 데리고 동쪽의
진국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되겠읍니다.그 후로 그들은
서로 왕래를 끊었다고 했읍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하는 것은 동쪽의 진국 입니다. 위만조선의 왕검성 이 평양 이었다면 바다를 통하여
동쪽
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진국의 위치가 평양의 동쪽 이라는 설명은 더욱 맞지 않는
다는 얘기입니다. 이병도 박사와
송호정교수의 견해를 보겠읍니다.
이병도 박사는 <한국고대사연구> 110쪽에서 이 위략을 인용하고 있지만 중요 하다고
생각되는 "東之辰國"
에 대해서는 논이 없이 피해갔읍니다.
송호정 교수도 <단군,만들어진 신화> 의176쪽에서 이 위략을
인용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이 풀이 하고있
읍니다.
"고조선의 지방 족장 이었던 역계경은 왕이 자기 말을 듣지 않자 자신이 거느린 부족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이웃나라로 떠나기도 했다".
과연 이렇게 해석 하면 위치를 밝혀 낼수가 있을까요?
이렇게 해석 해 놓고도 평양의 왕험성 설을 주장 할수가 있을까요?
많은 학자들이 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각자가 주장하는 목표지는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저명한 학자 몇 분의 주장을
보겠습니다.
* 이병도 목표지; 평양 왕험성 (고구려 후 평양성) <한국고대사연구> 88쪽
* 국사편찬위원회 ;
발해를 건너 왕험성 으로.(지명 없음) <한국사> 107쪽
* 문정창 목표지; 발해를 건너 왕험성 으로.( “ ) <고
조선사 연구> 160쪽
* 윤내현 “ 난하~ 요하 서쪽 (발해 서쪽) <한국 고대사 신론> 284~285
* 북한 “
요하 하구 [부수도 왕검성 (영구 발해)] <고조선의 력사개관> 125~126쪽
* 신채호 “ 헌우란 (요동반도 서쪽)
<조선 상고사> 107쪽
이상과 같이 한나라의 공격 목표지 엇던 위만조선의 위치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사기>
조선열전 의 정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연구하지 않고 무시 한 결과 라 고 봅니다.
다시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 글은 위에 제시된 <사기> 조선열전의 첫번째 기록에대한 정의의 주석입니다.
王之都王險城 滿得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왕지도왕험성 만득병위재물 침항기방소읍 진번,임둔,개래복속 방수천리
[正義 括地志云
朝鮮高麗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정의 괄지지운 조선고려맥동옥저오국지지 국동서천삼백리 남북이천리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재경사동 동지대해사백리 북지영주계구백이십리 남지신라국육백리
北至靺鞨國千四百里]
북지말갈국천사백리
이상 소개드린 <사기> 조선열전의 위만조선에대한 기록은 거의
유일한 기록입니다.
거기에 위만조선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것입니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조선 고려 맥 동옥저등 오국의 땅은 동서로
천삼백리, 남북으로 이천리인데, 경사
(낙양)동쪽으로 동에 이르러 큰 바다와 만나고, 바다안에서 사백리리다.
북으로 영주경계에 이르고,거리는 구백이십리다.
남으로 육백리를 가면 신라국에 이르고,북으로 천사백리거리에 말갈국이 있다.]
낙양에서 동쪽으로 큰바다에 이른다면
조금은 막연한 표현이지만 한서나 삼국사기 권 34 잡지3 에는 동북
5000리라는 기록과 등주라는 지명을 볼수 있읍니다.등주가 오천리라는 기록은 <동국고승전> 에서도
볼수 있읍니다.
이 곳을 산해경 에서는 조선의 위치를 "동해지내"라 하였고, 한서 지리지 권24 와
자치통감 에서는 "연제
지간"이라 하였읍니다.
이 곳이 갈석을 지나 동으로 낙랑과 현도군을 두었다고 하는 위치로 봅니다.
등주에서
도리진(여순~대련)까지의 거리는 500 리라는 기록을 가탐의 도리기에서 확인 할수 있읍니다.
이상의 글에서 우리는 위만조선의 위치가
등주에서 대련 사이에 있는 바다라는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묘도군도의 장도 라는 곳을 말합니다. 사서에 확실한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엉뚱한 방향에서 해메이다
오늘같은 실수를 범 한것을 반성 할줄 알아야 합니다.
역도원/수경주/패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許慎云 :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 出浿水縣. 《十三州志》
曰 :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蓋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衛滿, 自浿水西至朝鮮. 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 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不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番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
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 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 以朝鮮為遠, 脩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 于事差謬, 蓋《經》誤證也.
1. 원래 수경(水經)에 있는 글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2. 허신의 설문이 수경이 원전이 되어 허신의 '설문'에도 같은 이야기가
들어갔습니다.
許慎云 :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 出浿水縣.
허신이 말하기를 : 패수는 루방에서 나와 동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다른
말에 의하면 패수현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하여튼 패수는 동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3. 한서 지리지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보면 낙랑군에 흐르는 세개의 하천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낙랑군 浿水현 : (浿)水 西至 (낙랑군) 增地縣 入海 낙랑군
含資현 : 帶水 西至 (낙랑군) 帶方縣 入海 낙랑군
呑列현 : 分黎山, 列水 所出, 西至 (낙랑군) 煇蟬縣 入海, 行八百二十里
낙랑군에 흐르는 세개의 하천(패수, 대수, 열수)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4. 수경주를 쓴
역도원의 의문수경주를 쓴 역도원은 여기에 의문을 가진 것 같습니다.
위 수경주 인용문 중에서 '昔燕人衛滿,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부분부터 역도원의 주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조선전에서 위만조선 멸망시의 이야기를 인용한 후, 자기의 생각을 밝힙니다.
만일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넜을 리가 있겠느냐, 패수는 지금 고구려의 수도가 있는 곳이다.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보니 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하더라.
물은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고 다시 서북으로 흐른다.
그래서 한서 지리지에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에서 바다에 들어간다고 했다.
지금 상태와 옛 글들을 고찰해보면(考之今古) '수경'의 설명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즉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는 '수경'의 설명을 '사기/조선전'과 '한서 지리지' 그리고 고구려
사신의 말을 들어 비판을 하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5. 다산 정약용 : '멍청한 역도원, 멍청한 허신'다산 정약용 선생은 '아방강역고' 중 '패수변'에서 수경주를
쓴 역도원과 설문해자를 쓴 허신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멍청한 역도원과 허신이가 헛소리를 하였다.
'수경'이 옳다.계네들은 '수경'을 읽을 줄도
모른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수경은 이렇게 읽는 것이 아니고, 浿水出樂浪鏤方縣東, 南過臨浿縣東, 入于海.패수는 낙랑 루방현의 동쪽
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이렇게 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장의 근거는 '수경' 안에 있는 다른 강들(예를 들어 泗水)을 설명하는 文例입니다.
'수경' 읽는 법은 '수경'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뒤에 다른 설명들을 더하여 낙랑군의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현재의 대동강이 틀림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그리고 멍청한 역도원이 '사기/조선전'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사기에 나오는 패수는 낙랑군의 패수(대동강)가 아니라 압록강이라고 하였습니다.
패수가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던지 또는 동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 간다는 기록 때문에 주석자
였던 역도원도 했갈렸다는 기록은 인상적입니다.
그만큼 수계가 복잡한 데다 일부지역의 장시간에 걸친 윤몰로 실재로 패수의 경로는 변화가 많았다고
보여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패수의 경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주장은 어쩌면 모두가 다 맞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패수가 다른 물들이 아니고 같은 물이었지만 지반의
변동에 의한 경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패수의 경로에 대해서는 바비님께서 수고롭게 참가 하시어 그려주신 지도에 대략 표현 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대략적인 설명도 덧부쳤읍니다.
북쪽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바다로 빠져 나가는 경로였읍니다.
그림에서 패수의 표현은 빨간 색으로 하였읍니다. 요하와 난하,황하가 합수 되어 남쪽으로 흘러 장도 부근
에서 갈라지는데, 일부 지류가 험독인 등주수도 로 빠져 바다로 들어가고, 본류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일부가 장산수도로, 남어지는 여순 근해를 거쳐 동해 바다로 빠져
나갑니다.
이 경로를 따라 한 무제군은 산동반도 제남에서 출발하여 발해의 북쪽인 평주의 갈석산 근방에서 순체가
통솔하는 육군과 합류 하기로 하였으나 이들은 약속 시간이 엇갈려 양복이 지휘하는 수군만 단독으로
험독의 왕험성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이들이 패수 서군에게 방해받지 않코
험독에
도착 한 것은 조선군의 작전 이었 던지 아니면 다른 루트를 이용 했다고 볼수밖에 없읍니다.
갈석산과 패수의 거리는 약 500
여리로 봅니다.
사기의 기록은 수군 보다 먼저 선발대로 출발 하였던 육로 군인 졸다(卒多)의 부대는 초장에 패수 서군
에게 박살이
나 부대장 인 졸다는 책임을 물어 처형 시켰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이 패수는 위만이 서쪽에서 건너 조선으로 왔던 물이고, 조선은
옛날 기자국 이며, 우거가 왕일때 영토가
수 천리에 이른다고 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한 무제군은 패수에서 우거를 멸하였다고 하였읍니다.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番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
浿水西至增地縣入海.
이 문장은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읍니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고 있는데 번사가 왔을때
물어보니 그가 말 하기를 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읍니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흐릅니다. 옛날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치의 조선현
이었읍니다".
물이 서북으로 흐른다고 하는 것은, 옛날 지리지에, 패수가 서쪽에 이르러 증지현을 거쳐 바다로 들어
간다는 예기
었읍니다.
그러나 이렇게 등장하던 낮익은 지명들, 즉 패수현, 임패현, 증지현, 점제현, 양평현, 무차현, 서안평,해성
등은 아예 없어지거나 다른곳으로 옮겨 졌읍니다.
한반도의 압록강 입구에 있던 서안평도 한서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개주 또는 평곽 근처에 있어야 옳습니다.
그렇다면 왕험성과 패수는 연결되어 있는 통로라고 보기 때문에 청천강이 될수 없고, 성이 물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낙랑토성 정도의 위치로 짐작 할수 밖에 없으나, 이곳의 출토품 들의 연대가 2 세기 이상
늦을 뿐만 아니라 성의 남쪽은 벼랑이고, 수많은 전선을 정박 시킬수 있는 패강이 있다고 하였으니 도무지
닮은 곳 이라고는 찾아 볼수가 없읍니다.
망루 구멍으로 루선의 동정을 살펴보고 병력이 많지
않음을 알고 뛰어 나와 적을 섬멸 하였다고 하였는데
바다가 아닌 대동강 에서 가능한 일이겠읍니까
패수(浿水) 서군(西軍)과 상군(上軍)에 대한 추정 분석입니다.
위에서 소개 드린 "발해만 지명 위치연구" 라는 지도를 통해본
패수의 위치는 북위 38도~40, 동경 119도
~120도 사이에 위치 합니다. 그러니까 북으로 상한 한계는 북위 40도를 넘을 수 없다는 말이
되겠읍니다.
이곳 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 여리가 됩니다.
이렇게 추정 한다면 북한 에서 주장하는 요하 하구의 부수도로 비정되고 있는 영구설(營口說)은 제외되고,
또한 윤내현교수의 난하 하구의 패수설(浿水說) 도 제외 됩니다.
기타 요동만 이북 이나 단재의 패수설도
제외 됩니다.
먼저 패수 상군의 위치를 보겠읍니다. 두가자로 해석이 됩니다. 그 하나는 500 여리의 패수 물위에 떠서
경계하는
해상군이 되겠고, 또 하나는 패수의 북쪽 경계상에 위치한 수륙 상비군이 되겠읍니다.
다음은 패수 서군 입니다. 패수가 흐르는 남북
500 여리의 서쪽에는 당시삼각주로 이루어진 내륙이 있었
다고 봅니다. 황하 하구를 중심하여 상하의 중국(당시 연, 제,조) 내륙을 물을 경계로 하여 마주보고 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 위만이 건너 와서 조선의 서방 경계를 담당했던 상하장(上下障) 이 있었읍니다.
무려 100 여리라고 하였읍니다. 이 곳에는 오늘날 해병대 같은 역활을 하던 막강한 병력이 있었겠지요.
순체의 5만 육군을 가로막고 통과를 허용치 않던 조선의 최초의
해병대라고 보면 틀린 추측일까요?
그리고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패수의 동쪽에도 수비군이 있었을 터 이고 더구나 요동반도의 서쪽의
경계를 맡고 있던 옥저병들의 활약은 기록을 볼수 없읍니다.
사기의 전쟁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한 무제의 57,000 병력이 일년 여를 버틴
기록입니다.
그들은 좁고 험한 장소에서 동시에 대병력을 투입하지 못하고 결손된 병력을 계속 보충 하였다고 보는데
실제로 투입 되었던 총 병력은 알수가 없읍니다.
어쩌면 소모 병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자 일수도 있읍니다.
영토가 수 천리 었다는 위만조선 땅의 방어 시설은 오직 왕험성 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기가 바다 안
이었다는 증거 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전쟁은 상상하기 어려운 진퇴를 거듭 하다가 무려 일년여 만에 끝이
났읍니다.
성(城)하나를 포위 하여 함락
하는데 일년이 걸린 전투로는 세계적인 전사중에 유일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선발 수색대로 출발하였던 졸정 다(卒正 多) 는 첫
전투에서 부하를 모두 잃고 단신 생존하여 원대복귀
하였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수형을 당 하였고,
수군 7천 명 으로,상부의 명을
어기고 단독 출병 하였던 루선장군 양복은 왕험성 수비군 에게 완파 당하여
혼비 백산 한체 뿔뿔이 흩어져 산중을 헤매이다가 10 여일후 순체의 육군이 도착 하여 서야 패잔병 들을
모아 전열을 다시 가추었읍니다.
그런 중에도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왕험성 밖의 전투 들이 곳곳
에서 치열 하게 벌어 지고 있었다는 증거
는 다급 해진 한 무제의 휴전을 위한 특사의 파견 입니다.
전쟁 상항이 심상치 않자, 무제는 제남태수로 있던 위산(衛山)을 불러 특사로 파견 하였으나,
마무리가 서툴러 실패로 돌아가자 그도 목을 짤랐읍니다.
전쟁 중에 전선을 통제 하는
장수들이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여 서로 반목만 하다가 수 많은 병사들만
잃고 피아 간에 귀한 인명 만 소모하는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위만조선의 최후의 왕 이었던 우거(右渠)는 참으로 존경 받을 만 한 지도자 였다고 보여 집니다.
비록 부하 들에게 암살을 당했을 지언정 그의 불굴의 정신을 볼 때 이렇게 생각 할 수는 없었는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무려 일년을 견뎌온 전투로 성내의
모든것은 바닥이 나고 오직 항복만이 남아 있을때 최 고위의 지도자는
어떠한 길을 택해야 되는가? 현명한 지도자 라면 죽는 방법을 택해야 되는것
아니었겠읍니까?
그 길은 두 가지 입니다. 자결과, 사랑하는 부하로 하여금 목을 치게 하는 준열한 그리고 엄숙한 의식
입니다.
이러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그를 따르던 성기도 같은 길을 택했다고 보여 집니다.
패자에게 무슨 말이 필요 했을까 만은, 우리는 그들의
후손들 이면서도 단 한번도 최후의 전장을 분석하는
여유를 가져 본 일이 없었읍니다.
기왕 지나간 역사 이지만 이러한 중국측의 기록을
해석하여 옮기는 과정에서도 자기들 조상 이었을
대상자 들을 꺼리낌 없이 오랑케로 불러대는 결예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 글에서 제남 태수는 위산이 아니고 공손수 였고, 위산은 특사 였읍니다.
공손수 역시 목을 잘렸고, 총사령관 이었던 순체도 목이 잘려 장터에 내 걸렸읍니다.
루선장군 양복만 벌금형으로 대신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는, 자존심 강하던 한나라의 수치스러운 기록
입니다.
[실증]왕험성 攻防은 1년6개월을 계속한 세계유일의 전투
사진 상) 한나라의 누선입니다. 대병력을 수송하는 연안수송선입니다.
대형 공성(攻城)장비의 수송은 불가능합니다.
하) 장도박물관에 수장된 전투도입니다. 상세한 시대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기병전임을 볼수 있습니다.
한개의 성에서 1년6개월을 버틴 세계 유일의 전투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
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即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僕失其眾,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
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天子為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
請服降。」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人眾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為變,謂
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幸,將燕代卒,悍,乘勝,軍多驕。樓船將齊卒,入海,固已多敗亡;其先與右渠戰,因辱
亡卒,卒皆恐,將心慚,其圍右渠,常持和節。左將軍急擊之,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往來言,
尚未肯決。左將軍數與樓船期戰,樓船欲急就其約,不會;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朝鮮不肯,心附
樓船:以故兩將不相能。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疑其有反計,未敢發。天子
曰將率不能,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右渠遣太子,山使不能剸決,與左將軍計相誤,卒沮約。今
兩將圍城,又乖異,以故久不決。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有便宜得以從事。遂至,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具以素所意告遂,曰:「今如此不取,恐為大害,非獨
樓船,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為然,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
將軍,并其軍,以報天子。天子誅遂。
左將軍已并兩軍,即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一〕相與謀曰:「始欲降樓船,
樓船今執,獨左將軍并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陰、唊、路人皆亡降漢。路人道死。
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 (((元封四
年春))) 左將軍使右渠子長降、〔二〕相路人之子最〔三〕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為四郡。
〔四〕封參為澅清侯,〔五〕陰為荻苴侯,〔六〕唊為平州侯,〔七〕長〔降〕為幾侯。〔八〕最以父死頗
有功,為溫陽侯。〔九〕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一〕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
贖為庶人。
太史公曰:右渠負固,國以絕祀。涉何誣功,為兵發首。樓船將狹,〔一〕及難離咎。悔失番禺,乃反見疑。
荀彘爭勞,與遂皆誅。兩軍俱辱,將率莫侯矣。
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并其軍,以報天子。天子誅遂。>
누선장군을 그 병력과 함께 좌장군 휘하에 묶어둔 죄를 물어 천자는
사자로 보냈던 제남태수 공손수를 주살
하였다.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一〕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
當誅,贖為庶人。>
공훈을 놓고 질시하고 쟁탈전을 벌린 좌장군 순체는 기시형에 처하고, 누선장군 양복은 열구에서 좌장군을
기다리지않고 선공한 죄를
물어 주살하려 하였으나 속전으로 대신하여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이리하여 적어도 일년육개월동안 수십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싸운
결과는 두명의 지휘관이 참살되고 한명의
지휘관은 벌금으로 속죄하여 서인으로 강등 되었으며, 두사람의 천자의 사자들은 주살되는 세계 전쟁사상
전무 후무한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사진설명:
원봉3년(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상 삼은 수하를 시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항복 하여 한나라에게
승리를 안겨준 일등 공신입니다.
그가 받은 홱청후라는 봉지는 바로 장도의 창락현 이었습니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한음의 봉지었던 추저는 발해로 나와있으나 역시 장도의 중심지에 현재에도 지명이 추흉(萩洶)으로 남아
있습니다.
패전 뒤에 따르는 위만조선의 말로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승전국 한나라의 뜻에 따라 항복하여 한 나라에게 도움을 주었던 조선의 배반자 들에게 논공행상이
시작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은 정복자들의 상투 수단이기도 합니다.
모두 다섯 사람이 임용 되었는데
행정단위가 무슨급(級) 인지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이 기록 때문에 일부 논자들은 한사군의 개설연대의 시기에 이론을 제기 하기도
하지만 <사기>의 기록을
믿을 수밖에 없다면 이들 제후들의 임명은 한나라의 승전에 도움을 준 공로로 보상된 명예직 이었을
공산이
크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보임된 지역의 단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左將軍已?兩軍 ?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一〕相與謀曰:「始欲降樓船,
樓船今執,獨左將軍?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陰、?、路人皆亡降漢。路人道死。
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
(元封四年春)
左將軍使右渠子長降、〔二〕相路人之子最〔三〕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四郡。
〔四〕封參???侯,〔五〕陰?荻?侯,〔六〕??平州侯,〔七〕長〔降〕?幾侯。〔八〕最以父死頗有功,
?溫陽侯。〔九〕
<사기>조선열전
좌 장군이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급히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상 노인, 음,과 니계상 삼, 장군 왕 겹 등이
모여 모이를 한 결과 처음처럼 누선장군에게 항복 하고자 하였으나 (양복은 이미 감금된 상태였고) 좌 장군
순체가 단독으로 수륙 양군을 지휘하고 있어 왕은 두려워 하여 항복 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 하였습니다.
그러자 음, 겹, 노인 등은 한나라에 항복하고 도중에 노인은
죽었습니다.
원봉3년(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상 삼은 수하를 시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항복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험성의 끝에 있던 우거의 대신 성사(기)는 항복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관리들을 공격하였습
니다.
(원봉4년 봄(기원전 107년)
좌장군사 우거의 아들 장(長)이 항복하였고, [2] 상 노인의 아들 최가 [3]
백성들을 선동하여 대신 성사(기)를 살해하자, 비로소 전쟁은 끝이 났고 그 곳에 사군을 설치하였습니다.
[4] 삼을 홰청후에 봉하고, [5] 음을 추저후에 , [6] 겹을 평주후에, [7] 장을 기후에. [8] 최는 아비가
죽은 공로로 온양후에 봉하였습니다.
(1) 우거가 죽고 니계상 참이 한에 항복을 한다. (기원전 108년 여름 = 원봉3년 여름)
(그러나 왕이 죽었다고 해서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고
성기가 계속 저항한다. )
(2) 좌장군이 상로인의 아들 最를 보내 성기를 죽이고, 왕험성이 함락되어 비로소 조선이 평정된다.
(3) 그 자리에4군을 설치한다. (시간 미상)우거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108년 여름이므로 한 해의 절반
정도가 벌써 지난 싯점으로 지금까지 조선열전 독자들은 사건 (2),(3)도 모두 나머지 반 년 정도 기간에
일어난 것으로 오해를 해 왔습니다.
이미 저는 현토군이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음을 입증하였으므로 이러한 오해가 잘못된 것임을 보였
습니다.
즉 (3)은 기원전
108년과 107년에 걸쳐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사건(2)가 언제 일어났는지 보도록 합시다.
<사기><建元以來侯者年表>을 보면 위만조선에서 투항한 사람들을 제후로 임명한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 니계상 參과 상로인의 아들 最의 공적과 임명 싯점이 나옵니다. (이 표에는 위만조선 투항자들의
투항과 동시에 공적을 가려 제후로 임명하는
과정이 시간순으로 쭉 나옵니다.)
(인용5) 홰淸侯 임명: 元封三年六月丙辰 侯朝鮮尼谿相參元年. 기원전 108년 6월 우거왕을
죽이고 투항한
니계상 참을 홰청侯로 임명합니다. 투항하자마자 임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여름이 구체적으로 음력 6월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6) 涅陽侯 임명: 元封四年三月壬寅 康侯子最元年.성기를 죽이고 한에 투항한 상로인의 아들 最를
열양후로 임명하는데 사건 (2)가 일어난 싯점입니다.
즉 最가 성기를 죽여 즉시 왕험성이 떨어짐으로써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最가 그 공로로 涅陽侯로
임명받은 것이 기원전 107년 3월입니다.
결국, 위의 기록들을 통해 위만조선은 사건 (2)가 일어난 싯점인 기원전 107년
3월에 멸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낙랑,진번,임둔 3군은 위만조선과의 전쟁이 끝나기 전인 기원전 108년에 설치한 것
이고, 현토군만 기원전 1년 후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한에 투항한 자들의 비극
<한서> 景武紹宣元成功臣表(경무소선원성공신표)
평주후 왕겹 봉 1480호 3년4월 정묘 봉, 4년 훈(죽음)
추저후 한도(음) 봉 540호 4월) 정묘 봉, 19년, 년화 2년, 훈 봉 종 신, 아들 얻지 못함.
획청후 삼 봉 1000호 6월 병진 봉, 11년 천한 2년, 도피중인 조선의 죄인을 은익한 죄로 하옥 되었다 병사함.
기후 張洛 (왕자) 3년 계미 봉. 6년, 조선을 재건하기 위한 모의를 하다 발각되어 사형됨.
<사기>권 20 건원이 래후자년표제 8에는 "후 장낙사조선모반사군제"(候 張洛使朝鮮謀反死郡除) 라고 하여
장이 죽은 후 군까지 없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열양강후 최 3월 왕인 봉, 5년, 태초 원년 훈,
이상 대부분의 제후들은 봉작을 받은 후 2,3년
내에 사망하였거나 또는 다른 누명을 씌워 제거하였습니다.
이 들의 봉지가 일부분 다른 지방인 것으로 보아 한사군 지역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인들을 잡아다 어부를 시킨 진수는 어디인가?
그림설명 상) 말도많은 갈석산의 위치를 구분할수있는 지도입니다. 대갈석으로 보이는 산이 바다쪽으로 반쯤 걸려있는 그림이고, 내륙으로 또하나의 작은 갈석이 현재 진황도에서 서쪽으로 약 15 키로쯤 떨어져있습니다. 그러나 이갈석산은 대갈석이 바다로 윤몰되자 후에 대갈석을 대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것으로 추정 되고 있습니다. |
하) 거란지리지도에 나타난 대갈석의 윤몰도입니다. 한나라가 국경을 좁히고 관문을 삼았던 임유관을
楡關으로 표시한것으로 보이는 곳이 산해관 북쪽으로 보입니다. 고대사를 연구하시는 모든분들께서는
발해의 윤몰에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어려운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후한서>><오환 선비전>에 기록된 진수에대한 내용입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광화원년(서기178년)겨울 선비가 요서를 침략하였고, 같은 겨울에 주천을 침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가 후한의 영제때이고, 고구려 신대왕24년 때입니다.
밭곡식과 가축과 사냥으로 짐승을 잡아도 양식이 부족하여 단석괴가 영내를 순행하였는데 넓이가 수백리
에달하는 진수에 이르러
가마귀때들이 앉아있는걸 보았습니다.
흐르던물이 정지되어 흐르지않고 수백리에 고여있었고, 그안에 고기들이 많이 있었으나 얻을수가
없었
다고 하였네요. 이때 소문을 들으니 왜인들이 어망으로 고기를 잡는다는 말을 듣고, 동쪽에 있는 왜인국을
공격하여 천여가를 얻어 진수상으로
이사시키고 고기를 잡도록 명령하여 양식에 보탰다고
하였습니다.
[冬,鮮卑寇遼西。光和元年冬,又寇酒泉,緣邊莫不被毒。種□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石槐乃自徇行,
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水停不流,[二]其中有魚,不能得之。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
徙置秦水上,令捕魚以助糧食.]
그렇다면 진수는 과연 후에 요택으로 불려진 물인가를 알아야 어느정도 위치를 파악할수있습니다.
다음은 요동만이 만들어지던 발해의윤몰현장을 시대별로 기록한것입니다.
워낙 장기간에 걸친 윤몰이었으므로 기록에 많은 애로가 있었던것으로 보입니다.
1) BC 132. 황하의 발해 유입과
그 하구의 변경.
종전 산동성 남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갔던 대 황하의 물길이 전한(前漢)중엽에 일변하여 돈구(頓丘)
동남쪽으로 부터 발해에
유입하게 되었으니 그러한 사실을 <한서 무제기>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원광3년 (BC132) 춘 하사 종돈구동남
유입발해. (春 河徙 從頓丘東南 流入渤海).
이 유역의 변경으로 인하여 발해만의 지형에 대 변동이 일어났으니, 즉 그 윤몰된 500리평지의
남쪽에
황하의 하구가 생겨난 것이다.
2) AD 114년. 발해의 대지진
위에서 본바와 같이 한나라는 서기전 67년경 부터
대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후 110 여년간 간헐적
으로 계속되었던 것인바 안제(安帝)초(初) AD 114년 추 팔월 발해에 해일이 일어나고,
대풍이 불어 일시에 3만여본의 거수가 뽑히는등, 그리하여 그 참상이 이루 말할수 없었던 것이다.
3) AD 170년대. 수백리의 진수(秦水)
발해의 이러한 해일과 재변은 그 후도 계속되었으며, 그러한 중에서 그 500리의 평지에 큰
변동이 일어
났으니, 즉 위에서 본바 단석괴(檀石槐)가 고기잡이한 진수(秦水)와 같이 흐르지 아니하는 거대한 호수
지대가 생겨나게
된것이다.
4) AD 221~280년대. 갈석(碣石)의 해중몰(海中沒)
삼국시대 오나라의 태자 중서자요, 효경과 논어의 주자인
위소는, 그옛날 황하하구에 위치하였던 갈석이
발해에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갈석이 옛날 하구에 있었다.
해가 이미 오래 되매 물에 잠겨 점차 바다에 빠져 들어갔으니,이미 해안
으로부터 500 여리 떨어지게 되었다".
5) AD
385~534년. 해안에 돌출한 수백리의 용도(甬道).
지표변동이 일어난지 이미 600 여년, 그 500리의 평지내에 생식하였던 3만여본의
거수가 일시에 뽑히고.
그 옛날 하구에 있었던 갈석이 500리쯤 떨어진 먼 해중으로 들어가고.
또한 그 500리의 평지에 수100리의 호수가 생겨나고. 그후 300여년간에 호수가 점차 바다로 화하여 그
잔해로써 수 십리에 달하는 용도형의 기관이 생겨 났으니, 그러한 사실을 북위의 지리학자요.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성(驪城)이 바다를 베개하여.....돌이 있되 복도와 같이 수십리
뻗쳐있다.
산 꼭대기에 큰 돌이 있되 그 모양이 기둥과 같다".<서전> 우공 협석 갈석의 주
6) AD 645년. 당태종의 발이 빠진곳.
그후 100여년, 발해 북안지대는 해일과 남만주에서 흘러 내리는 구조(九條)의 강하 등으로
인하여 그
윤몰된 하구의 일부 지역이 니녕(泥녕수렁)지대가 되었으니, 즉 고구려를 토멸하기 위하여 출정한
당태종의 말이 200리의 수렁에 빠지는
등의 일로서 당태종이 대패 하였음은 주지의 역사 사실인것이다.
7) AD 1700년대.^형의 발해 북안(北岸)
그후 천여년간
발해북안의 윤몰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매, 인하여 대청일통지 성경통부도(統府圖)는 그
당시 발해 북안의 지형이 ^형으로 되어 있다 하였으며, 그리하여 그후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발해
북안지대는 지도상 거꾸로선 u자 형으로 나타나게 된것이다.
지진은 지질구조의 약세에 따라
지각의 곁이 움직여 흔들리는 현상으로서, 그 원인은 화산의 활동.
지하수의 침식. 토사의 이동.지괴의 운동. 대륙의 이동등으로 인하여 일어나며, 그러한 운동의 결과로서
산붕. 지탁(땅이 쪼개짐). 지함(땅이 �어짐).등이 생겨 나는 것이다.
문정창 저 <고조선사연구>
259~261쪽에서
발해북안의 지형은 처음에는 "V" 자형의 꺼꾸로선 상태로 있다가 오늘날의 "U"자가 거꾸로 선 상태로
변하는데 200여년이 걸렸다는 기록을 주목합니다.
발해의 윤몰사실은 사서중에 나타나는 자구 한 두자의 풀이로서 좌우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타기도 각석에 나타난 평양도행군총관 장량(張亮)과 정명진(程明振)
<2008년 2월에 발표된 한국해사연구소 이사장 박현규박사의 논문에서>
<교동반도 고구려관련 해양유적과 전설>
평양도행군 총관 장량이 타기도에 도착하여 평양성을 치기위한 준비를 하면서 항해의 안녕을 비는 용왕제를
올렸다는 기록을 남긴 타기도각석.
<위만조선시 남려 예군이 28만명의 백성들을 이끌고 요동만 위치에 있던 한나라 요동군으로 상륙하고 섬을
한나라에게 비워주었으나 이곳에 창해군을 설치한 한나라는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쫓겨남.
이곳은 장도에 있던 평양성이나 왕험성을 공격하기 위한 최적의 전략기지었으나 해상전에 미숙한 한나라
군은 험한 물길을 견디지못하고 스스로 철수한것임>
묘도군도의 섬들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였는데 그중에 타기도에서 발견된 석각에 대해서 싣고 있습니다.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서 평양도행군 총관을 맡았던 장량과 부장으로 비사성을 함락시킨 정명진에 대한
얘기가 있고 그 핵심에 장량이 타기도에 도착하여 항해의 안녕을 위해서 용왕제를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3차 침공시에는 루방도 총관을 맡았던 정명진은 그 행적을 적은 기록도 없어지고 열전의 반열에도 탈락
되어 겨우 그 아들의 열전에 약간 소개되었다는것입니다.
그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것일까요? 그는 2차 침공시 발해의 사수에서 활약하였다는 기록에 무개를 싣는다면
그도 역시 사수에 몸을 맡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글을 빌려 소개하는 이유는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침공시 누선장군 양복이 묘도군도 항로를 개척하였다는
사실과 당나라의 고구려 평양성 침공시 개주를 경유한 사실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도에는 평양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동반도(산동반도 동북부) <<고구려관련 해양유적과 전설>>에서 한나라의 루선장군 양복이 병력 5만명
으로 발해해협을 건너 위만조선을 침공할 당시 이 항로를 개척하였다는 증언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상헌과 명나라의 장연등의 담론에서 밝혀져...
타기도에서 당나라 당시에 세웠던 석각이 발견되었는데 본문이 많이 마모 되었으나 남어지 글자를 연구한
결과 당태종연간에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평양도행군총관을 맡았던 장량이 타기도 에 들려 항해의 안전을
비는 용왕제를 올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 부장이던 정명진이 개주에 있던 비사성을 유린하여 8천명의 포로를 잡고 평양방어선이
뚫리자 타기도에 도착하여 평양성을 치기 위하여 용왕제를 올린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에서는 정명진이 비사성을 함락시킨 날자가 장량이 타기도에 도착한 날자보다 빠르기 때문에 정명진이
장량보다 먼저 비사성으로 출발한걸로 추정하였으나 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비사성이 평양성의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비사성은 개주의 바다에 있던 성이었다가 지진으로 윤몰된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만약에 당시 장도가 당나라의 영토였다면 타기도 보다 훨신 규모가 큰 장도를 제외하고 타기도에서 용왕
제를 올렸을 이유가 없습니다.
타기도는 한나라시대에도 위만조선을 치기위하여 창해군을 설치하였다가 실패한 장도의 인근 섬입니다.
이곳에 진번군이 있었습니다.
오호진이 있던 본 오호도는 윤몰되었으나 이후 북황성도(황색사각선내)로 옮겨 오호도로 표시하였고,
현재 대련의 대흑산에 있는 비사성도 본 성은 개주의 바닷가에 있던 해성이었으나 바다로 윤몰되어
그 이름을 대련으로 옮겨놓은것입니다.
<해주 남해군>
海州 南海軍 節度, 本 沃沮國地, 髙麗 為 沙卑城, 唐李世勣 嘗攻焉. 渤海 號 南京南海府, 疊石 為 城,
幅員 九里, <요사><지리지>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