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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의 에세이 사물들의 세계(The Universe of Things)
사물들의 세계
영국의 SF 소설 작가 귀네스 존스(Gwyneth Jones)의 단편소설 "사물들의 세계(The Universe of Things)
지구에서 알루샨 종족의 현존은 우리의 고질적인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여길 수 없으며, 더욱이 창조의 정점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근대성(modernity)은 인간의 위치 이동과 탈중심화의 긴 연쇄로 이해되곤 하는데, 그저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 다윈(Darwin), 그리고 프로이트(Freud)를 생각하거나, 또는 그 점에 있어서는 가리 카스
파로프(Garry Kasparov)를 패배시킨 컴퓨터 딥 블루(Deep Blue)를 생각하자.
존스의 알루샨 종족은 이런 경향의 극치를 나타내는데, 노력이 필요 없는 그들의 우수성 때문에 우리는
멍하고 당황스런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SF 소설에서 자주 신화화되는 최초 계약의 문제가 아니다.
존스의 외계인들은 수 세기 동안 지구에 머무른다.
그들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결코 충격적인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데, 그것이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습관과
가정들 속에 엮이게 되었을 때에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알루샨 연작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탈인간주의 시대에 진입할 때 강요받는 적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귀네스 존스의 알루샨 연작 전체 안에서, "사물들의 세계"는 알루샨 종족과 우리 자신들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우리와 달리, 그들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생동적이라는 사실이다―에
집중한다.
알루샨 종족의 도구들은 그들 자신의 생물학적 돌출인데, "그들은 기어가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흘러
가는 도구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것들을 제작하지 않았었다 ...
그들은 박테리아로 사물들을 만들었다.
외계인들의 장에서 서식하는 식물에서 유래한 박테리아는 모든 것을 감염시켰다."
알루샨 종족은, 사실상, 모든 매체는 우리 자신의 보철적 확장이라는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의 테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알루샨 종족은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모든 측면에서 스스로를 외부화한다.
그들의 연결망들은 그들 자신의 육체와 즉각적 환경을 넘어서 멀리 확장된다.
그들은 느낌과 기억도 공유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그들이 발산하여 서로 교환하는 점액으로 화학적으로
코드화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외계인들은 떨어져 있음을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의 연속체에는 부분, 공간, 분할하는 경계가 전혀 없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살아있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알루샨 종족의 살아있는 세계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슬픈 데카르트적 유산에 갖혀 있는 방식과 날카
롭고 쓰라린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계주의적 기술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들을 더욱 더 많이 사용하는 때
에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생기가 없는, 또는 그저 수동적인 물질의 세계 속에 갖힌 채 홀로 살아 있다는 서양문화에
특유한, 널리 퍼진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존스는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 자신의 기계들은 "약속했지만, 그것들은 수행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사물들이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고독했다."
존스의 소설 속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외계인들은 인간의 고립에 대한 해결
책―말하는 세계, 눈이 있는 세계, 신이 꿈꾸는 교제―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사물들의 세계"는 외계인이 자신의 자동차를 수리하기 위해 고용하는 인간인 자동차 기계공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기계공은, 대부분의 인간처럼, 외계인들을 외경심을 품고 보는 동시에 그들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을 느
낀다.
외계인이 자신의 차량 수리를 그에게 맡길 때, 그는 영광으로 생각하며 겸허한 마음이 들지만, 또한 대단
히 불안해진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위해 선발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외계인이 알루샨 종족 자체의 살아있는 수송 방식
을 고수하는 대신에 열등한(그리고 생태학적으로 유해한) 지구 기술을 먼저 사용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기계공은 그의 혼란스러운 모든 감정을 차에 집중한다.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일종의 인간적 긍지인 "장인 정신의 비법"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는
자신의 공방에서 일반적으로 수리 작업을 행하는 모든 기계를 꺼고 외계인의 차를 손으로 수리하겠다고
결심한다.
긴 저녁 시간 동안 자동차를 수리하면서 기계공은 현시―또는 환각―를 경험한다.
그는, 잠깐 동안, 외계인들의 "살아있는 세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경험하는데, 그 자신의 도구들이
생동하는 듯 보인다.
그 경험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금속 막대가 빛을 잃을 때까지 자신의 손에 든 스패너를 노려보았다.
피부가 서서히 그것을 감쌌고, 조절할 수 있는 구멍은 컵 크기의 근육이 되어 항문처럼 오므라들고, 젖은
입술이 부풀어 오른 막대 위 비틀림에 의해 물러나 있었다."
살아있는 세계는 외설적이고 포르노적이었다.
현존은 숨이 막힐 정도이고 참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자아, 인간적 실체로 가득찬...살아있는 점액질"로 뒤덮혀 있지만, 아무튼 타자가 된다.
이것이 여러분이 "외계인의 마음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여 외계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유쾌하다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계공은 겁이 나고 불쾌감을 느낀다.
그가 바라는 전부는 관행적인 인간 세상―객체들은 "죽어있고, 그래서 안전"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
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는 세상―의 고독과 안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물들의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객체들의 생동성과 그것들이 우리와 관계를 맺는 방식들에 관해 생각
하도록 부추긴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사물들로 도구들을 만들고, 그래서 사물들을 우리 자신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제약
했을 때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그것들 나름의 독립된 삶을 누린다고 시사한다.
말하자면, 도구들은(사물들 일반과 마찬가지로) 브뤼노 라투르가 행위소들―우리 자신이 그런 것과 꼭
마찬가지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물들은 그것들 나름의 힘들, 그것들 나름의 타고난 경향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사물들을 이용하고, 그것들을 도구로 채택할 때, 우리는 실제로 그것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맹은 의존성도 의미하는데, 우리는 우리 도구들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아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는 제인 베넷이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생기가 모든 사물에 의해 공유되"며, 우리 자신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무언가를 상정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이것을 암시할지라도, 또한 그것은 사물들의 생동성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도 극화한다. 기계공의 경험 속에서 경이는 공포로 바뀐다.
모든 것이 "인간적 실체"로 가득차 있다는 의식은 위협적인 생경한 생기에 대한 편집증적인 전망으로 뒤집
힌다.
완전히 생기 있는 세계의 마법은 크툴루의 악몽이 된다.
우리는 물질의 활력에 위협을 느낀다.
우리는 사물들의 과도한 근접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것들이 자율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생각을 참을 수가 없는데, 이런 삶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에
게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객체들은 결국 수동적이고 비활성적이라는 점을 필사적으로 재확인한다.
존스의 이야기는 "사물들" 일반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적으로 도구들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도구들은 우리로 하여금 비인간 행위소들, 활기찬 물질, 그리고 객체 독립성의 역설들을 가장 전면적으로
직면하게 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객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구들은 우리 자신의 확장이고, 우리 자신의 욕구들에 봉사하도록 명시적으로 만들어낸 사물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 도구들에 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그것들은 저기에
존재할 뿐이다.
하이데거가 서술했듯이, 최소한 그의 저작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도구들은 손 안에 있으며,
우리가 이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도구들의 바로 이런 이용가능성이 그것들에게 기묘한 자율성과 생기를 부여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그냥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아챈다.
우리는 그것들에 맞서기보다는 그것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과 욕구뿐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욕구를 감안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에 대한 내 언급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물들의 세계"가 그레이엄 하만이, 하이데거의 개념을 확장하여, 도구 존재(tool-being)라고 부
르는 것의 알레고리로서 잘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만은 손 안에 있음을 실용주의적 견지―이것은 얼마 전에 내가 그 개념을 사용했던 방식이다―에서 읽는
일반적인 독법을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하만에 따르면, 실용주의적인 명시적 이론화와는 대조적으로, 손 안에 있음은 사물들의 실용적인 조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 안에 있음이라는 범주는 훨씬 더 넓은 범위를 갖는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도구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심지어 죽은 나방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의 떨림의 눈 앞에 있음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이런 사물들이 아무리 '쓸모가 없을'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자들의 전체 체계 안에서 자체의 실재성을 발휘한다."
사물들은, 우리들에 대한 그것들의 현전의 어떤 척도도 훨씬 넘어설 정도로, 적극적이고 상호작용적이다.
도구 존재는 그저 사물들의 인간적 사용에 적용되지 않는데, 그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범주이다.
귀네스 존스의 이야기는 사용 대상으로서의 도구라는 친숙한 의식으로 시작하지만, "사물들의 세계"는 더
심층적인 실재가 있다는 기계공의 발견으로 끝난다.
하만의 분석에서 도구 존재와 관련된 중요한 점은 그것이 단순한 현전으로부터의 본원적인 물러섬(with
drawal), 그래서 어떤 이론화이든 그것의 가능성으로부터의 본원적인 물러섬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저작 전체에 걸쳐, "조심해야 될 단 하나의 오류는 존재자들을 눈앞에 있는 것, 즉 그것들
자체의 행위로 인정받기보다는 서술할 수 있는 특성들로 표상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몸에 밴 습관에
놓여 있다"고 하만은 말한다.
이런 환원에 반대하여, 하이데거는 항상 "인간적 맥락 밖에 존재하는 것은 눈앞에 있음이라는 존재 양식을
갖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사물을 그것의 눈앞에 있음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바로 그 사물을 그것을 지각하는 의식의 상관물로서만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은 항상 자체의 성질들 이상인데,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특수한 방식들에
독립적으로, 그리고 그것들을 넘어서, 항상 존재하고 행위한다.
이것 때문에 하만은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상관주의에서 빠져 나와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하만은 모든 존재자들이 도구 존재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그저 눈앞에 있음으로, 또는
특성들의 단순한 목록으로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도구 존재 자체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두 가지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압도적인 은밀한 힘의 수행이자, 명시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실재를 불러일으키는 데에도 작용
하는 힘의 수행이다."
한편으로, 하만은 "도구 존재들은...눈에 띄지 않는 배경의 작업으로 물러난다...일반적인 도구적 효과로
용해되는 존재자들은 독특한 지시 체계 속으로 사라지며 자체의 특이성을 상실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도구들을 당연히 여길 수 있게 되는데, 심지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것들을 대상으로서도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의 "도구적 효과"에 의존하며, 이런 효과성 자체가 동맹자들, 매개자들, 그리고 중개자들의
방대한 연결망의 결과라는 점을 잊는다.
그런 것이 "사물들의 세계"에서 기계공이 처음에 상정하는 자기만족적인 가정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도구 존재는 대항운동, 즉 반전도 포함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에 의해 '부러진 도구"라는 형식으로 요약된다.
도구 또는 사물이 기대한 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그것의 존재의 과잉이 갑자기 우리에게 드러난다.
하이데거를 급진화하여 하만이 멋지게 서술하듯이, "별개의 요소들의 봉기...광물들과 군대 깃발들과 열대
고양이들의 생명의 마당으로의 쇄도"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각 객체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유혹하며, 소형 중성자별처럼 자체의 에너지로 우리를 폭격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도구는 현전 이상의 것인데, 그것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격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을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상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도구 또는 사물이, 소설에서 기계공이 갑자기 경험하듯이, 살아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봉기 또는 탈은폐가 바로 객체지향 존재론의 근거인데, 하만은 객체지향 존재론을 "이런
특정한 객체들의 독특한 힘, 존재의 제국으로부터의 개성들의 분출을 제대로 다루려는" 노력으로 서술한다.
나는 하만의 첫 번째 저작 <도구 존재(Tool-Being)>의 처음에 나오는 이 분석을 근본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하만 자신은 그것을 거부할지라도 말이다.
하만은 도구와 부러진 도구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해에서 시작하지만 재빨리 다른 입각점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도구 존재>의 첫 번째 부분은 이중 운동을 서술하는데, 하나는 도구의 보편적 지시성으로의 퇴각, 또는
"시야에서 물러서 있고 특수한 존재자들이 없는 압제적인 전체"로의 퇴각이다.
그 다음에 절대적 특이성들의 분출, 즉 "의미의 구조에 있어서의 치명적인 구멍, 상당한 개별적 힘의 탄생
을 규정하는" 각 객체의 출현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보면 하만은 이런 이분법을 붕괴시킨다.
그 대신에 그는 객체의 현전으로부터의 물러섬이 지시성으로부터의 퇴각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물의 도구 존재는 진공포장되어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며, 그것과 접촉할 수 있는 관계들 가운데
어느 것도 넘어선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지시성이라는 과잉과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성이라는 과잉 사이에서 진동하는 대신에, 각 개체
는 그것 자체의 접근할 수 없는 진공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그것으로부터 출현하기도 한다.
하만은, 이런 재구성의 결과로서,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 둘 다가 내 이론의 직접적인 적이 된다"고 조심
스럽게 강조한다.
나는 <사변적 전환(The Speculative Turn)>에 실린 한 논문에서 하만에 맞서 화이트헤드 편(그리고 내가
약간 놀라게도, 또한 하이데거 편)에 섰는데, 여기서 나는 그 논쟁을 쫓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나는 하만이 도구와 부러진 도구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에서 알아낸 이중 운동의 후속적인
긍정적 함의들을 그냥 계속 추적할 것이다.
사실상, 이 이중성이 귀네스 존스의 이야기에 중요하다.
"사물들의 세계"는 바로 객체들이 단순한 현전으로 환원불가능한 방식을 나타낸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이런 과잉이 두 가지 상보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시사한다.
한편으로, "사물들의 세계"는 전적으로 체계적이고 자기지시적인데, 도처에 존재하는 하나의 매체로서,
또는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의 그것은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명백하거나 현전하는 것을 훌쩍 넘어 뻗어
있다.
그것은, "인간적 실체"가 모든 곳에 존재할 때 그 실체는 인식할 수 없게 뻗게 되고 흩어지게 된다는 역설
을 나타낸다.
이것은, 마셜 매클루언이 매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서술했을 때 그가 다다르고 있는 과정과 동일하다.
매체 자체가 모든 곳에 뻗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그것을 투사하면, 그것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고 우리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쳐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관계들을 맺게 한다.
"모든 매체는 우리를 철저하게 습격한다...그것들은 우리의 어떤 부분도 건드리지 않는 채, 영향을 주지
않는 채, 변경시키지 않는 채 그냥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물들의 세계"는 개별적 객체들의 외설적인 분출 속에서, 그것들의 생기성과
특이성 속에서도 드러난다.
"모든 도구가...행동에 나설 때," 기계공은 "기계 속의 살에 대한 유령 같은 느낌"의 습격을 받는다.
이런 기계들 각각에서 그는 한 "방울의 자아", 하나의 살아있는 의지를 발견한다.
이런 전망에 대한 그의 공포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너무나 격렬하고 과도하게 자극적인 사회적 경험
이어서 중앙 신경 체계가 견딜 수 없다"는 매클루언의 주장을 예증한다.
사물들의 세계와의 그런 고양된 접촉은 충격적이다. 자동차 기계공은 구토와 공황 상태에 이른다.
그는 도구 존재의 두 가지 면의 최악의 것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도구들이 그것들의 "도구적 효과"를 위해 물러서 있던 "압제적인 전체"에 의해 질식당한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그는 "개별적 요소들"로서 자체의 자율성을 과시하며 그의 주목을 요구하는 자신의
도구들의 봉기에 의한 위협을 느끼게 된다.
도구 존재의 이중 운동―퇴각 및 분출로서의―은 사물들이 영원히 우리의 파악을 벗어나 있는 대안적이
지만 공존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가리킨다.
퇴각과 분출이 공유하고 있는 바는 그것들이 다같이 주체와 객체, 또는 인간 지각자와 지각되는 세계의
어떤 상관물로도 환원될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현전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래서 인간중심적인 맥락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 양식이다.
내가 사물을 통제하고 도구화할 수 없다면, 이것은 그것이 그것들의 전체 분맥들을 내가 추적할 수 없는
확장된 지시적 연결망들로 나를 끌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의 특이성이 돌출하면서 무엇
이든 내가 그것에 관해 상정할 수 있는 것의 과잉 속에서 나를 아연실색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퇴각과 분출은 둘 다 사물들이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모을 수 있는 것보다 그것들에게 더 많은 것이 있다
는 점을 예증하게 하는 운동이다.
한 사물은 그것의 특징들과 성질들에 관한 어떤 목록―아무리 확장되더라도―으로도 결코 완전히 규정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넘어서, 그것은 그것 자체의 자율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제인 베넷이 서술하듯이, "이 물체들의 능력은 수동적인 '다루기 어려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일어나게 만드는 능력, 효과를 산출하는 능력도 포함한다...
저항과 변화무쌍한 행위주체성의 사물 힘들이 더 날카롭게 두드러지게 됨에 따라, 모든 물체들은 단순한
객체 이상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도구 존재는 사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데, 그것이 현전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같은 이유로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후속적인, 아마도 놀라운, 한 결과를 낳는다.
객체들이 서로 만날 때, 그들이 맺는 관계의 기본 양식은 이론적이지도 않고 실천적이지도 않으며, 인식
론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런 것들에 앞서, 객체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미학적 관계이다.
하만이 서술하듯이, "미학이 제일철학이 된다."
미학은 사물들의 특이성과 보충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미학은 사물들이 인지될 수 없거나 개념들에 종속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그것들과 관련이 있
으며, 그리고 또한 사물들이 활용될 수 없거나, 규범적으로 규제될 수 없거나, 또는 규칙에 따라 규정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
내가 한 사물을 아무리 깊이 이해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아무리 실용적으로 또는 도구적으로 사
용하더라도, 여전히 내 범주화를 벗어나는 그것의 무언가가 있다.
내가 한 사물을 삭제하거나, 또는 완전히 다 써버릴 때에도, 여전히 내가 편입하지 못한 그것의 무언가가
있고, 내가 포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어떤 힘이 있다.
미학은 객체를 이해되거나 사용될 수 있는 그것의 측면들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 느끼는 것을 포함한다.
사물은 그것의 연결망으로 물러서며 나를 그늘 속으로 유혹하고, 그리고 그것은 나를 아찔하게 하고 눈
멀게 하는 광휘 속에서 돌출한다.
이런 경우들에, 이해는 좌절되고, 의지는 힘의 한계에 이른다.
내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하만이 "존재의 순전한 진실성"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있는 사물의 행위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의지를 넘어서는 미학적인 방식일 뿐이다.
돌출하는 사물들의 아찔함은 하만이 매혹(allure)이라고 부르는 것―객체의 현존이 그것 자체의 성질들과
떨어져 있는, 그리고 넘어서 있는 감각―이다.
매혹은, 정확히 말하자면, 접근할 수 없는 것의 돌출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실재의 또 하나의
다른 층위로 초대한다."
매혹이 일어날 때, 나는 모든 규정이나 상관관계를 넘어서는 사물의 바로 그 존재를 만난다.
나는 내게서 전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것의 통합성을 강제로 인식하게 된다.
그런 만남은 세계의 매개변수들을 변경하며, "의미의 구조"를 찢고 모든 합의를 깨뜨린다.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새로움(novelty)이라고 부른 것―새로운 존재자, 즉 이미 언급된 것에 속하지 않고
사전에 합의된 어떤 지평 안에도 잘 속하지 않는 무언가―을 도입한다.
그러므로 하만에게 매혹은 "세계 내 변화의 기관"이다.
그런데 우리의 파악을 넘어선,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배경의 작업 속으로의" 사물들의 퇴각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종류의 미학적 사건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변신(metamorphos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매혹과 대조를 이룬다.
변신은 일종의 걷잡을 수 없는 끌림, 물러섬과 대체의 운동, 연속적인 생성 작용이다. 변신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자체의 성질들을 넘어서 있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나를 앞으로 잡아당기는 것은
오히려 사물들이 일종의 변화무쌍한 흔들림 속에서 잔물결을 일으키며 변화할 때의 바로 그 부동성이다.
사물이 자체의 성질들 아래로 미끄러져 밀려날 때, 사물의 모든 속성은 불안정해지고, 내가 쫓을 수 없도록 서로 관계하고 지시하며 배경으로 퇴각한다.
그러므로 변신은, 화이트헤드가 서술하듯이,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자 안에 존재
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매혹의 운동에서는 사물이 자체의 맥락에서 격렬하게 출현하면서 의미망이 찢어지지만, 변신의 운동에
서는 사물이 자체의 갈라지는 흔적들의 연결망 속에서 길을 잃으면서 의미망이 증식되고 확장되며, 반향
되고 왜곡되며, 무한으로 전파된다.
"사물들의 세계"의 자동차 기계공은 이런 두 가지 운동에 의해 동시에 압도된다.
매혹과 변신 둘 다 화이트헤드가 "느낌에의 유혹"라고 부르는 것의 사례들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가장 독특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지만, 나는 그것이 미학적 끌림(그리고 밀침)의
근거를 잘 서술한다고 생각한다.
유혹(lure)은, 어떤 식으로, 내 주의를 사로잡기 위해 작동하는 무언가이다.
그것은 나를 꼬드기거나, 나를 자극하거나, 나를 부추기거나, 나를 충동질하거나, 나를 굴복시키거나,
심지어 나를 때려 눕히고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저 너머에서 내게 말을 건다.
유혹은 화이트헤드가 명제(proposition)라고 부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명제들(그것들 가운데 논리적 명제들은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을 "특수한 현실태들에 관해
말해질 수 있는 이야기들"로 규정한다.
달리 말해서, 명제는 내게 어떤 종류의 가능태(potentiality)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차이의 전망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가능태 또는 차이는 항상 어떤 "특수한 현실태"에, 하나의 현실적 사물이나 사물들의 집단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내가 사물들을 그저 적나라한 감각 여건들(sensa)의 다발들, 또는 눈앞에 있는
성질들의 다발들로 만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하만과 의견이 일치한다.
오히려, 우리는 사물들이 내게 수작을 걸거나, 또는 (미에 대한 스탕달의 유명한 서술을 인용하면) 어떤
"행복의 약속"을 제안한다고 말해야 한다.
한 사물의 성질들―또는 더 정확하게는, 화이트헤드가 그 사물 속에 구현되어 있는 "영원한 객체들(eternal
objects)"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물이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내게 제시하는 미끼일 뿐이다.
어떤 특수한 사물이 심층에서 출현할 때 그것은 나를 아찔하게 만들 수 있으며, 또는 끝없는 미로 속으로
물러섬으로써 그것은 내 흥미를 끌고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유혹이 "느낌에 대해 제시"되었고 "그리고 느낌에 수용될 때 느껴지는 것을 구성
한다."
내가 유혹에 반응할 때―그리고 내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더라도―나는 가능한
것을 상상하게 되거나, 또는 "명제를 향유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내가 느끼지 못했을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나는 여기서 느낌의 문제가 핵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존재자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데, 하만이
사물의 실재는 그것에 대해 지각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리고 객체들이 만날 때, 그것들은 "서로
의 실재를 망라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런 인지적 실패와 실용적 실패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지식과 능력이 부재할 때에도, 존재자들은 서로 "느낌"으로써 상호작용한다고 완곡히 말하
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서로 미학적으로 만나며, 그저 인지적으로 또는 실용적으로 만나지는 않는다.
나는 항상 사물에 관해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며, 그리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그것을 느낀다.
내가 어떤 객체를 정말 알고 있는 정도까지, 나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고, 그것을 성질들을 나열할 수 있고,
그것을 자체의 구성 부분들로 쪼갤 수 있으며, 그것을 결정한 원인들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객체를 느끼는 것은 그 밖의 다른 무언가도 포함한다.
사물이 내게 영향을 미치거나 나를 변화시킬 때 나는 그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저 사물의 어떤 성질들이 아니라, 그것의 총체적인 환원불가능한
현존이다.
화이트헤드의 견지에서, 사물들에 관한 우리의 항상 불완전한 지식은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뚜렷한 친숙한 감각 여건"의 형태로 온다.
이것들은 경험주의자들의 관념들과 인상들, 즉 객체의 셀 수 있는 특성들이다.
현시적 직접성은 데카르트의 "명료하고 뚜렷한" 관념들의 영역인데, 그것은 하이데거가 그저 눈앞에 있
음으로 경시한 것과 대충 등가적이다.
그런데 사물들은 이미 어떤 그런 명시적 성질들의 현시에 앞서, 화이트헤드가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이라고 부르는 것의 양태로,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양태에서는, "둘러싸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로의 느낌의 유입이 우리를 압도하는데,
반(半)수면 상태의 흐릿한 의식 속에서 감각의 현시들은 사라지고, 우리 주변의 모호한 사물들로부터의
영향에 대한 모호한 느낌이 남는다."
우리가 실재적 객체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감각적 객체들"과 기회원인론 또는 대리적 인과관계에 대한
하만의 역설들을 직면하게 되는 것은, 자체의 불가피한 한계점들과 잘못된 점들을 지닌 현시적 직접성의
영역에서만 그렇다.
인과적 효과성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우리는 일종의 총체적 접촉, 객체들 사이의 무차별적인 교섭과 관련
된다.
이런 만남들은 전적으로 인지될 수 없는데, 그것들은 결코 명료하고 뚜렷한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모호
한 영향의 느낌들의 먹이"로 방치한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의 개념적 모호성이 그것들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는데, 완전히 정반대이다.
느낌은 항상 느끼는 자의 변화를 수반한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는 경험이 존재인데, 존재자가 느끼는 것이 바로 그 존재자이다.
이것은, 유혹을 "향유하기"의 결과로서, 내가 아무튼 변화되었다―엄청나게든 또는 사소하게든―는 점을
의미한다.
나는 하나의 명확한 결과를 선택했다.
그 결과, 나는 이것이 일어나기 전의 내 자신과 다른 존재자―아무리 미미하거나 어마어마하더라도―가
되었다.
내가 이런 특수한 "새로움의 섬광"에 감동을 받지 않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와 같지 않다.
"지시들의 단일한 거대한 체계"를 형성하는 도구의 세계라는 하이데거의 관련된 관념과 꼭 마찬가지로,
인과적 효과성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관념에도 낭만주의에 대한 하나 이상의 암시가 있다.
사물들의 항상 갈라지는 흔적들의 연결망으로의 물러섬은 십구 세기 초의 낭만주의적 자연관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미디어 공간(mediasphere)이나 전지구적 금융 연결망과
관련시켜야 하거나, 또는 그 밖에 월드와이드웹, 특히 부르스 스털링(Bruce Stering)이 매우 적절하게
"사물들의 인터넷"이라고 부른 것으로 전개되는 월드와이드웹과 관련시켜야 할지라도 말이다.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거역할 수 없는 인과적 효과성이 우리를 짓누르며, 8월의 삼림지에서 윙윙대는 벌레
들의 막연한 낮은 울음 소리 속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느낌들이 우리를 압도하는" 방식을 가리킬 때, 그는 낭만주의와의 이런 연결을 명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막연한 총체적인 둘러싸임의 감각은 인간들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닌데, 그런 감각은 자연 세계
전체에 걸쳐 확대되고, 그래서 동물들과 식물들도 느낀다. 사실상, 화이트헤드는 "모든 기본적 물리량은
벡터이지 스칼라가 아니기" 때문에 무기적 존재자들도, 최소한 에너지의 흐름 형태로, "느낌의 유입"
같은 무언가를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화이트헤드는 낭만주의적 자연관을 더 상세히 검토한다.
그는 영국 낭만주의의 여러 작품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는 장("낭만주의적 반동"에서 그것을 검토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철학 텍스트 대신에 문학 텍스트를 인용하는 매우 드문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화이트헤드가 검토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는 퍼시 비쉬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시 "몽블랑
(Mont Blanc)"―귀네스 존스에게 자신의 단편소설의 제목을 제공한 바로 그 텍스트―이다.
셸리의 시는
영속하는 사물들의 세계가
정신을 뚫고 흐르는
방식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계속 환기시킨다.
내 자신, 나의 인간적 정신이 수동적으로
지금 빠른 영향들을 주고 받으며,
주변의 명료한 사물들의 세계와
끊임없이 교환을 하네.
화이트헤드는, 이 시가 "관념론의 어떤 형태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셸리는 "여기서 자연의 바로
그 존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파악적 통일에 대한 유력한 증인이다"라고 진술한다.
나는 이 논평이 해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념론 대신에, 오늘날 우리는 상관주의로 읽을 수 있을 것인데, 그 시가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적
정신과 지각되는 것으로서의 외부 세계 사이의 대응관계들을 명시적으로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셸리의 관념론이 "칸트적인지 버클리적인지 아니면 플라톤적인지"에 대한 의문은 미해결
상태로 두는데, 후속 연구는 오히려 셸리가, 흄의 제자로서 이제는 대체로 잊혀진 윌리엄 드러몬드(William
Drummond)에서 비롯된 일종의 회의적 관념론으로 바뀐 경험론를 옹호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아무튼, 그 시는 주체/객체 이원론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화이트헤드는 "몽블랑"의 수사법이 그것의 명백한 경험론과 관념론의 기반을 약화시킨다고
완곡히 말한다.
정신을 뚫고 흐르는 것은 사실상 "사물들" 자체―관념들이나 인상들의 형태을 띤 그것들의 표상들이라기
보다―라고 그 시가 진술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셸리의 강조는 그 시의 나머지 부분의 주관주의와 감각
주의에 맞서고, 더 일반적으로는 영국 경험론에 맞선다.
(화이트헤드는 주관주의를 "경험 행위에서의 여건은 순전히 보편자들의 견지에서 적절하게 분석될 수
있다"는 관념으로 규정하고, 감각주의는 "경험 행위에 있어서 일차적 활동은, 어떤 주체적 수용 형식도
없이, 여건을 있는 그대로 주관적으로 마음에 품는 것"이라는 관념으로 규정한다.)
그 시가 "사물들의 세계"를 마음에 그리고 있다는 취지에서, 그것은 우리가 객체들 자체―있는 그대로의
그것들의 악투스(actus)―를 지각하고 그것들에 반응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저 보편자들의 견지에서, 즉 원자론적 "관념들"을 더하고 결합함으로써 분석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이 돌은 회색이다"라는 내 의식은 경험의 일차적 여건이 아니라 "파생적 추상물"일 뿐이다.
화이트헤드에게 명시적인 것 만큼이나 셸리에게는 암묵적으로, 우리의 모든 심적 인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을 가리키고 그것들에 속하는데, "마음의 작용들은 특수한 존재자들에 대해 '결정된' 관념들
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저 일련의 있는 그대로의 고립된 감각 여건들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데, 오히려 우리는
빙하와 숲과 폭포들로 둘러싸인 몽블랑을 실제로 만난다.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적 경험은 우리를 "현실적 존재자들이 많이 있으며,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는 또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 속에서 스스로를 반복한다"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으로 이끈다.
게다가 "몽블랑"은 그것 자체의 명시적인 주제학을 다른 방식들로 전복한다.
한 층위에서, 그 시는 분명히 감각주의적이고 상관주의적인데, 그것은 "나 자신, 나의 인간적 정신"이
"주변의 명료한 사물들의 세계"에서 비롯되는 인상들을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주체/객체 대립쌍을 상정
한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그 시는 "나의 인간적 정신"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가 예외 없이 "빠른 영향들"을
주고 받는 "끊임없는 교환"에 관여한다고 시사한다.
이것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셸리에게 자연은 "본질적으로 유기체들의 자연"이라고 말하게 되는데, 각
유기체는 개별적으로 나머지 모든 유기체를 지각하고, 그것들과 상호작용하며, 그것들에 대한 자체의
느낌들을 통합한다.
더 일반적으로, 화이트헤드는 "셸리와 워즈워스 둘 다 자연은 그것의 미학적 가치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
다는 것, 그리고 이런 가치들은 어떤 의미에서 전체가 드리우는 날개가 그것의 다양한 부분들을 차곡차곡
품는 데서 생긴다는 것을 단호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미학적 가치들"은 매혹과 변신 둘 다를 포함한다.
"드높이 번쩍일" 때 몽블랑은 우리를 매혹시키며, "멀리, 조용히, 닿을 수 없게/ 떨어져 자체의 고요 속에
거주하는" 힘을 나타낸다.
그러나 또한 이 고독한 진공포장된 힘은 상호연결들의 방대한 그물 속의 행위자인데, 그것은 "죽음과 삶
세계의 경계"를 넘고, 심지어 "사기와 절망의 거대한 법전을/ 폐기하기 위해" 잠재적으로 작동하며, 만물을
뚫고 "영원히 흐르는" 변신의 힘이다.
존재자들의 분리, 그리고 그것들의 "누적" 또는 상호침투는 동전의 양면인데, 그것들은 다 같이 주관주의,
감각주의, 그리고 단순한 현전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자연 속 사물들의 상호침투와 "누적"은, 화이트헤드가 인정하듯이, 왜 우리가 흔히 인과적 효과성을 "모호
한 공포"의 형태로 경험하는지 설명한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전적으로 알지 못한 채 "마음 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연의 현전들"을 느낄 때 우리는 불편해진다.
사물들은 그저 너무나 숨이 막힐 정도로 밀착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것들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이거나,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눈 앞에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사물들의 친밀성은 항상 불편하고 섬뜩한 느낌이 드는데, 귀네스 존스의 기계공에게 그렇듯이, 그것은
쉽게 외설적이고 직접적으로 위협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네트워크를 이루는 구술 문화들에 대한 설명에서 마셜 매클루언은 "모든 것이 항상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는 "공포가 정상 상태이다"라고 비슷하게 말한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사물들은 서로 절대적으로 차별화되는 동시에 끊임없이 서로를 지시한다.
상호연결의 공포는, 마치 사진의 음화처럼, 한 존재자가 "완전히 결정된 사실"로 독특하게 구성되는
"만족"에 대한 일종의 반전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특수한 존재자들"의 통일성과 자연의 "날개를 드리우는 전체의 현시" 둘 다를
역설한다.
이런 이중적 주장은 모든 존재자가 매혹과 변신, 돌출과 퇴각, 자체의 절대적 특이성을 드러내기와 지시
와 변환들의 미로로 후퇴하기라는 이중 운동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응한다.
각 존재자는 그것 자체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완전히 결정된 것"인데, 그럼에도 모든 존재자는 공통 세계
(common world)에 속한다.
"우리의 감각들에 의해 지각되는 현실적 요소들은 그것들 자체로 공통 세계의 요소들이다"라고 화이트헤
드는 말하는데, "이 세계는, 사실상 우리의 인지 행위들을 포함하지만 그것들을 초월하는, 사물들의 복합
체이다."
우리는 자신들이 항상 이미 "돌, 나무, 그리고 인간 신체들 같은 지속하는 객체들과 시공간적으로 관련된
색깔, 소리, 그리고 다른 감각 대상들의 세계 내에" 존재함을 깨닫는다.
"우리가 지각하는 여타의 존재들과 같은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이 이 세계의 요소들인 듯 보인다."
사물들은 여전히 서로 구별되지만,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공통 세계에 대한 "같은 의미로..요소들"이다.
이런 주장이 화이트헤드를 들뢰즈와 연결시키는 것인데, 들뢰즈도 존재자들이 서로 차이를 유지하지만
모든 존재자에 대한 "동일한 의미로 존재가 언급된다"고 주장한다.
물러섬과 귀속의 이중 운동이 (레비 브라이언트가 아름답게 부르듯이)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또는,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가 윌리엄 제임스를 참조하여 부연하는 어구로 서술하듯이, "우리는
와글거리는 세계 속에, 동료 생물체들의 민주주의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이런 동료 생물체들의 민주주의, 즉 사물들의 세계에 관한 세 가지 간략한 요점을 제시함으로써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첫 번째 요점은 인간형상론과, 두 번째 요점은 생기론과, 세 번째 요점은 범심론과 관련이 있다.
우선, 이 논의 전체에 걸쳐 나는 자유롭게 일인칭을 사용하고, 지각, 지식, 그리고 느낌에 대한 쟁점들을
다루었으며, 미학의 제일위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쳤다.
이것은, 내가 인간중심주의와 상관주의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간적 모형을 가정한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가? 대답은,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객체지향 존재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각, 느낌,
그리고 미학은 보편적 구조들이지 특정하게 인간적인 구조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만이 멋지게 서술하듯이, "화이트헤드의 경우에...인간들은 아무 특권도 없는데, 우리는 인간들과 그들이
보는 것 사이의 관계와 우박과 타르 사이의 관계를 같은 식으로 언급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존재자들 사이의 접촉 양식으로서의 미학이 "존재론 전체에 속하는 것이지 동물 지각에 관한
특수한 형이상학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자가 "같은 의미로" 세계에 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들 모두에 대해 같은 식으로 이런 내재성을
서술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우박을 인간 주체와 같은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면, 나의 유일한 선택지들은 제거주의와
인간형상주의이다.
나는 항상 처치랜드 부부를 좇아서 인간 경험에 대한 모든 설명을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통속심리학"
으로 일축하고, 과학자들이 물의 상변화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같은 환원적인 물리주의적 언어를
인간 행동을 서술하는 데 채용할 수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내가 "해소하기라는 뛰어난 위업에 관여"하기를 거부한다면, 내가 나 자신을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범주들이 우박에 대해서도 타당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와 꼭 마찬가지로 그것도 그것 나름의 관점이 있으며, 그리고 아무튼 그것은 자체가 접촉하게 되는 타르를 대체로 내가 느끼는 것처럼 느낀다.
내가 이미 특별히 언급했듯이, 화이트헤드는 "느낌을 현실적 세계 전체에 귀속시키"는데, 그는 우박의 느낌
이 인간의 느낌의 방식으로 의식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요점은, 인간중심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심스러운 인간형상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들만이(또는 기껏해야, 인간들과 더불어 일부 동물들만이) 느낌이 있는 반면에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치명적인 이원론에서 확실히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느낌을 우박에 귀속시킨다.
제인 베넷이 서술하듯이, "인간형상론이, 충분히 기묘하게도, 인간중심주의에 맞서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
형상론과 관련되는 위험은 무릅쓸 가치가 있을 것인데, 인간과 사물 사이에 심금이 울리며, 나는 더 이상
비인간적 '환경' 위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나 흔히 인간형상론에 대한 철학의 거부는 인간들과 신만이 창조적 행위주체성의 흔적을 낳을 수 있
다는 오만한 요구와 얽혀 있다."
둘째, 모든 존재자가 느낌을 품고 행위주체성을 행사한다면, 이것은 그것들이 모두―최소한 어느 정도까
지는―활기차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편견들 가운데 일부에 대립된다. 카렌 바라드는, "생기 없음과 생기 있음의
구분이 서양철학과 그것에 대한 비판들에서 가장 영속하는 이원론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자연-문화 이분법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들 가운데 일부조차도 생기 있음과 생기 없음의 구분은 그대로 둔다.
'죽은 물질'도 얼마나 활발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행위주체성에 대한 급진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생물/무생물 구분을 없애는 것은, 제인 베넷이 서술하듯이, 우리가 "생기론도 기계론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십구 세기 생기론은 "엔텔레키가 주입된 생명과 무기적 물질 사이의 질적 차이"를 역설했다.
전자는 적극적이고 목적지향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반면에, 후자는 수동적이고 기계론적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십 세기와 이십일 세기의 과학은 이런 종류의 구분을 지탱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DNA 구조의 발견 이래로 생화학은 생명 활동들이 다른 물리적 및 화학적 과정들과 연속적임을
증명했고, 다른 한편으로, (양자역학은 말할 것도 없고) 복잡성 이론과 체계 이론은 무기적 물리 과정들도
전통적인 기계론적 견지에서 정확히 고려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근대과학은 전통적인 생기론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전통적인 기계론적 유물론을 훨씬 더
나은 위치에 두지는 않는다.
물론, 현대의 과학철학자들은 구식의 의미에서 더 이상 "기계론적"이지 않는 환원주의 이론들을 구성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물들의 존재론적 존엄성을 수용할 수 있고, 그것들을 양자마당들의 환영적 효과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비이원론적인 신생기론이나, 또는 제인
베넷이 생기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사물이 활력이 있고, 활발하며, 생기가 있다"는 관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하게 화이트헤드도 "'생물' 사회와 '무생물' 사회 사이에 절대적 간극은 전혀 없다"고 완곡히 말한다.
게다가, "우리는 무기적 사회의 부차적인 장치가 없는 어떤 생물 사회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명"은 정도의 문제, 즉 많고 적음의 문제인데,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상황에 따라 판별될
수 있을 뿐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는 중간 사례들이 많이 있는데, 바이러스나 컴퓨터 기반 "인공생명"을 생각하라.
가장 단순한 물리적 과정들도 우리가 흔히 알아채는 것보다 훨씬 더 활발하며, 그리고 가장 애매한 생물적
과정들도 항상 비교적 무생물적인 과정들에 묻어 들어가 있고 그것들과 풀 수 없게 얽혀 있다.
활력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지만,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객체들의 민주주의"가 또한 "동료 생물체들의 민주주의"이다.
세째, 그리고 가장 논란의 소지가 많게, 나는 생기적 유물론과 객체지향 존재론 둘 다 어떤 종류의 범경험
주의 또는 범심론을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명백히 가볍게 고려될 단계가 아닌데, 그것은 쉽게 기이한 짓으로 낙인이 찍힐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들은, 분석철학적이든 대륙철학적이든, 과학지향적이든 그렇지 않든, 범심론을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화이트헤드에 관한 내 자신의 최근 저서에서, 나는 그의 사상의 범심론적 함의들을 너무 빨리 부정
했었다.
현재 나는 내 부정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데이빗 스커비나가 설득력 있게 길게 논증했듯이, 범심론은 서양사상에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양사상 속에 깊이 묻어 들어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에 범심론은, 갈렌 스트로슨 같은 분석철학자들과 어느 정도까지는 데이비드 찰머스를 비롯하여, 다양한 학파의 사상가들이 품게 되었다.
내가 여기서 제기한 견지에서, 미학적 경험은 항상 비대칭적인데, 그것은 객체뿐 아니라 주체의 견지에서도 제기될 필요가 있다.
객체들의 세계는 정말 경험하는 것들의 세계인데, 화이트헤드가 역설하듯이, "주체들의 경험 외에는 아무
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으며 무(無)뿐이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각 현실태는 본질적으로 쌍극성이고, 물리적이며, 정신적이다."
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최소한 초기적 형태로 "정신적 극"이 있다.
우리가 "주체는 세계가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상관주의적 견해와 주체는 문자
그대로 "아무도 없다"는 제거주의적 견해 둘 다를 거부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내재적인 의미의 주체성이나, 또는 최소한 어떤 '경험하기' 양식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부터 세계 속으로 유입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원리나, 또는 본원적 창발성에 반대하는 스트로슨의 논증를 수용한다면, 최소한 우리는 "경험하기"가
이미 현존하는 모든 현실적 존재자에게 고유한 것이라는 시각에 개방되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이 명제를 더 이상 논증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을 사유를 위한 유혹, 우리가 사물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대되는 결과로 남겨놓고 싶다.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