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개혁·개방·현대화의 총설계자였던 등소평(鄧小平)은 죽기 전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
<각막은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하고, 기타 장기는 의대(醫大) 실험용으로 제공하라.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유해(遺骸) 고별식도 하지 말라.
조문소도 설치하지 말라. 화장 후 유분(遺粉)은 대해(大海)에 뿌리라.>
등소평은 평소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각막을 비롯한 신체 일부는 의학용으로 사용됐다.
유골은 화장 후 홍콩 반환을 소원하던 생전의 뜻에 따라 대해에 뿌려졌다.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등소평은 거인도 죽으면 ‘한줌의 재’라는 것을 중국 인민에게 각인시켰다.
매장(埋葬)이 오래전부터 한민족(韓民族)의 관습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고려시대 까지만 해도 왕족들은 화장하고 남은 뼈를 작은 관에 넣어 묘를 만들었다.
조선시대 들어와 성리학을 국가 기본 이념으로 삼으면서 화장을 야만의 풍습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매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나타난 것 중의 폐단이 바로 본격적인 풍수사상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는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특유의 사상으로 세계에서 이것을 신봉하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 뿐이다.
하도 복잡한 세계라 뚜렷한 원칙도 없다. 먼저 주장하는 사람이 임자이다.
김영삼 묘소에서 나온 ‘돌덩이’를 ‘봉황알’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참고로 싱가포르의 國父 이광요 前 수상도 화장을 했는데 그의 유언은 “살던 집을 허물라”는 것이었다.
'국가적 성지'로 지정되어 예산이 낭비되고 이웃이 피해를 볼까 염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