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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명나라 신종 연호) 21년 계사년(1593년, 선조26년) 6월에 왜적이 진주를 함락하니 성을 지키던 여러 장수들도 모두 죽었다. 이에 앞서 임진년(선조25년 1592년) 여름에 왜적은 바다와 육지로 길을 나누어 호남을 침략하려고 꾀했으나, 한 길(수군)은 한산도에 이르러 수사 이순신에게 격파되었고 한 길(육군)은 진주성에 이르러 판관 김시민의 저항을 받아 모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왜적들은 항상 분하고 한스러워 하였다
이해 봄에 명나라 장수들과 잇달아 강화를 맺고자 하니, 서울 밖의 왜적들이 모두 영남에 모여 병세(兵勢)를 크게 떨쳤다. 왜장 가등청정은 풍신수길에게 보고하여 다시 진주를 공격하고 이어 호남을 치겠다고 청하였는데 수길이 이를 허락하였다.
6월 14일에 가등청정은 여러 장수들의 병졸 수십 만 명을 규합하여 동래를 출발하여 곧바로 진주로 향하였다. 당시에 총병 유정과 유격 오유충은 대구에, 참장 낙상지와 유격 송대빈은 남원에, 유격 왕필적은 상주에 있었고, 유격 심유경은 왜적의 우두머리 소서행장의 처소에 있었으며 경략 송응창은 서울에 있었다.
유정이 가등청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일본이 우리 속국(조선을 말함)을 해치고 병사들이 연달아 화를 입으니 황상(명나라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특별히 절월(節鉞)을 내리고 용맹스러운 신하를 나누어 보내 長鯨을 모조리 없애버려 동해를 영원히 맑게 하라 하였다. 최근에는 심유경이 오가며 강화를 직접 논하니 일본이 마음을 기울여 싸움을 그친 뒤 정성스런 예를 바쳐 강화하기를 청하고 모두 물러나 무리를 이끌고 자기나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또 부산으로부터 소서비탄수구대부小西飛彈守久大夫를 보내 머리를 조아려 天朝(명나라 조정)의 명을 기다리니 한결 같은 마음과 지극한 정성을 깊이 칭찬할 만하였다. 따라서 천조에서 보낸 백만대군이 모두 압록강가에 이르러 멈추었고 대장 李아무개는 2만을 이끌고 서울에 주둔하였고 총병 郭아무개와 李아무개는 20만을 이끌고 遼東에 주둔하였으며 부총병 吳아무개와 기타 여러 장수들은 병사를 거느려 평양과 개성에 나누어 포진한 것이 또 10여만 명인데, 모두 출병을 누르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약속된 논의를 어기게 되고 당당한 천조의 하늘과 땅 같은 도량을 잃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너희들은 돌아갈 뜻을 결정하지 않고 다시 晉州를 공격하여 갑자기 이전의 약조를 어기려 하고 있다. 너희들은 옛날의 분통함을 씻겠다고 말하지만 저 조선 팔도의 남녀는 씀바귀독 같은 전란을 만나 나뒹구는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창끝에는 머리가 메달려 있으니 또한 처참함이 극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또 무슨 원수가 남아 있단 말인가? 더구나 진양(진주)의 좁은 성에 대해 하필 조그만 증오를 마음에 두어 중국에 대한 커다란 믿음을 기꺼히 잃으려 하는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서 병사를 거두어 너희나라로 돌아간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함으로써 외국에 대한 신용을 잃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다시 어리석음에 사로 잡혀 끝내 전쟁을 그치지 않는다면 조미복선, 누선백조, 용조사선, 동교소소, 해도, 팔라호, 팔장 등의 배에 백만의 무장한 병사를 싣고서 바닷가에서 요격하여 너희들의 귀로를 끊고 너희들의 군량보급을 차단하면 결전을 기다리지 않아도 장차 너희들은 섬 가운데서 저절로 죽게 되어 한 조각의 갑옷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또 관백(풍신수길)과 너는 원래 서로 어깨를 견줄 만하였는데 너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 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관백은 이미 천조를 흠모하여 貢物을 바쳤는데 너희들은 왜 진주를 향하여 다시 포위하려하는가? 오늘 진격할 것이지 퇴각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이에 관련되는 이해가 적지 않으니 여러 번 생각하고 스스로 살펴보아 서제(噬臍)의 후회를 면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왜적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유경이 소서행장에게 역설하여 진주공격을 그만두게 하자 소서행장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나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가등청정이 이 일을 힘써 주관하였소. 온갖 방법으로 타이르는 것 보다 먼저 성을 비워서 그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는 것이 나을 것이오” 하였다.
심유경이 돌아오자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한효순이 말하기를 “진주의 일이 급하니 노야(심유경을 존칭하는 말)께서 힘써 구해주기 바라오” 하였다. 이에 심유경이 말하기를 “저들은 지난해에 이곳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분통과 한을 품고 마음을 단단히 하여 쳐들어 온 것이니, 이제 다른 계책이 있을 수 없오, 다만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소서행장이 말한 대로 한 것이 좋을 것이오” 하였다.
이때 관군과 의병은 모두 함안 등지에 있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왜적의 계책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진주한 곳만 공격한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대저 진주는 호남과 매우 가까워 입술과 치아와 같다 하겠소. 만일 이곳을 버리고 가서 왜적들을 승승장구하게 만든다면 화가 반드시 호남에까지 미칠 것이니, 힘을 합쳐 견고하게 지켜서 왜적의 세력을 막는 것이 나을 것이오”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巡邊使 이빈, 紅衣義兵將 곽재우는 丹城에서 지름길로 山邑으로 들어가고 좌의병장 임계영은 사천에서 곧장 호남으로 돌아갔으며, 수령과 여러 장수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다만 倡義使 김천일, 右義兵將 慶尙右兵使 최경회 , 충청병사 黃進, 거제현령 金俊民, 해미현감 鄭名世, 좌의병 부장 사천현감 張潤, 복수의병장 高從厚 및 그 부장 吳宥, 熊義兵將 이계연, 飛義兵將 민여운 彪의병장 강희보 등은 각각 병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성에 들어갔을 때 여러 장수의 막하 병사 중 쓸 만한 자가 없는데 그들의 성을 나갈 것을 허락하니 모두 수십 명이나 떠나갔다. 오직 김천일 막하에 아들 象乾과 좌랑 梁山璹 , 최경회 막하의 진사 文弘獻, 고종후 막하에 정자 吳玭, 내금위 金麟渾, 참봉 高敬元 등 대여섯 사람만 가지 않았다. 이때 김해부사 李宗仁이 먼저 입성하여 방어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목사 서례원은 기꺼이 따르지 않았다. 이종인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여러 의병장이 지금 모여들고 있으니 가볍게 성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리라” 하자 서례원은 겁이 많은 사람이라 마침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6월 18일에 전라병사 宣居怡와 조방장 洪季男 등이 와서 말하기를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맞서는 것은 참으로 옳지 못하오” 하고 곧 바로 되돌아가 운봉에다 진을 쳤다. 이때 奮義將 강희열은 元帥의 명으로 助防將을 겸하여 여러 고을의 군병을 거느리고 구례 석주관(石柱關)의 棧道를 지키다가 이 말을 듣고 분발하여 말하기를 “관군이 피할 것을 꾀함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하물며 의병이랴?” 하고 마침내 달려 찾아왔다. 적개의병장 邊士貞도 사정이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부장 李潛을 보내니 모든 부장들이 말하기를 “많은 왜적들이 쳐들어오려고 해서 도망가기를 꽤하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들만 무슨 이유로 死地에 나갑니까?” 하였다. 이잠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병사들을 재촉하여 나아갔다. 당시 선거이와 홍계남이 나가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확고한 의지가 없었으나 강희열 등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좋아 뛰면서 분전할 것을 다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 김천일의 군이 500, 최경회의 군이 600, 황진의 군이 700, 고종후의 군이 400, 장윤 이잠의 군이 각각 300, 민여운 강희보 강희열 등의 군이 각각 200여명이었고 여러 수령의 병사 및 본주의 민병과 피난 온 남녀를 포함하여 6-7만 여명이 되었다.
이빈이 영을 전하기를 “고종후는 성밖으로 나가 선거이, 홍계남 등과 합세하여 밖에서 도우라” 하였다. 성안에 있는 장병들도 대분 그렇게 하라고 권하였으나 고종후는 모두 듣지 않았다(지난해 금산전투에서 父兄이 同殉하여 몸이 초췌하였다). 이에 성을 나누어 지키기로 하였다. 성의 남쪽 촉석은 가장 험하여 적이 범할 수 없었으나 동 서 북 三面은 왜적과 맞서기에 걱정스러웠으므로 의병으로 하요금 지키게 하였다. 황진 이종인 장윤은 각각 수십 명을 이끌고 왜적이 접근한 곳을 따라 가면서 구원하기로 했고, 막하의 많은 유생들도 몸소 술과 밥을 가지고 성을 돌면서 병사들을 먹이기로 하였다. 약속이 이미 정해지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으로써 지킬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19일에 명나라 장수가 상주목사 鄭起龍과 함께 와서 성지(城池)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남으로는 큰강이 있고 북으로는 깊은 연못이 있으니 실로 하늘이 만든 땅이오, 또한 총병 유정이 밖에서 돕고자 대구로부터 병사를 움직여 선봉이 이미 함양에 도착했는데 우리를 보내면서 먼저 알려주는 것이오” 하였다.
20일 아침에 심유경이 帖文(첩문: 위에서 아래로 보내는 공문)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의 내용은 지난번에 말한 대로 성을 비워주고 싸움을 피하라는 뜻이었다. 이날 오유, 이잠 및 이 고을의 무사 鄭國祥 등이 성 밖에 나가 왜적을 엿보았다, 왜적의 선봉이 이미 고을의 경계에 들어섰는데 두 장수가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자 정국상 등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두 장수가 왜적을 만나 쫓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필시 도망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두 장수가 각각 여러 명의 왜적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자 성안에서는 북을 치며 떠들썩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칼을 뽑아들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성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의사로다. 내가 급함을 알려 도우러 오도록 하리라.“ 하고 즉시 정기룡과 함께 돌아갔다.
처음에 김천일이 함안으로부터 와서 양산숙, 홍함(洪涵) 등을 보내어 유정에게 원병을 청하는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 글은 고종후가 지은 것으로 말의 뜻이 격렬하였으며 이어서 양산숙도 말하는 기운이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유정은 다 읽기도 전에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고쳤으나 끝내 군사를 출정시킬 뜻은 없었다. 홍함이 돌아오는 길에 양산숙을 버리고 달아나니 산숙이 울먹이며 말하기를 ”위급함을 만나 구차하게 도망하여 主將만을 홀로 사지에 빠지게 하는 것은 義가 아니다.“ 하였다. 마침내 혼자서 말을 타고 성으로 돌아오니 모든 군사가 놀랬다.
21일 진시(오전 7-9시사이) 왜적의 騎兵 수십이 동북쪽 산위에 출몰해서 아래를 살펴보고 돌아갔다. 사시(오전 9-11시 사이)에 또 기병 수백여 명이 북쪽 산에 올라가 진을 치고 兵勢를 뽑냈다, 조금 뒤에 많은 군사가 계속 이르러 성을 세겹으로 포위하고서는 탄알 한방도 쏘지 않았다, 성안에서도 역시 병사들을 머무르게 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이내 왜적이 물러갔다. 개경원(開慶院:진주 동쪽 2리에 있는 院)으로부터 마현(馬峴에 이르기까지 큰 진영이 세 곳이나 있었고 그 나머지의 조그만 진영도 밤하늘의 별이나 바둑돌처럼 헤아릴 수 없었다.
22일에 왜적이 성 밑에까지 바짝 다가왔다. 이침부터 포시(哺時: 오후 3 -5시 사이)까지 철환이 비 오듯 쏟아졌으나 성안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막아내니 왜적이 이내 물러갔다. 강희보가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이와 같으니 관군에게 죽음을 각오한 용사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오” 하고 자기 막하의 임우화(林遇華:광양 출신으로 박식하고 담력과 지략이 있는자로 석주관 잔도를 지키다 강희보 강희열과 함께 진주성에 합류함)로 하여금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 나가도록 하였으나 5리도 못가서 왜적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로 적이 올 때마다 임우화를 묶어서 맨 앞줄에다 놓아두고 보여 주었다. 이날 밤에 왜적은 또 동문을 공격하여 큰 소리를 지르며 성벽을 오르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황진 등이 혈전을 벌리니 왜적은 이내 물러갔다. 서예원이 당황하여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김천일과 최경회가 상의하여 장윤으로 하여금 임시로 주의 일을 맡도록 하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의기가 저절로 배가되었다. 하루는 왜적이 서북쪽 모퉁이로부터 큰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자 성가퀴(陴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를 지키던 자들이 모두 도망가서 성이 거의 함몰 될 뻔하였다. 황진이 칼을 휘두르면서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오늘에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도다.”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돌아와 모여서 마구 화를 쏘아대니 왜적이 다시 물러갔다. 왜적은 또 동문밖에 몇 길(仞 )높이의 산을 만들어 놓고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였다. 이에 황진도 또한 대항해서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몸소 돌을 짊어지고 가니, 남녀가 모두 감동허여 흐느끼면서 일을 도와 하루 밤 만에 이룩하였다. 마침내 큰 대포로 왜적의 소굴을 깨부수니 왜적이 물러갔다. 왜적은 또 나무 궤(木櫃)를 만들어서 짐승 가죽을 씌운 뒤 그것을 짊어지고 와 성을 헐려고 하였다. 이에 황진이 큰 돌덩이를 아래로 굴리고 어지러이 활과 포를 쏘아대니 왜적이 물러갔다. 왜적이 또 동문 밖에 두 개의 큰 나무를 세운 뒤 그 위에 판잣집을 짓고는 성안에다 불화살을 쏘니 집들이 즐비하게 불에 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황진도 역시 반 나절 만에 판잣집을 완성하고 마침내 큰 대포로 왜적의 소굴을 맞춰 깨부수자 왜적이 일단 물러갔다. 이때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성의 한 모퉁이가 무너지니 왜적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마구 뛰어들었다. 김준민은 힘껏 싸우다 죽었고 왜적들은 물러갔다. 왜적이 성안으로 글을 보냈는데 대략 말하기를 “온 백성이 성안에 들어가 일시에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것은 처참한 일이다. 장수 한 사람을 붙잡아 우리에게 보내면, 그 나머지는 성안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만일 강화를 원한다면 쓰고 있는 삿갓을 벗어 세 번 흔들어라.” 하고 글의 끝에다 “6월 27일 羽柴備前宰相豊臣秀家 再拜(우시비 전재상 풍신수가 재배)”라고 적었다. 성안에서 답장을 보내 말하기를, “ 우리들은 변함없이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 더욱이 명나라 군사 30만이 곧 추격할 것이니, 너희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여 살아 돌아 가는 자가 없으리라.” 하였다. 왜적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는 이미 물러갔다.“ 하고 마침내 동문과 서문밖에 다섯 개의 언덕을 쌓고 대나무를 역어 성채(柵)를 만들어 총을 쏘니 姜希輔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또 황진등이 불화살을 쏘아 성채를 무너뜨리니 왜적이 곧 물러갔다. 왜적은 또 커다란 궤를 만들어 사륜거(四輪車)위에 올려놓고 견고한 갑옷을 입은 날쌘 병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수레를 끌고 전진하여 철추(鐵錐)로 성문을 뚫게 하였다. 황진 등이 나무를 묶어 불을 붙이고 거기에 기름을 끼얹어서 던지니 궤에 있던 왜적들이 모두 죽어 왜적들이 모두 죽어 이에 물러갔다.
28일에 서예원이 천경(踐更: 시간마다 보행순찰 하는 것)을 소홀히 하여 왜적들이 몰래 다가와 성을 뚫으려고 하였다. 황진 등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죽기로 싸우니 왜적의 우두머리 한 사람이 탄환에 맞아 죽었고 죽은 사람이 또한 천여 명이나 되었다. 황진이 성에서 내려다 보며 말하기를 “오늘의 싸움에서 왜적의 시체가 해자(垓字: 성 주위를 둘러 판 못)에 가득차니 대첩(大捷)이라 할 수 있겠다” 하였는데 갑자기 왜적 한 명이 올려다 보면서 총을 쏘아 황진은 왼쪽이마에 탄환을 맞고 죽었다. 이종인이 시체를 거두어 삼밭에 묻었다. 이때 황진, 장윤, 이종인, 김준민, 오유, 이잠, 강희보, 강희열 등이 모두 열심히 싸웠는데 黃進의 충렬과 지혜와 용맹이 여러 장수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깊이 의지하였는데 그가 죽자 떠들썩하면서 두려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