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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1리(섬안마을)에 있는 의병장 도암 신태식선생 유허비 앞에서... 09:38:57
義兵大將島菴申先生遺墟碑(의병대장도암신선생유허비)
天馬山 솟은 아래 籠岩川 에워 돌아 섬안의 形局을 이룬 이곳 泯池里는 救國匡正의 擧義로써 仁義를 밝힌 한 義旅將(의여장)의 故地로다. 諱泰植 字悅卿(열경) 號島菴(도암)이니 姓은 申이요 貫은平山이라 高麗太師壯節公 諱崇謙은 始祖요 鮮初 文僖公 諱槩(개)는 派祖니 寒泉處士 諱叔彬(숙빈)의 雲仍(운잉:먼 후손)인 命夏의 맏으로 高宗甲子에나시도다. 資稟(자품)이 剛耿(강경)하고 志氣가 軒昻(헌앙)하며 才諝(재서: 슬기로운 재주)가 영민하여 期望이 遠大하더니 光武壬寅에 立朝하여 通訓大夫中樞院議官에 오르도다. 때마침 島夷(섬나라오랑캐) 창궐하고 國運이 기울자 憤然(분연)히 決起하여 歸田하도다. 앞서 高宗乙未에는 倭의 密偵들을 籠岩場에서 捕殺(포살: 사로잡아 죽임)하는 慷慨心(강개심: 의기가 북받치어 원통하고 슬픈 마음)을 보이더니 隆熙丁未에 義擧의 햇불이 오르자 義兵을 招募(초모)하여 湖左陳을 도와 葛坪戰에서 勝戰하고 다시 忠北丹陽場에서 咸南安邊에 이르는 八道를 누비며 數千의 義旅(의여:의로운 군사)를 召募(불러 모음)하여 大將으로 추대되도다. 都先鋒 全世榮 左先鋒 姜昌根 中軍 柳齋七 參謀 嚴海潤 領率 趙守安과 金雲先을 別砲삼아 죽음으로 報國코자 맹활약하도다. 首義에 許蔿李康秊(허위 이강년)과 謀議하고 江界에서 柳麟錫께 軍國의 情況를 詳問하여 智略으로 討賊하였으니 楊州戰에 賊將 長三郞을 生捕하도다. 戊申의 永平戰에 銃傷을 입고 被捉되니 內亂强盜律을 씌워 殛刑(극형)이 내렸으나 賑民을 頌德하는 碑가 선 事實로써 恩顧를 입어 永平民이 等訴거듭하여 無期에서 七年으로 減刑되더니 賊魁(적괴)의 繼紹(계소)를 口實로 壬子섣달에 數餘年의 囹圄(영어:옥살이)에서 풀려나도다. 壬戌에 上海臨時政府의 천거로 七十餘同志를 모아 大韓獨立後援義勇團을 조직하고 慶北道團長이 되어 救國匡復의 丹忠으로 軍資金을 모으다가 事機顯露되어 嶺獄에서 해포의 苦楚긑에 甲子에 出獄하였으나 亡國의 痛恨과 獄苦의 여독으로 光復前 壬申에 享年 六十九로 考終하니 星熙敬熙(성희경희)로 이어 苗裔蕃衍(묘예번연: 먼 후대 자손의 번성)하도다. 느꺼워 헤아리니 丁未九月에 賊의 返復으로 生家는 灰燼(재신)하고 빈터만 남이 있고 遺蹟은 逼迫(핍박)과 檢束 끝에 歌辭二闋(결)이 전할 뿐이로다. 匡復의 丹誠을 憂懷한 倡義歌는 義旅史를 繡놓았고 疆土찬미와 文物制度를 찬양한 踏山歌(답산가 : 묘자리 잡으려 산을 돌아보는 노래)는 祖國愛를 일깨웠으니 참으로 救國獨立과 啓蒙愛族思想이 充溢한 詞藻(사조)로다. 本道는 이를 文化寶財로 指定하고 나라는 그 愛國衷情(충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을 기려 戊申에 建國勳章國民章을 追敍하도다. 이에 미쁘신 님의 뜻을 한줄 詩로 기리나니.
앙갚자고 지른불길 義로움튼 씨가되어
봄따라 이터위에 勁草(경초 : 억센 풀)로 돋아나니
疾風(질풍)이 몰아친 뒤에야 외려굳게 빛나도다.
歲庚辰(二千年) 梧秋上澣(오추상한 : 음력7월 상순)
文學博士 洪在烋 謹撰(근찬: 삼가 짓다) 聞慶市長 金學文 謹수(근수: 삼가 세우다)
민지1리 앞 섬안교를 건너며 농암 소재지 방면의 풍경... 조항산이 높이 솟아 있다.
섬안교
총연장 110m 교폭 5m 설계 하중 DB 24 Ton 공사기간 1998년 12월31일~2000년 1월 25일
시행청 문경시 시공자 (주)경진건설 설계자 오광희 감독자 김정길 감리자 없음
농암면의 유래가 있는 농바위 앞에서....
농바위 유래
유래1 : 옛날 하늘에서 죄를 지은 선녀를 벌하기 위하여 천마에 농을 두 개 싣고 지상으로 내치니 내려오던 중에 농을 떨어뜨렸다. 그 하나가 농마우 마을에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민지리에 떨어졌다고 한다.
유래2 : 오랜 옛날 총각 구호는 옥황상제의 따님과 남의 이목을 피해 사랑을 나누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지상에 유배되었다. 그는 천마산에서 지냈는데, 하루는 虎患(호환)에 부친을 앓고 통곡하는 처녀 아비를 만났다. 구호는 호랑이를 잡아 소녀의 원한을 풀어주었는데, 쓸쓸한 처지의 두 남녀는 곧 동거하게 되었다. 아비가 임신하게 되었고, 해산 일에 닿았을 때 유배기간이 끝났다. 구호는 공주의 화가 두려웠지만, 운명에 맡긴 채 아비를 데리고 승천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와 공주는 크게 노하여 그들을 지상으로 바로 내어쳤다. 공주가 최초 유배 시에 준 보물 상자와 말은 각각 땅에 내려와 두 농바위와 천마산이 되었다. 구호와 아비는 두 개의 바위가 되었다. 수 백년이 흐른 뒤 두 바위의 하나가 갈라지면서 칼을 든 장한이 나타났으니 이가 곧 견휜이라고 전한다. 이 바위의 모양이 농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농바위(籠岩)로 불러지게 되었고 농바위(籠岩)는 우리면의 지명이 되었다. 이 전설 속에는 구호 총각이 부귀영화를 버리고 아비 처녀를 끝까지 지켜준 것처럼 우리 면민의 순박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고자 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義兵將 申泰植 生家址(의병장 신태식 생가지)
이곳은 구한말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셨던 도암 신태식(1864.11.12.~1932.01.15.)선생의 생가지이다. 이 집터는 1907년경 선생의 擧義(거의) 소식에 일제가 본가를 불질렀으며, 이후 1980년 홍수로 인해 집터가 완전히 쓸려나가 대부분의 원형을 소실한 상태가 되었다. 2005년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발굴 조사를 통해 원형확인과 사당, 안채, 행랑채 등을 순차적으로 복원하였다. 신태식은 초명이 철회, 호는 도암, 본관은 평산이다. 1902년 내부주사 통훈대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고 1907년 8월에는 의병을 일으켜 이강년 의진과 합세하고 문경 갈평리에서 왜적을 맞아 일차전을 치루었다. 이후 경상도 북부, 강원도 지역에서 의병전공을 세웠으며 1908년 7월 경기도 양평전투에서 왼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고 말았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의병운동 중에 저작한 창의가 및 답신가는 국문학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영강이 감아 도는 민지리의 들판
원민지리 마을...... 민지 여성경로당, 민지 공소가 있다.
민지교를 건너서 원민지 앞 영강둑 왼쪽으로......
민지교 총연장 90m 교폭 5m 하중 설계하중 13.5ton , 통과하중 34ton
공사기간 1988년 12월29일~1989년8월19일 시공청 문경군청 시공자 동신건설(주)
과수원에서 전지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다..
산소의 묘비가 특이하여 살펴 보았다. 4남 6여를 기르신 부모님....
평생 자식위해 살다 가신 부모님 감사합니다
(뒷면)
부모님 : 김원묵, 김남춘, 최옥분
자 : 김기태(기대안경원) 자부 : 이영숙(대전출생)
김규완(영일고 교사) 김영희(포항 영일 출생)
김기정(문경초 교감) 신에스터(함창초 교사)
김동규(국방부) 신귀순(전북 전주시)
녀 : 김기순(전주 출가) 사위 : 조영기(전북 전주시)
김기운(농암 내서 출가) 홍영섭(서울시)
김기춘(농암 종곡 출가) 우병업(인천시 부평구)
김기숙(상주 이안 출가) 김경식(이안공업사 대표)
김기욱(가은 출가) 이영우(용궁지업사 대표)
김기자(충주 출가) 윤정환(보성녹돈식당 대표)
손 : 김영로(명지대 교수) 손부 : 정홍경(서울 녹천초 교사)
한국농어촌공사 민지양수장에서 시작하여 수로를 통하여 원민지, 전곡까지 이어진다..
건너편 쪽금산(좌)과 성재산(우)의 능선 중에서 가장 낮은 능선으로 넘어 다녔고,
영강(역류)의 보가 놓여있다.
성재산 아래 민지2리(더대) 마을이 아담하고, 더대교를 건너면 민지송어장이 있다.
산소에 산짐승의 피해를 막으려 담장을 만들었다..
더대교 총연장 97.9m 교폭 B=6m(5m) 설계하중 DB-24, DL-24
공사기간 2008년 9월8일~2009년10월3일 발주자 문경시 시공자 (주) 지오콘
설계자 (주)청우엔지리어링 설계책임자 이행기 감독관 김규년
준공검사관 이욱진 현장대리인 (주)지오콘 정옥진
우사관리가 엉망인 주인때문에 진창에 다리가 빠진 송아지가 밖으로 나와 햇살을 쬔다..
전곡1리에서 직선의 개울이 버스승강장(민지-전곡-성저)아래를 지나서 전곡3리 앞의 영강과 만난다.
버스승강장에서 휴식과 간식을 즐기고 들판길을 걸어 좌측의 (舊) 문양초등학교 쪽으로...
CAMINO REAL 카미노 리얼( 주요 도로, 간선도로 )
교문 안 좌측에 교적비가 있다.
교적비
문양초등학교 1945년 9월 1일 개교하여 졸업생 2476명을 배출하고 2002년 3월 1일 폐교되었음 경상북도교육감
세종대왕상
1985년 9월 21일 제5회 졸업생 29명이 세움. 당시 담임 홍기준 선생님
졸업생 : 오인희 김주연 김광영 조태희 이종관 신동익 금동선 신정식 채영진 서정택 김영환 이면규 송정선
송완선 이종봉 권기복 신성식 김한오 조명자 신화식 신용수 정호섭 이성규 정태진 권동수 박남순
신동구 조창원 신춘희.(29명)
나는 잉카제국의 외교관
본 박물관은 김홍락 전 볼리비아대사가의 30년간 외교관 생활 중 수집한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외교관의 눈으로 바라본 안데스 문명 체험 및 잉카유물 전시관 관람을 통하여 청소년들의 건전한 세계관 함양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설립자 김홍락(金洪洛) 약력
-1952년생. 대구출신 -경북사대부고와 성균관대 법학과 졸업
-스페인 외교관 학교 -과테말라 국립 산 카를로스대(법학박사)
-하버드대 정책연수 -13회 외무고시(79년)에 합격하고 주 칠레, 멕시코, 파나마, 미국(워싱턴, 애틀란타), 에콰도르, 이탈리아 대사관 근무
-주 과테말라대사, 주 볼리비아대사 역임
-한국가스공사 고문 -세계태권도연맹 특별고문 -3급 정학예사 자격 취득
-현재 사단법인 중남미문화포럼 이사장
-상훈 : 2011년 볼리비아 대십자 훈장 2009년 대한민국 홍조근정훈장
2006년 과테말라 대십자훈장, 과테말라 의회 훈장
2002년 에콰도르 기사장 2010년 올해의 외교인상 수
운동장에 캠핑장을 만들어 오늘도 야영객이 찾아왔다.
소양서원이 있는 전곡3리 마을에서...
우측의 보호수(은행나무)와 입구의 현수막(출입 통제)이 시기를 알려 준다.
보호수
품격 : 마을 나무 고유번호 : 11-26-2-7-1
지정일자 : 1982. 10. 26 수 종 : 은행나무 수령 약150년
소재지 :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 9
현수막
코로나19로 인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합니다
- 전곡3리 주민일동 -
소양서원 瀟陽書院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5호) 경북 문경시 가은읍 前谷里(앞섯골) 769-1, 769-6
숙종38년(1712) 처음 설립되었으며 서원의 일반적인 형태인 강학과 제향공간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하고 있다. 고종8년(1871) 서원 훼철 당시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존치되었으며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16세기 가은 인근 지역에서 출생하여 각각 예조정랑, 형조좌랑 등 중앙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암 정언신(懶菴 鄭彦信), 인백당 김낙춘(忍百堂 金樂春), 고산 남영(孤山 南嶸), 가은 심대부(嘉隱 沈大孚) 및 가은 이심(稼隱 李樳)등 모두 5인을 배향하고 있다.
※ 정6품 예조좌랑, 형조좌랑 : 사무관(5급)
전곡3리 마을회관, 전곡3리 노인회관
전곡3리에서 합승하여 민지1리 남경로당으로 돌아와서, 나누어 타고귀가......... 12시06분
첫댓글 섬안마을(민지1리)에서 의병장 도암신태식선생 유허비를 살피고, 농바위를 찾아서 유래도 알아보고 섬안 마을 내의 生家址(잠겨 있음)를 살피며 영강 둑으로 올라서니 한국수자원공사의 양수장이 건너편에 있어서 수로를 통해 원민지리(민지1리)를 지나서 전곡리 들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우농가의 유고로 소들을 추위에 떨게하여 안스러웠다. 전곡리 들판을 가로지른 도로의 버스승강장에서 휴식을 하며 전곡1리에서 흐르는 물길이 승강장 아래를 통해 직선으로 영강으로 합쳐진다. 재단법인 중남미문화포럼 겸 중남미 박물관을 방문하여 새로운 변화를 보고, 운동장을 캠핑장으로 만들어 찾아온 사람을 보았다. 소양서원이 있는 전곡3리를 찾아서 마을 입구에 코로나19로 출입통제 현수막이 있어 초입의 瀟陽書院(소양서원), 暎流亭(영류정), 尊承齊(존승제)를 견학하였다. 역사의 유적이 있는 장소를 찾아 보람있는 탐방이 되어 감사합니다.
葛洞里 들판 농바위공원을 찾았다.들 가장자리에 방치되었던 농짝 바위 傳說을 찾아 公園으로 조성하였다.朝鮮 後期까지 加西面 지역이, 농(籠)바위(岩) 發見으로 100여년전 부터 籠岩이라 부른다.섬안마을 입구 陶庵 申泰植선생 遺墟碑를 만났다.고장의 큰 인물이지만 平山 申氏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각지에서 그분의 흔적을 남겼다.한때 농암지역이여서 이들은 농암으로 就學한다.潁江 最初의 물돌이 마을이라 土質은 肥沃하고 水量도 많아 살기좋은 村落이었는데 80년 水害로 마을이 잠겨 상당수가 건너편 갈동리 새마을로 離村하였다.물길이 돌아 흐르느라 천천히 흘러 더대라고 불리는 泯池2里,一名 물뫼는 城在山 모퉁이에서 솟구치는 良質의 地下水로 松魚養殖場을 40여년째 盛業中이다.코로나 사태만 아니면 꼭 맛보리라 했던걸 지나친다.前谷里 入口 東美山 아래 韓牛畜舍는 100여두의 韓牛를 그냥 방치하여 무릎이 잠기는 수렁에 빠져 소들은 울고있다.간밤에 氣溫은 -10까지 갔다는데 動物학대가 너무 심하여 惻隱之心이다.잉카박물관은 닫혀 있어 휭한 바람만 을씨년스럽게 불고 있다.건너편 瀟陽書院은 淸潔하기는 하나 接近禁止 懸垂幕으로 마을 初入에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順天金氏 삶 모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