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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압력 : 진지전의 전개
1. 휴전협상 초기 쌍방의 군사전략
가. 공산군측의 공세역량 만회전략
개성 휴전회담은 '51. 7. 10일에 시작하였으나 공산군측의 지연전으로 7월 26일에야 이제의 ㅎ바의를 보았고, 그후 속개된 군사분게선 협상에서도 38도선의 주장과 유엔군측의 접촉선 주장이 맞서다 8월 23일 공산군측의 일방적 불참으로 회의 전망은 불투명하였다.
이것은 처음부터 공산군측의 협상 목적이 조기 타결에 있던 것이 아니고 회담을 지연시켜 지난 춘계공세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고 공세역량을 축적하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공의 항미원조사에 명백하고 ㅇ;ㅣㅂ증하고 있다.
"아군이 병력은 우세하나 화력이 열세하고 항공지원이 뒤따르지 못해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 수 없으므로 적극적인 방어전략으로 유리한 지형에서 지구전을 펴면서 적군의 전력과 아군의 전력비를 바꾸어 최종적으로 승리하거니 적군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는 작전지도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전략으로 그들은 소강기를 이용하여 방어선을 3중으로 편성하고 유엔군의 항공이나 포격에도 지탱할 수 있도록 유개화 및 엄체화 했다. 또한 야포, 고사포 등 장비와 화기를 전방에 추진하고 항공기가 2개월 후인 9월에 지원될 것을 고려 9월 공세를 목표로 준비를 강화하였다.
휴전협상은 그들에게는 전력복구와 지구전에 의한 승리획득의 한 방편일 뿐이었다.
나. 유엔군의 제한목표공격전략
(1) 하계공세작전계획
(가) 대공세작전계획의 유보
휴전회담이 시작될 무렵 군사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캔사스-와이오밍선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이곳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할 준비를 갖추면서 휴전협상의 타결을 지원하고 아군의 방어선을 개선함은 물론 적의 공세 역량춪적을 거부하기 위한 균형파괴에 중점을 두고 제한목표공격작전에 국한되었다.
유엔군은 7월 초에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 9월 1일에 실시할 예정으로, 전선에 투입된 중공군을 섬멸하고 평양-원산 선까지 점령할 대공격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를 "제압작전계획"이라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휴전회담의 기대치에 대한 희망으로 행동으로 옮기기 못했다.
(나) 제한목표공격전략의 기본개념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평양-원산으로 전면공격 작전계획의 승인을 받지 못함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범위내애서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적은 소강기를 이용하여 전력을 증강하여 수세에서 공세로의 징후가 보이는 반면 아군은 휴전협상이 성공하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빠져들어 작전활동을 소극적으로 전개하고 적이 공격시 곧 패배로 이어질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관은 적에게는 혼란을 주는 반면 아군의 전선첨단을 날카롭게 다지며 방어선의 취약부분을 개선하는데 목적을 두고 제한목표공격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개념하에 미 제1군단은 기전리부근 고지군에 대한 종심깊은 정찰과 철의 삼각지에 대한 종심깊은 전투정찰을 실시하도록 하고 제9군단은 현행작전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 제10군단은 대우산 공격을 계속할 것과 우인접 국군 제1군단과 협조하여 1031고지에서 뻗어내린 고지군을 확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2일 뒤인 7월 31일에 취소되었다. 그 이유는 이때 시작된 장마가 30년 이래 가장 심한 폭우를 동반하고 기상이 불량하여 시계가 제한되고 통신이 곤란하였으며 이로인해 도로망이 침수되어 부대기동이 어렵게 되었다. 유엔군의 최대무기인 포병과 항공기의 전폭적인 지원이 불가하였다.
따라서 이 작전은 미 제2사단 제38연대가 대우산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단되었으며 장마가 개인 8월 중순에 가서야 재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명령으로 각 군단, 특히 미 제10군단은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하여 아군 병참선과 신캔사스선 방어에 위협을 주는 지형지물을 탈취하는데 목적을 두고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한다
우선 군의 가장 취약한 방어선 중에서 미 제10군단 전선의 중앙, 해안분지 북쪽 고지군을 점령하여 만곡부를 제거함과 동시에 우측의 국군 제1군단의 방어선을 남강까지 추진한다. 다음으로 미 제9군단 정면의 금성분지를 점령하여 철의 삼각지를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함은 물론 철원-김화간의 철로를 확보한다. 끝으로 미 제1군단의 방어선을 10km 정도 추진하여 연천-철원 철로를 확보하여 이를 철원-김화철로와 연결시켜 서울-김화 도로는 물론 이 철로를 군병참선으로 이용한다.
다시말해 벤플리트 사령관의 새 방침은, 첫째 적의 제한목표 공격은 와이오밍선에서 저지하고 둘째 전면공격은 와이오밍선에서 혹독한 응징을가한 후 캔사스선에서 방어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벤플리트 장군은 38도선이 남북간의 군사분계선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를 아래와 같은 이유로 설명을 하고, 와이오밍선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1) 적이 화천지역의 도로망에 접근하게 되면 아군진지의 측방포위를 허용하게 된다
2)전력의 근원이며 서울 시민의 식수원인 화천저수지의 통제권을 적에게 양도하게 된다
3)적이 서울에 너무 근접하여 수도에 대한 기습공격을 허용하게된다.
이밖에도 장군은 국군의 교육훈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조치를 취하게 된다. 우선 총참모장 이종찬 소장과 250명의 초급장교를 미국 보병학교와 포병학교에 보내서 교육받도록 하고 제주도 훈련소를 방문하여 교육ㅎ룬련 기간에 1주간의 야영훈련을 강조하였고, 7월 하순 제9군단에 야전훈련소를 설치한데 이어 각 군단에 1개소씩 4개의 야전훈련소를 설치하였다. 이 훈련소에는 전선의 국군 예비사단이 입소하여 9주 동안 개인훈련부터 대대훈련과정까지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받도록 하여 국구늬 전력화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다) 포복작전
8월 중순에 접어들어 장마가 그치고 날씨가 개이자 제8군사령관은 7월 말에 중단한 제한공격작전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8월 14일에 미 제10군단의 방어선 개선을 목적으로 포복작전을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작전은 해안분지를 공격하기 위한 전단계로 해안분지 동측인 동시에 서화계곡 동측의 884-924-1031고지로 이어지는 "낚시바늘"형상의 종격실 능선을 탈취하여 서화계곡의 기동로를 확보하고 해안분지 동측 전선을 남강을 통제할 수 있는 지역가지 밀어올려 동측방에서 해안분지를 압박한다는 개념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미 제10군단과 우익 국군 제1군의 좌익 사단이 협조하여 8월 18일부터 개시되었다.
*1320 *591
소양강 *602 *884
*1358 *812 *854 *751
*924 국11-20연
수입천 *1290 *965
문둥리 *1031 국수도-26연
*851 *1056
가칠봉 *1026 국8-16연
사태리 1243 해안분지 국8-21연 J-능선
*931 단장의 능선
*백석산 *894 *752 *1059 *981 국8-10연 국수도1-3대대
1142
*1024 *1178 미2-38연
대우산
*940
*901 *983 *773
*883 국7-8연대 피의능선
*554
국7-3연대
국7-5연대 국5-36연
제8군사령관은 이 포복작전과 연계하여 해안분지 서측에서도 미 제2사단이 983고지(피의능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다라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5-36연대가 983고지 전투에 투입되었다. 또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 제10군단의 좌익인 국군 제7사단도 983고지 서측인 554-883고지 공격을 전개하게 되었다.
(라) 맹금발톱작전/아파치작전
군사령관은 8월 말 포복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미 제10군단의 해안분지 서측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8월 27일 군전방사령부 작전회의에서 새로이 9월 5일 "맹금발톱작전"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작전의 주목적은 군의 동부전선을 최대 24km까지 밀어올려 만곡부를 제거함은 물론 이 지역에 투입된 적을 포위 섬멸한다는 개념이었다.
1)상륙부대를 운용하여 원산 점령
2)기갑부대로 해안도로를 다라 원산 남족 적의 보급기지 공격
3)공세작전으로 제10군단 정면의 군방어선 만곡부 제거
이 개략 계획은 유엔군 사령관이 원산부근 상륙작전을 제외하고 승인함에 따라지상작전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군사령관은 8월 29일에 "아파치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명령을 하달 하였다.
이 작전의 목표선은 철원 동측 4km 지점의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 전투지경선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금성북쪽 4km, 이포리 북쪽 2km 지점을 지나 동해안의 말무리로 연결되는 선이다.
미 제9군단, 제10군단, 국군 제1군단이 이 선으로 진격하되 동해안 국군 제3사단의 1개 연대전투단과 미 해병사단의 1개 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특수임무부대가 동해안 도로를 신속히 기동하여 구봉리지역 목표를 점령하고 신속히 저지진지를 편성한다. 국군 수도사다는 특수임무부대를 후속하다 송현리에서 서진하여동부 산악지대의 1092고지와 1098고지를 점령하여 적을 포위 섬멸한다.
국군 제11사단과 제3사단(-)은 남강 남쪽에서 견제공격을 한다. 미 제9군단은 D일에, 미 제10군단은D+2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목표선을 확보한다. 미 제1군단은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에 달 각 군단은8월 29일부터 부대 배치 조정에 중점을 두고 작전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피의능선전투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군사령관은 너무나 많은 희생이 예상되어 9월 5일 유엔군 사령부에 아파치작전을 취소한다고 통보하면서, 9월 중에도 어떤 목표선이 없이 계속 "밀어올리기 전술"로 동부전선을 정리하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1)아파치 작전을 취소한다
2) 대신에 동부전선에서 제한목표공격을 실시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해 줄 것
3)이 작전은 동부전선에서 9월중 내내 실시ㅐ한다
4)10월에는 개성-시변리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 제1군단 지역에서 작전을 실시한다
5)11얼에는 금화에서 고저로 연결하기 위하여 상륙작전을 포함한 작전을 확대한다
6)주일 2개 미군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전투단을 차출하여 30일 기간으로 한국전선에 훈련목적으로 투입하고 교대된 2개 연대는 그 동안 전선의 군단예비로 운용한다
제8군사령관은 9월 8일에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승인을 얻어 아파치작전의 취소와 동시에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최대손실을 강ㅇ요하기 위한 제한목표공격과 위력수색, 현 전선에서 정찰활동을 강허ㅘ하라는 명령을 하달 하였다.
(마) 소타격작전과 대타격작전
미 제8군사령관은 동부전선의 밀어올리리기작전을 9월 말까지 종결짓고 10월부터 서부 및 중부전선 부대로 제한공격작전을 펼쳐 연천-철원-김화 병참선을 확보할 목표로 해안분지, 단장의 능선에서 전투가 한참 진행중이던 9월 19일 2개의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우선 적에게 노출이 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철원-김화 철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9군단을 주공으로 하는 와이오밍선보다 15km 추진함을 개념의 "소타격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다음은 이의 후속작전으로 중부전선의 병참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소타격작전으로 확보한 철로를 이용해 평강-금성-고저선을 확보한다는 "대타격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작전은 동해안 고저에 사단급 규모 이상의 상륙작전을 실시하고 이와 연계, 중부전선의 제9군단으로 동북방으로 진격하여 연결을 이루어 지대내의 적을 포위 . 섬멸한다는 복안으로 상륙부대는 국군 1개 사단과 미 해병대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 제9군단이 북동쪽으로 금성-고저 도로에서 상륙부대와 연결을 시도할 시 군단에 가해질 에상도ㅓㅣ는 위험과 적이 이 작전을 억제하려고 서부전선에 공격을 가할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벤플리트 장군은 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스스로 취소하고 말았다.
(2) 추계공세작전
그러나 이 무렵 미 제10군단이 해안분지를 점령하는 등 동부전선의 방어선 개선 목표를 대체로 달성하고 있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9월의 제한목표공격 결과를 분석한 다음 9월 25일 하계공세를 종료함과 동시에 추계공세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추계작전 지침도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종심깊은 탐색작전으로 적의 전력증강을 억제하며 잘 훈련된 유엔군이 교착된 전장으로 인해 침체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는데 있다.
(가)특공작전(코멘도) / 폴라선 진격작전
군사령관의 작전지도 지침에 따라 아군의 추계공세도 제한목표공격에 국한 되었다. 그러나 추계작전은 비록 중동부전선에서 국군 제8사단, 미 제2사단, 드이 하계공세의 연장선에서 공격을 계속하였지만 중점이 서부전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의 방어선 개선에 두어졌다. 미 제1군단장은 철원-김화 지역 철로확보와 방어선 개선을 위해 타격작전이 취소된 이후 대안으로 "특공작전(코멘도작전)"을 계획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 코멘도 작전은 전선을 역곡천 남안에서 10km(소타격작전은 15km) 추진하여 방어선을 개선하고 연천-철원간 철로 및 병참선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으로 1951. 10. 3일에 실시되어 10월 하순에 종료되었다.
같은 시기에 미 제9군단장도 철원-김화간 철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믄 물론 미 제1군단의 작전을 측면지원할 목적으로 적의 주요 작전기지인 금성을 통제하는데 목표를 두었으며 10월 10일에 작전을 개시하여 제1단계로 금성천(노메드라인)을 확보하고, 제2단계로 금성 남쪽 고지군(폴라라인)을 점령하여 10월 하순에 종료되었다.
그밖에 중동부의 미 제10군단은 하계작전의 연장선에서 추계작전 기간 중 미 제2사단이 '터치다운작전"으로 10월 13일 단장의 능선과 10월 25일 1220고지(김일성능선)를 탈취하였다.
이때 국군 제8사단이 어은산 남쪽지역의 1090고지를 점령하였고, 국군 제5사단이 가칠봉 북방의 1211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서 군단은 통선골-문등리-해안분지선으로 전선을 밀어올려 방어선 개선 목표를 달성하였다.
또한 국군 제1군단도 수도사단이 월비산을 점령하고 전선을 남강까지 추진하였다.
제8군은 미 제1군단 및 제9군단이 추게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철원-김화 철로에 대한 적 포병사격의 제거에는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으로 중부전선의 방어선을 철원 서북 송현리에서 평강 북서 1km 지점을 경유, 금성 동남 4km 폴라선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방어선(둘루스선)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제8군은 이 게획으로 제9군단이 금성을 점령하면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동해안에서 북진하는 국군 제1군단과 통천에서 연결하고 지대내 북한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해시계작전"을 계획, 11월 1일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취소되고 말았다.
2. 해안분지 만곡부 해소
휴전협상 초기부터 미 제10군단은 화천저수지에서 해안분지 남쪽을 따라 산머리곡산에 이르는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해안분지로 인하여 전선 중앙에 큰 만곡부가 형성되어 방어에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군단은 이를 제거하기 위해 7월 26일에 미 제2-38연대가 4일간의 공격으로 해안분지 서측에서 가장 높은 대우산(1178)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시작된 장마로 8월 중순까지 공격작전이 잠시 중단되었다.
우기가 끝난 8월 중순에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7사단이 호ㅓㅏ천저수지 북쪽에, 미 제2사단(프, 네대대 배속)이 해안분지 남쪽에, 국군 제8사단이 서화계곡을 방어하였고, 국군 제5사단, 미 제1해병사단(국 제1해병연대 배속)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반면 적은 군단 정면의 화천젓지 북쪽에는 북한군 제5군단이, 해안분지 북쪽에는 제2군단이, 그리고 남강 부근에는 제3군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51. 8. 14일에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하계 제한공격작전"으로 해안분지 동측에서 포복작전을 실시함과 서측에서 983고지(후에 피의능선)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해안분지 서측 고지군과 동측(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능선"의 하단부인 1031고기를 공격하고, 제10군단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이 이 "J(낚시바늘)능선으"능선의 중간에 위치한 884고지와 924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적도 이미 2개월간의 교착기를 이용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어서 젅쟁전쟁 사상 최초로 진지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가. 노전평전투
4KM전방
이포리 무산(1320) 두무산(1098) 사천리
남강
신탄리 *591
큰들 *884
삽재령 *854
*간무봉 *578 *924
*1052 *812 *쌍용
철미동 소라치
*589 *771
성내천 성내동 *965
*1031
*673
*785 *1010 고성제
*445 *562
*1026 *924 노전평 *1056
돈평
가전리 부허동
*대우산 *달산령 *991 국8사 국수도사
*793 서화천 부연구
해안분지
미2사 국8사 부연동 신캔사스선
*646 *840 *774 *893
개고개 *981 *산머리곡산(1019)
신캔사스선
사지목이
*907 평촌 대곡리
서화리
신캔사스선
*1018 미2-23연 봉황촌
대암산(1304) 천도리
국군 제8사단은 7월 20일 국군 제5사단과 교대하여 서화부근 사지목이로부터 산머리곡산을 연하는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 노전평 부근의 445-1031고지선에는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17연) 및 제13사단(제19연)이 방어 중에 있었다.
(1) 제1차 노전평 전투
제8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캔사스선을 방어중인 좌전방 제16연대(대전차 공격대대 배속)와 우전방 제10연대가 주저항선을 방어한 채 각연대 1개 대대와 대전차 공격대대를 사단전초선인 가전리-부허동-고성재로 추진하여 적의 전추진지인 노전평의 445-785-1010고지를 선점하기로 하고 8월 9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몇차례의 공방전을 통하여 14일 사단은 포복작전계획상의 낚시바늘 능선 하단고리부분을 확보하고 줄기에 해당하는 1031고지 공격에 들어갔다.
(2) 제2차 노전평 전투
제8사단은 445-1010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에 8월 16일에 군단으로부터 1031-965고지 공격명령을 받았다. 이때 제5-27연대도 배속 받았다.
1031고지는 일련의 종격실 능선에서 가장 높은 고지군이고 965고지는 1031고지에서 서로 뻗은 능선상의 고지로써 철미동 일대의 소양강 상류계곡을 직접 감제하는 고지였다. 이중 1031고지는 북한군 제13-19연대가, 965고지에는 제2-17연대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단은 8월 18일 06:00시에 1031고지는 제10연대가, 965고지는 제21연대가 공격하여 8월 24일이 되어서 동 고지선을탈환하게 되었다. 기간중에 북한군 사살 938명, 포로 57명을 획득하였으나 사단도 전사 90명, 부상 536명 , 실종 17명이란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 제8사단은 1031고지를 "대통령고지", 965고지에는 "벤플리트고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였다.
(3) 제3차 노전평 전투
제8사단이 965-1031고지 선에 전진기지를 구축하자 북한군은 제3군단 예하 제2,13사단 대신 제15사단을 투입하여 802-854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제8사단장은 9월 8일에 군의 제한목표공격작전 지침에 따라 854고지를 목표로 부여받고 9월 10일 06: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854고지는 남강과 소양강의 분수령에 위치한 고지로 사단 방어선을 남강까지 추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탈취해야만 하는 고지였다.
당시 사단은 중앙에 배치된 제21연대를 주공으로 854고지를, 북쪽의 제10연대는 1개 대대로 854고지 북쪽 무명고지를 점령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제16연대는 2개 대대로 제21연대 방어진지를 인수하고 1개 대대는 제21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한편 사단의 우측인 국군 제1군단이 1031고지의 북쪽 머리에 해당하는 924고지와 884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제8사단은 항공지원과 동해안의 제77, 95 기동함대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혈전을 거듭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서 뺏고 뺏기는 혈전을 거듭하였다. 결국 공격개시 9일만에 9월 18일 854고지를 완전 탈취하게 되었으며 이 3차전투에서 적 2157명 사살, 163명을 포로로 획득하였다. 아군도 322명이 전사하고 1443명이 부상했으며 115명이 실종되었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854고지에 남아있는 지뢰군
(나)" 야 너 또 살았어!"(연대장이 병상에게 던진 기막힌 칭찬)
(다) 1031고지군은 반 유개화 공사로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라) 참전용님들의 증언 내용
나. 피의 능선전투
문등리 사태리
*666 *752
건솔리 비아리
*855 *862
수입천 *731 *983 *940 *773 비득고개
872
고방산리
*760
장평리 *805
*787 월운리 캔사스선
국5-36
캔사스선 미2-9연 미2-38연
미 제10군단의 중앙사단으로서 해안분지 남쪽의 캔사스선을 방어중인 미 제2사단은 8월 14일 국군 제8사단이 1031고기 공격작전을 하고 있을 때, 해안분지 서측의 983(피의능선, 수리봉)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령하엿다.
당시 미 제2사단은 제9연대를 두밀령 일대, 제38연대를 비아리에, 제23연대를 해안분지 남쪽의 고지에 배치하여 장평리로부터 평촌까지의신캔사스선을 방어중에 있었고 제38연대는 1개 대대로 대우산에 정찰기지를 운용하고 있었다.
수리봉, 983고지는 731-983-940-773고지로 잉진 8km 횡격실 능선으로 경사가 급하여 방자에게는 유리하고 공자에게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더구나 이 고지는 사단의 후방까지 감제관측이 가능하여 사단으로서는 필히 확보해야 할 고지였다.
반면에 적도 전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야 북한군 제5군단 제12-1연대와, 제27-14연대를 배치하여 2개 사단으로 고지를 방어중이었다. 또한 아군의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수 백개의 엄체호를 구축하고 반사면에도 유개 교통호로 연결된 축성을 하고 5,000여 개의 상자형 지뢰를 매설해 놓고 난공불락의 요새화 진지라 호언 장담하고 있었다.
(1)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의 전투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5-36연대는 8월 18일 06: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983-940-773고지로 2개 대대로 병진 공격을 실시하였다. 항공지원 및 동해안에서 함포지원도 이루어졌다.
무려 4km의 공격 정면에 200문의 포가 집중지원을 하여 산의 외형이 변할 정도였다. 그러나 엄체호를 강력하게 구축하고 지뢰지대를 접근로 요소요소에 설치한 관계로 아군의 진격을 계속 돈좌되기를 반복하였다.
20일에 773고지를 점령하고 940고지를 21일 야간공격으로 점령하게 되는데 당시 공격 선봉인 제2대대 6중대는 살아남은 인원이 20명에 불과 했다.
한편 983고지를 공격하는 제3대대는 22일 111:30분에 고지를 점령하고 진지강화를 하였으며 적의 역습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역습에 26일 02:00시에 북한군 제6-13연대에 고지가 포위되고 육박전으로 저항하였으나 계속되는 파상공격에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제36연대는 우측의 773고지와 940고지를 확보한 채 방어로 돌아서고 이에 미 제2사단장은 미 제9연대장에게 국5-36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하여 제2대대가 940고지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적의 계속되는 역습에 773, 940고지마저 피탈되고 피의 능선을 점령한지 5일만에 모두 상실하였다. 당시 미 제2사단의 참전자 증언은 27일 야간에 국5-36연대가 밀릴 때 북한군과 국군이 혼재됭어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이 혼란과 전장공포증에 빠져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2) 미 제2사단의 전투
미 제2사단장은 상실한 피의 능선을 탈환하기 위해 27일 국군 제5사단장에게 제36연대를교체해 달라고 하여 제35연대를 배속받아 8월 28일 09:00싱에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국5-35연대는 773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였으나 야간 역습에다시 피탈당하고 다시 주간 공격으로 탈환하였다. 그러나 미 제9연대는 940고지를 탈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8월 28일 군단장의 작전확대방침에 따라 국군 제5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9월초 전선 상황에 큰 변화가 생겼다.
피의 능선 서측의 국군 제7사단이 9월 2일 901고지와 554고지를 탈취하고, 동측에서는 해안분지 남쪽에 투입된 제5사단이 9월 3일 가칠봉 동북쪽 서희령을 점령하고 미 제38연대로부터 가칠봉을 인수한 후 그 서북쪽 1211고지를 공격하였다.
이무렵 미 제2사단은 제9연대 동측에서 대우산을 확보하고 있던 제38연대가 가칠봉을 점령한 후 국군 제5사단에 인계한 다음 피의 능선 후방, 진고개의 666고지와 752고지를 장악함으로써 비아리-사태리 계곡으로부터 적의 증원을 차단하였다. 또한 제9연대 서측에서 제23연대가 투입되어 9월 5일 두타연 남쪽의 855고지를 점령함으로써 문등리 방면에서 피의 능선 방향으로 증원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좌우측방에서 우군의 전선을 피의 능선 후방가지 밀어올리는 상황에서 제9연대의 공격도 계속되어 9월 3일 상실한 773고지를 탈환하고 9월 4일에는 940고지를 , 그리고 9월 5일에는 수리봉 983고지를 재탈환 확보하였다
그러나 아군이 940고지와 983고지를 올랐을때는 이미 적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다. 좌우 측방이 노출되면서 포위에 대비하여 철수한 것이다.
이와같이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36연대는 '51. 8. 18일부터 9월 5일까지 18일간의 혈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전사326명(국36:132명), 전상 2,302명(국36:816명), 실종 414명(국36:122명)이었%으며 적의 손실은 15,000여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되었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현장에 올라선 당시 제36연대장 황엽대령의 현장 증언
(나) 풀포기에 그대로 앉아 계시던 용사님 유해
(다) 1,000여구의 유해발굴, 그 조국은 어디일까~!
(라) 계곡에 묻힌 유해발굴 노력(수해로 토사가 쌓여 10여m나 깊이 묻혀버렸다)
(마) 살아있는 지뢰밭의 용감한 전사
다. 해안분지전투
*간무봉
*980
*1052 *812 황기
*749
*680 *673 미제1해병 국8사
헤이스선 *660
서희령 *930 *1055 *924 *702 *561
*1026
월산령
*793
국제1해병 미제7해병연대
운전동
만대리
돌산령
캔사스선
1951년 8월 말 미 제2사단이 피의 능선에서 목표를 점령하지 못하고 고전이 계속되자 제10군단장은 그 원인이 적의 전력을 집중하도록 허용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활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군단 전역으로 작전을 확대, 압력을 가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따라 군단 정면 약 10km북쪽 박달고개-가칠봉-서희동-성내동에 이르는 해안분지 북쪽 고지군에 연한 작전통제선(헤이스선)을 설정하고 국군 제5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까지 전방으로 투입하여 8월 31일에 각 사단별로 목표를 부여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이 해안분지를 공격하고, 이 사단의 서에서는 국군 제5사단이, 동에서는 국군 제8사단이 병행공격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은 준비명령을 받고 28일 홍천에서 평촌으로 이동하여 미 제2사단과 국군 제8사단의 방어지역 일부를 인수받아 만대리로부터 평촌에 이르는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이때 국군 제1해병연대는 해안분지 남쪽능선에 배치되었다.
(1) 제1단계 작전
당시 미 제1해병사단이 붕여받은 공격목표는 해안분지 북쪽 일련의 횡격실 능선상의 1026, 924고지와 해안분지 북동쪽의 702, 660고지군이었다. 이중 1026-924고지군은 국군 제1해병연대가 북동쪽 702-660고지군은 미 제7해병연대가 부여 받았다. 이 무렵 공산군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 1사단이 해안분지 북쪽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사단으로부터 1026고지와 924고지를 공격 목표로 부여받은 국군 제1해병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8월 31일 06:00시에 공격을 하되 제3대대가 공격을 선도하여 924고지를 탈환하면 제1대대는 후속하다 1026고지를 공격하도록 기동계획을 수립하였다. 반면 우전방의 미 제7해병연대는 2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1951. 8. 31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과 매설된 지뢰지대로 전진이 둔화되면서 국군 제1해병연대장이 지뢰폭발로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고 김동하 중령이 대행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미 제7해병연대는 공격개시 3일만인 9월 2일 사단 목표인 702-660고지선을 점령하게 되고 국군 제1해병연대는 9월 1일 924고지를 탈환하였으나 적의 역습에 다시 피탈 당하였다.
국군 해병의 목표탈취가 늦어지자 미 제1해병사단장은 미 제5해병연대로 국군 해병연대의 캔사스선 방어임무를 인수토록 하고 국군 해병 제2대대도 공격작전에 투입하도록 하였다. 9월 2일 마침내 924고지를 탈환하고 1026고지 공격에 들어갈 때 미 제1해병사단장은 924고지를 미 제7해병연대에서 방어토록 전투지경선을 조정했다.
9월 3일, 계속적인 공격으로 1026고지를 탈환하게 되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700m 북쪽의 1055고지까지 탈취함으로써 목표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해병은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 924고지를 김일성 고지라 명명하여 불렀다.
(2) 제2단계 작전
이 전투 후 해안분지 주진지로 편성했던 북한군 제1사단은 간무봉으로 후퇴하여 이 봉우리에서 동측으로 뻗어내린 1052-812-749고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미 제1해병사단은 9월의 제한공격 지침에 따라 북쪽 간무봉에서 사단 정면으로 뻗은 749고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약 1주일 정비 후 9월 11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9월 20일에 탈취하였다. 이로서 군단으로부터 부여 받은 임무는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1951. 9. 13일 미 제1해병사단 제161헬리곱터 수송 대대가 최초로 "윈드 밀"이란 공수작전으로 보급품을 전장에 수송하고 74명의 부상자를 후송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내가 잡은 포로 3명을 해병대 하사관이 뺏어갔다(참전용 증언)
(나) 924고지 전투흔적과 을지전망대 주변 전투흔적(미확인 지뢰지대지만 기동로 공사간 발견되는 유품들)
라. 가칠봉지구전투
*1211 서희령
헤이스선 *1026
*가칠봉
현리
*1059 덕장포
*1148 도솔산 국5-27연 캔사스선
국군 제5사단은 군단예비로 있다가 8월 28일 군단장의 새로운 작전방침에 다라 미 해병1사단과 더불어 전방으로 투입되어 해안분지 남단의 좌익 캔사스선에 투입되었다.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제35연대를 좌, 제27연대를 우로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도솔산-만대리선의 해안분지 남쪽을 인수하고 피의 능선을 치른 제36연대는 창리에 예비로 두어 재편성을 서둘렸다. 사단장은 8월 29일 06:00시에 제27연대를 투입하여 공격에 나섰다.
(1) 가칠봉-서희령으로 진출
제27연대는 미 제2사단 제38연대와 협조하면서 9월 3일 가칠봉 동북쪽 능선과 서희령을 점령하였다. 사단은 다음날 9월4일 미 제2사단과의 전투지경선 조정으로 서측으로 정면이 2km 확대되면서 미 제38연대로부터 가칠봉(1243)을 인수함과 아울러 그 서북 1.3km 지점의 1211고지 공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이곳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7사단 제32연개가 전개하고 있었는데 미 제38연대와 국군 제27연대의 진격에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나고 제7연대가 1211고지에 투입되어 새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사단의 공격목표 1211고지는 대우산-가칠봉-매봉(1290)을 잇는 능선상의 한 봉우리로서 가칠봉에서 큰 계곡 건너 서북방에 우뚝 솟은 감제고지다.
(2) 제27연대의 공격(9.5~9.16) : 1211고지 1차 점령
제5사단은 당시에 가칠봉-서희령을 점령하고 있던 제27연대에 1211고지 명령을 내렸다. 연대는 9월 5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어서 예비인 제35연대를 추진하여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둔화된 좌측으로 투입시켜 12111고지 서남방 A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매봉
C
*1211 서희령 국5사 미1해병
A B
*1243 가칠봉
미2사 국5사
사단은 부대배치 조정과 공격준비를 마치고 9월 9일 05:00를 기해 공격을 재개하여 1211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적의 역습에 고지를 내주고 다시 철수해야 했다.
이날 적은 방어중인 제27-7연대가 패주하자 제13-23연대가 임무교대하여 국군 제5사단을 밀어붙였다. 따라서 제5사단은 가칠봉 부근 진지를 강화하여 새로운 공격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북한군은 다시 제2사단 17연대가 투입되어 1052-1211고지에 방어력을 보강하고 있었다.
이에 사단장은 적의 방어력이 보강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하고 다시 제27연대로 하여금 1211고지를 탈취하라 명령하였다. 9월 16일 04:00시에 공격을 개시한 연대는 그러나 1211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B, C 고지도 확보하지 못하고 다시 가칠봉-서희령선으로 복귀하였다.
(3) 제35연대의 공격(9.17~9.19)
사단은 난공불락의 1211고지를 공격하기 위해 공격연대를 제35연대로 바꾸어 9월 17일 12:00시에 공격을 다시 했다. 그러나 항공폭격에도 변함이 없는 적의 엄체호에서의 저하에 공격은 계속 돈좌되었다. 사단의 화포와 57.75mm 무반동총으로도 적의 거점이 파괴되지 않고 1211고지 진전에 도달했어도 적의 내뿜는 사격에 또 돌격이 저지되고 말기를 반복하였다.
(4) 제35. 제36연대의 공격(9.20~9.22)
이렇게 되자 사단은 2개 연대를 투입하여 남북 양 방향에서 공격하기로 하고 제36연대는 1211고지를 우회하여 서북방향의 C고지를 점형 후에 목표고지를, 제35연대는 남쪽에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군의 오폭세례를 입어가며 백병전으로 돌격을 감행했지만 계속하여 돈좌되자 사단장은 공격을 중지하고 헤이스선의 방어에 주력하며 전력을 보강하였다.
(5) 제35연대의 공격(9.28)
사단이 부대를 재편성하여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대인 9월 26일 미 제2사단이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어 미 제10군단장은 적의 측방 위협을 제가하기 위해 국군 제5사단장에게 조속히 1211고지를 점령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제5사단장은 약 5일간의 정비를 끝낸 제35연대로 9. 28일 6개 편대의 전폭기와 사단 및 군단포병의 호ㅓㅏ력지원을 받으며 10: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여전히 목표직전에서 돈좌되기를 반복하였다.
(6) 사단 총공격(10.1~10.2) : 1211고지 2차 점령
사단은 제35. 36연대를 전면에서 공격하도록 하는 양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다시하여 10월 1일 드디어 1211고지를 점령하였다. 목표 서북방의 C고지까지 한때 점령하였으나 적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역습에 10. 2일 07:00시 다시 피탈되고 재탈환 노력도 허사로 끝났다.
이러한 때에 10월 3일, 사단의 좌인접 부대인 미 제38연대의 책임지역을 인수하면서 작전지역이 확대되자 공격을 일단 중단하였다.
(7) 제27연대의 공격(10.8~10.9) : 1211고지 3차 점령
그런데이 무렵 적은 국군 복장을 하고 정찰대를 대우산까지 침투시켜 아군 병사를 납치해가는 등 정찰 활동을 강화하자 제27연대로 다시 목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사단은 제35연대와 제36연대에서 각 1개 대대를 목표 좌우측에서 협동공격 하도록 하고 공격을 재개하여 1211고지를 한 때 제27-3대대가 점령하였으나 인접 부대들의 진출이 더디어 적중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결국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처럼 제5사단은 1951.9.5일부터 10월 9일까지 1211고지를 세번에 걸쳐 탈취하였으나 적의 역습에 이를 상실하고 결국 10월 14일, 당장의 능선 전투가 종결될 무렵 그 동측의 841고지를 점령하면서 가칠봉능선 부근 전투를 종결하였다.
결국 국군 제5사단은 박달고개-가칠봉-서희령 전선을 지켜 해안분지 확보에 크게 기여하고 10월 20일, 40일간이나 교전과 혈전을 벌인 이 전선을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사단이 교체 투입되었지만 제5사단이 확보한 841-가칠봉-서히령선이 지금의 최전방 전선이 되었다.
(8)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가칠봉 고지군에 뒹구는 유해(돌틈에 그대로 남아 있음)
(나) 가칠봉과 1211고지는 바로 눈앞에 잇다.
(다)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밤에 들어가 아침에 나와 보면 30여 명만 남았다(제5-35연대 신치상 이등중사 증언)
본인은 제8사단 소속으로 오대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으며 제5사단으로 전속되어 가칠봉부근 전투에 참가 했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전사했고 전사자나 부상자 후송은 제대로 되었는지요?"
"우리 중대는 30명만 살아남았다. 나도 거지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비행기가 때리고 포병이 때리고 뽀얀 안개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놈들은 벙커속에 들어앉아 우릴 보고 갈려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돌격을 하라 해서 올라섰는데 아무도 없더라. 그리고 또 우군의 폭격으로도 많이 죽었다. 죽은 사람을 누가 들고 나오겠는가. 계곡마다 시체가 쌓여서 발로 디디면 물컹물컹 미끄러졌다"
(라) 참전용사 윤용선(제5사 통신병) : 가칠봉 전투때는 소대당 5~6명, 중대당 20~30명 정도만 생존해 하루살이라 했다. 통신병이라 야전선을 깔기 위해 전장에 돌아다녀야 했다.
(마) 철책 보강 작업 및 사계청소간에 수많은 유품과 유해들이 돌틈에 있다.
군복무를 한 제대군인(박춘배외 여러 명)들 제보에 철책을 연하여 철책 안쪽이나 철책을 따라 유해나 유품이 발견되어 여러곳에 가매장하였다는 제보가 많았다.
실제 철책 사계청소를 하는 과정에 너무 많은 유품(트럭으로 2~3대분)이 쏟아지고 알 수 없는 뼈들이 들틈에 있어 DMZ안에 들어가 탐사를 했다. 말뼈부터 돼지 등 동물뼈도 있고 사람뼈도 있지만 워낙 부폐하고 포탄에 작열하여 눈물만 흘렸다.
(마) 제3사단과 교대시 3사단에서 시신을 처리해주지 않으면 인수를 거부하겠다고 해서 일부병력이 남아서 시신을 계곡으로 옮겨 보이지않게 하였다는 참전용사의 증언도 있었다.
1) 장지현 참전용사(제3-22-3-10중대) : 훈련소에서 20일정도 교육받고 속초로 이동하여 제3사단에 갔다. 한달정도 교육을 받고 존투에 투입되었는데 당시 선임하사가 "우리는 김일성 고지(1211고지(스탈린고지)군의 한 무명고지)를 공격한다"라고 했다. '51년 겨울로 가는 길목인데 고지 정상 100m 전방까지 진출하여 보니 산병호에 아군 시체가 10여구 이상있는데 또다시 우리가 철수하는 과정에 보니 우리를 엄호하던 소대원 산병호에도 많은 유해가 있었는데 누가 처리하지 못했다.
2)이재구 참전용사(제3-23-2대대) : 가칠봉과 스탈린 고지사이에 있는 감자고지 일대에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고 현장에 수습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51. 10월 경에 국군 제5사단과 교체했고 나는 탄약반장으로 노무자 10명을 인솔하여 감자고지로 탄약과 식량을 운반하였다.
당시 감자고지에 제2대대가 올라가 있었는데 적이 이 가칠봉과 감자고지 사이에 직사포를 조준하고 우리가 가면 쏘아대는데 맞ㅇ면 가루가 되고 말았다. 하루에 3번정도 보급품을 날라야 하는데 정말 생지옥 이었고 참호도 없이 오직 바위에 의존하고 전우의 시체를 쌓아놓고 있었는데 이 고지에서 대대장도 전사하고 5.6.7중대별로 약 20명식 살았고 제8중대만 중화기 중대로 한 50명 살았다. 당시 유해는 능선부근에 일부 매장되고 이부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3) 김선준(제3-11-1-2-1소대장) : 북한군 포격으로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 뒷산 중턱 약수터 부근 일대의 분침호내에 소대원 30~40여 명이 전원 전사하였으나 긴박하여 처리를 못하고 흙만 살작 덮고 후퇴하였다. '51. 11월경 내금강을 철수하여 건봉사 뒷편으로 이동하였다. 북한군과 교전이 있던 다음날 나는 무전병을 데리고 전방정찰을 나왓는데 포탄이 분침호에 떨어져 다 전사했다.(?) 제3사단이 가칠봉 전투 참가전 상황으로 판단됨, 우린 약수터 주위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함
마. 백석산(1142)전투
(1) 백석산전투 전초전(국군 제7사단, 8.18~9.18)
*1130
*1025 현리
*1054 *1050 사당골
*850 유덕골 천미리 *1088
*1065 *730 *630 건솔리
*백석산1142 *930
*891 *1024 미2사-9연
감우리 *751 서역골 장제대
북한강 *743 *696 *894 국7-3연
*922 *790 궁동 *582
*883
*831 *901
*554
국6 국7
국군 제7사단은 1951. 8. 18일, 미 제10군단이 포복작전을 전개할 때 미 제2사단이 군단의 주공으로 해안분지 서측 능선확보의 일환으로 피의 능선 공격작전을 펴자 주공을 지원하기 위해 그 좌측 554고지를 공격하였다.
당시 대치하고 있는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32사단과 제12사단의 일부로써 제32사단은 백석산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883-901-554고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초부대를 추진하여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다.
제7사단장 김용배 준장은 554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앙의 적 주저항선을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하에 8월 18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20일까지 883고지 및 양갈래고지, 901고지를 점령했으나 883-901고지는 다시 피탈되었다.
그런데 사단은 이 무렵 우인접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5-36연대가 983(수리봉:피의능선)고지를 탈취했다 다시 피탈되는 등 쟁탈전을 벌임에 따라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883-901고지 전투를 접어두고 먼저 군단에서 부여한 목표 554고지 남쪽 2km 536고지를 8월 26일에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8월 말 군단의 피의 능선 공격이 부진하자 이곳으로 집중되는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 미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사단은 사단 동측방의 901-554고지를 공격하여 9월 2일 점령하였다.
9월에 접어들어 901-554고지를 점령하자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군단의 밀어올리기 작전개념에 다라 다시 883고지를 탈취하기 위하여 9월 7일부터 3개연대를 투입하여 9월 18일에 제3연대가 883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와 같이 국군 제7사단은 8월 18일부터 9월 18일까지 1개월의 격전을 치르며 892-883-901선의 적 주저항선을 점령하면서 병력이 70%수준으로 떨어졌다.
(2) 백석산전투 제1차전(국군 제7사단)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7사단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9월 20일에 국군 제8사단과 교대하도록 조치하였다. 제8사단은 노전평 부근의 방어선을 미 제1해병사단에 인계하고 9월 23일까지 인수준비를 완료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고 있는 미 제2사단이 1주일이 경과하여도 탈취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미 제2사단은 백석산 동남쪽 2km지점의 1024고기를 공격하여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군단자은 백석산을 점령하지 않고는 적의 분산 효과가 미흠할 것으로 판단하여 교대 명령이 주어진 국군 제7사단에게 백석산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 제7사단은 풀무터-궁골가지, 격전으로 점령한 892-7433-883-901고지를 연하여 10km 정면에 좌로부터 제5. 8. 3연대순으로 3개 연대를 모두 전방에 배치하였다.
대치중인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32사단과 일부 제12사단은 883고지와 901고지에서 물러났지만 백석산을 정점으로 결사 고수할 태세였다.
백석산은 화천저수지는 물론 단장의 능선까지 감제관측이 가능하고 적은 탈취당하면 북쪽의 어은산(1277) 남쪽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명령을 받은 이성가 사단장은 제8연대를 주공으로 883-백석산으로, 제3연대는 901고지에서 우측 능선을 타고 공격하되, 접근로상의 1024고지를 공격중인 미 제2-9연대가 이 고지를 점령할 때까지는 제8연대의 공격을 지원토록 하였다.
사단은 9월 24일 공격을 개시하여 제8연대가 목표 직후방 800m지점의 894고지를 점령했다. 제3연대는 동측에서 9월 25일 미 제2-9연대의 1024고지 공격에 호응하여 고지를 탈취할 무렵 연대는 서측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9월 26일에는 양개 연대로 주봉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군단에서 28일에 제8사단과 현 임무를 교대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사단은 남은 기간에 백석산을 탈화하려 공격을 개시하여, 우측 제3연대가 주봉의 남동쪽 500m 1060고지를 점령하고 정상으로 치달았으나 저적의 포격에 1060고지로 물러났다.
제8연대는 894고지에서 공격하여 주봉의 두 봉우리중 좌측 봉우리를 탈취하였다. 다음 우측 봉우리를 공격하던 중에 제3연대를 지원하던 미 전차소대의 직격탄이 공격대열에 작열하여 순식간에 많은 피해를 입고 적의 역습에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27일 주봉 탈취를 위한 재공격을 준비 하던 중에 적의 역습으로 철수하였으며, 우측의 제3연대도 미군이 1024고지를 적의 역습에 피탈당하여 연대 예비대를 투입하여 재탈환한 후 미군에게 인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제7사단은 9월 28일 12:00시에 제8사단에게 인계하고 육본예비로 전환하여 야전훈련소에 입소하였다.
(3) 백석산전투 제2차전(국군 제8사단)
제8사다장 최영희 준장은 노전평 부근의 작전지역을 좌인접 미 제1해병사단에게 인계하고 1951. 9.28일 제7사단으로부터 백석산 공격을 인계받았다. 사단은 제21.16.10연대를 북한강 물어구로부터 문등리계곡의 궁골까지 배치하되 제10연대로 백석산을 공격할 복안이었다.
한편 공교롭게도 이날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32사단이 전투피로로 물러나고 제12사단이 새로이 투입되었다. 국군 제8-10연대는 9월 30일 배속된 대전차공격대대를 배속받아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제7사단의 경우처럼 비행기 폭격과 포병화력의 우세속에서도 주봉의 탈환은 탈환과 피탈을 반복하다 2일간의 백병전에서 결국 승리하여 완전 탈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적은 최소한 5~10km 후방으로 밀려나 1220고지와 어은산(1277)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며 우측의 단장의 능선과 문등리 계곡을 감제할 수 있어 주공 사단의 작전에 크게 기여 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바로 군단으로부터 1050-1220-어은산에 이르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서측의 제9군단과 전선 균형을 이루며, 동측방의 미 제2사단의 단장의 능선 전투를 측방에서 지원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사단은 3단계로 구분하여 1단계 : 1050고지(백석산 북서족 3km)선, 제2단계 : 1090(서) 고지선, 제3단계 : 1090고지(북) (백석산 북서족 7km)선을 확보하기로 계획하여 10월 6일 제1단계 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2일까지 1050-고지-726고지(양의대) 선으로 진출했다.
그런데 이때 적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0월 10일부로 패퇴하던 북한군 제5군단이 후방으로 철수하고 중공군 제20병단 예하 제68군이 출현ㄴ한 곳이다. 이들은 1951년 5월 21일 압록강을 넘어 원산방어에 임하다가 북한군이 패주하자 어은산-문등리로 투입되어 아군의 전진을 기도하였다. 제204사단의 제612 및 제611연대가 국군의 제8사단 정면 백석산 북쪽으로, 제610연대가 미 제2사단 정면 문등리 계곡으로 투입되어 아군과 조우하였다.
결과적으로 적의 교대간 혼란한 틈에 제8사단은 10월 13일 2단계 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5일에 748-도피막-1090(서) 선으로 진출하였고 미 제2사단이 탈출한 1220고지를 10월 18일에 인수받아 이곳을 발판으로 최종목표인 1-90고지(북) 공격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결국 사단은 10월 28일까지 1090고지(남.북)를 차례로 탈취하고 북한강 동안의 319-938-1090고지(북)선을 확보 하였다. 이러써 제8사단은 백석산 탈취 후 10월6일부터 28일까지 23일간 방어선을 북한강상의 황병동-통선골-바우골(암동)-1090고지(북), 그리고 동으로 안골(내동)로 이어지는 일련의 큰 계곡 남쪽의 횡격실 능선으로 추진하여 군단의 방호력 개선의 목표를 달성하고 작전을 종료하였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이과장, 여기가 내가 뢰종이를 묻은 곳이야!(원주 어느 교회 장로이신 김낙연 제7사단 참전용사님의 현장 증언)
"용사님, 안돼.죽이지 마세요. 차렷 호국영령님께 경례!"
(나) 백석산 주봉은 완전 초토화 되었지만 그 포연속에 너무많은 유해가 조각조각 되어 묻혀있었다.
" 능선일대가 미확인 지뢰지대로 홈코트 작업 후에 발굴"
"정상 고지군에 진지 공사간 수없이 많은 뼈들이 있어 그대로 삽질하여 버렸다 : 제169포병대대 근무한 상사의 고백"
(다) "내가 미군 군번줄 20개를 발굴하여 사기꾼에게 넘겼다" 어느 지역주민의 제보(송현리의 변천수.김창순 황영범등 다수)
그리고 날아든 법정 출석 협조 요청서가 왔다 ㅎ ㅎ ㅎ
(라) DMZ 안에서 발굴된 " 7사단 마크와 수푼에 새겨진 이태윤, 그리고 달려온 대구의 동생들"
"과장님 움직이지 마세요, 지뢰밭에 들어간 나는 죽다 살았다"
(마) 참전용사 / 지역 주민 증언과 제보
1)석금호 용사(제8-16-1대대) : 9월 말 양갈래 고지에서 전투했다. 적들은 아예 땅에다 발을 묻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얼마나 죽었늕지 당시 교통호에 시체가 가득했다.
2)진병규(지역주민) : 백석산에 약초나 나물뜯으러 몰래 들어갔다. 큰 바위 밑에 M1소총을 가지고 죽어간 유해를 보았고 고인이 된 동네 친구는 해골 30여 개를 끈으로 매달아 자기 앞에 묶어놓고 아침마다 씻겼다.
3) 나는 노무자로 양갈래고지에 갔다(제보) : 칡순으로 턱에다 걸어 끌고 내려오기도 하고 단가에 들고 오기도 하고 그러다 적의 기습이나 포탄 작열에 내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나는 분명 참전했는데 그 당시에 기록이 없다. 인후보증을 해 줄 사람도 없다. 현장에서 내가 증명할테니 이과장이 증인이 되어 달라" 우리와 같이 1박 2일 동행(큰아들과 통화 허락하에)
바. 단장의 능선전투
*961
문등리 *871
*1211
*605 *851 *656 사태리 가칠봉 1243
*850 *1052
*756 *841
*931 *784
*868
*702
건솔리 *894
*666
새건배 *752 비아리 미2사 국5사
*867 이목정 *대우산 1178
*554 피의 능선 비득고개
미9연 미23연
국7사 미2사 도솔산
(1) 제1차전('51.9.13~9.26)
미 제2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5-36연대의 뒤이어 사단의 총역량으로 9월 5일 피의 능선을 탈취하였다. 이 전투 후 사단은 9월 8일자 군의 "제한공세 : 밀어올리기 작전" 방참에 따라 피의 능선 북족 894-931-851고지로 구성된 종격실의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게 되었다.
단장의 능선고지 주에 894고지와 주봉인 931고지와 문등리 계곡에는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사단이 배치 되어 있었고, 북족의 851고지와 사태리 계곡은 제2군단 예하 제13사단이 방어 중에 있었다.
북한군은 이미 피의 능선전투가 진행 하는 동안 이곳에 엄체호를 구축하고 피의 능선과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화 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10월 10일에 중공군 제68군이 북한군 제5군단과 교대하며 제204사단과 제202사단의 1개 연대가 이 전선에 투입 되었다.
군단은 이 능선의 확보로 문등리. 사태리 계곡의 작전로를 장악하고 전선의 만곡부 제거라는 당초의 군단작전 목표를 달성함은 물론 적을 어은산(1277)-매봉(1290)-간무봉(1358)선가지 구축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미 제2사단은 9월 11일 제9연대(배속:프랑스대대)로 하여금 피의 능선을 방어토록 하고 제23연대로 9월 23일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80여문의 포가 동원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06:00부터 작전이 개시되었다.
공격을 개시한 제23-3대대는 선두 중대인 L중대가 목표 850고지까지 진출하였으나 야간에 적의 재역습으로 중대원 전원이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공격을 동쪽과 남쪽 2개 방향에서 진행토록 하여 제9연대를 남족에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9연대가 남족에서 891고지를 점령한 가운데 적의 역습을 물리치고 있을 대에 우측의 프랑스 대대는 841-1052고지 공격에 나섰으나 피해만 속출하고 점령하지 못했다.
주봉이 931고지로 확인된 가운데 16일부터 제23연대는 전 대대를 투입하여 북쪽의 850고지, 남쪽에서, 동쪽에서 931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적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 그 동쪽의 사태리 계곡으로 진출중인 프랑스대대가 사태리로 진출하여 여기서 전차포로 북쪽 850고지와 동쪽 931고지를 지원하게 되어 21일 제3대대가 중간 목표인 북쪽의 850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다음날인 9월 22일 제23연대는 다시 제1대대가 프랑스 대대와 같이 남쪽에서, 제2대대는 북쪽에서 931고지를 공격하고 제3대대는 850고지에서 그 북쪽 851고지에서 적의 증원을 차단하였다. 그러나 목표탈환에는 실패하였다.
9월 23일, 제9연대가 단장의 능선에 대한 서측방으로부터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문등리계곡 서측의 1024고지를 공격하는 가운데 931고지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제제1대대가 기회를 포착하여 고지를 점령하느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2-3연대의 재역습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전방 대대들의 전투력 소모가 크게 되자 연대장은 프랑스 대대를 931고지 공격에 투입하여 9월 23일 공격을 다시 개시하였으나 여전히 목전에서 돈좓되어 철수하게 되었다.
제23연대장은 사단장에게 931고지로 유입되는 적의 증원을 차단시켜 달라고 건의하게 된다. 그동난 2주간의 전투에서 사단의 손실은1,670여 명이고, 그중에 제23연대의 사상자가 950명이나 되었다.
(2) 제2차전(10.5~10.13)
사단장은 지금가지의 작전을 대실패로 규정하고 10월 5일 3개 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제23연대(프랑스 대대 배속)는 931고지를, 제38연대(네덜란드 대대 배속)는 931고지 공격의 양공으로서 문등리 계곡 좌우측 적을 척결하고 공병대대의 도초개척작전을 엄호하게 하였다. 제9연대는 서측방의 867-1005고지를 점령토록 하고 하였다.
제2전투공병대대는 10월 5일가지 고방산리-이목정 간의 작전로를 개척한 다음 , 이목정-건솔리 간 수입천 도로변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제72전차대대가 공병이 개척한 도로를 따라 문등리로 돌진하여 적의 화력거점을 파괴하여 공격부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 공격작전에 성패여부는 도로 개통에 있었다. 제72전차대대 60대의 기동여부가 주요핵심사항으로 대두된 가운데 10월 5일 21:30분에 300문의 포가 불을 뿜는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미 제1해병사단의 비행단도 문등리계곡에 야간 항공폭격을 실시하였다.
제23연대는 제2대대가(예비로 3대대) 894고지에서 931고지로, 프랑스 대대는 북에서 남으로 931고지를, 제1대대는 북쪽의 851고지를 공격하였다.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으로 적의 벙커를 제압하고 10월 6일 새벽 드디어 고지를 점령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사단의 중앙 제38연대는 새건배-문등리 간의 계곡을 통제하는 고지군을 점령하면서 공병의 도로개척작전을 엄호하여 9일까지 도로개척이 완료되었다.
10월 10일부터는 마지막 북족의 851고지 공격을 전차대대의 참여하에 제38연대 보병 L중대와 사단 공병소대, 제23연대 전차중대와 프랑스 대대의 특수임무부대가 사태리로 진입하여 851고지를 양측방에서 차단하고 공격을 하였다.
당시 이고지는 중공군 제68군 제204사단이 문등리-단장의 능선상의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사단과 교대하여 투입되고 있었다. 제72전차 대대는 불의에 조우된 중공군을 제압하여 큰 손실을 입힘은 물론 851고지 서측으로 이어지는 보급로 및 보충선을 차단하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엄체호에서 죽어가면서도 제1대대와 프랑스 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지만 결국 프랑스 대대가 10월 13일 동이 틀 무렵 851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38연대도 서측방에서 네덜란드 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974고지를 전령하고 10월 15일 백석산과 어은산 중간 지점의 1220고지까지 점령하여 약 1개월의 전투에서 전선을 1220-문등리-가칠봉까지 추진하였다.
단장의 능선전투는 피의 능선전투와 같이 유엔군이 하계 및 추계공세 기간중의 전투 중 가장 격렬하게 치러진 전투로서 미 제2사단은 이 전투기간(9.13~10.13)에 3,700명의 손실을 입었고 적은 북한군 제6.12.13사단과 중공군 제204사단이 무려 21,000며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 단장의 능선 전투를 끝으로 미 제10군단은 전선을 931고지(북한강 동쪽)-1090-851(문등리)-가칠봉-802-884(소양강 계곡 동쪽)선에서 정리함으로서 전선의 만곡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이 단장의 능선은 능선 자체 모두가 DMZ선에 걸려 있어 실질적인 발굴작전은 수행하지 못했다. 다만 차후 발굴을 위한 현장 탐사는 2회에 걸쳐 실시하였다.
이곳 일대는 너무 치열한 전투가 미군과 공산군간에 벌어져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이 집중으로 이루어져 산악 능선 주변에 분화구같은 대형 참호같은 호들이 수없이 산재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군이야 유해처리가 되었다 치더라도 북한군과 중공군이 몇천명이 죽어간 곳이라 웬만한 곳을 아무데나 기초굴토해 보면 전투유품이 산더미처럼 발굴되는 모습에 놀랐다.
지금 GOP철책으로부터 남쪽으로 종결실 능선이 발달하였고 차량이 그 위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능선자체가 남북으로 경계선을 걸치고 있다.
3. 남강으로의 진출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군이 하계공세로 8월 중순에 "포복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수도사단을 서, 제11사단을 중앙, 제3사단을 동으로 하여 산머리곡산으로부터 향로봉 산맥을 따라 거진가지의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전선이 동부가 서부보다 10km 더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군단은 군사령부로부터 미 제10군단과 함께 포복작전에 참여, 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J)"의 줄기와 머리에 해당하는 924(향로봉 서북 7km)고지와 884고지(924고지 북 3km)를 탈취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때 군단의 좌측에 있는 국군 제8사단이 1031고지를 공격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이 무렵 군단과 대치중인 북한군은 제3군단(1,15,45사)으로 향로봉 산맥 북쪽 884-월비산선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강력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군단은 8월 16일에 수도사단으로 924-751고지를 점령하고, 제11사단은 884-591고지를 점령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공격은 이미 지난 7월27일에 실시하도록 계획 되었다가 장마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실시하게 된 것이다.
(1) 884고지전투
*503 남강
하탄리 사천리 *600
내허평
*591
반항평 *609
*602 *700
*884
*751 새골 *612
상원리
수도사 11사
제11사단은 군단의 중앙사단으로서, 향로봉(1293) 북쪽 1079고지로부터 건봉령까지 태백산맥의 준령 중 향로봉 산맥을 가로 타고 방어중이었다.
적은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45사단으로 884고지 일대에는 제2연대가 배치되어 약 2개월에 걸쳐 지뢰 매설과 철조망 설치, 그리고 유개호 등 진지를 거점화 하였다.
이 884고지는 남강 남쪽에 위치하여 사단의 주저항선을 감제관측하고 그들의 주보급로인 고성-사천리-원통에 이르는 453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였다.
제11사단장 오덕준 준장은 군단의 명을 받고 제9연대로 공격하도록 결심하였다. 제9연대장은 제1대대로 884고지를, 연대 특공대로 591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여 8월 18일 사단 포병 및 동해안으로부터 유엔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남강지류를 건너 공격을 개시하였다.
8월 18일 12:00시경 884고지를 탈환하고, 좌측의 수도사단도 924고지를 탈환하였으나 이날 오후부터 폭우가 몰아쳐 악조건하에서 적의 역습으로 고지 후사면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591고지를 공격한 연대 특공대도3차례나 공격했으나 목표를 점령하지 못했다.
제1대대는 다음날 8월19일 미명을 기해 재공격을 감행하여 육박전을 전개하여 2차 점령을 하였고 적의 재역습을 차단하기 위해 서쪽으러 1km 떨어진 602고지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오히려 우중에 다시 적의 역습을 받아 9시간에 걸친 혈전을 했으나 탄약이 바닥나고 대대장과 제2.3중대장이 부산당하면서 전투병력이 1/3이 손상을 입어 결국 20:20경 고지를 다시 피탈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22일, 연대장은 제2대대를 증원하여 24일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다시 탈환(3차점령)하였으나 25일 04:00시경 적의 재역습으로 18명이 전사하고 88명이 부상하는 대 격전속에서 다시 고지에서 밀려났다.
이와같이 제9연대가 3차례나 목표를 탈취하고 물러남에 다라 제20연대를 투입하기로 하여 제20연대는 8월 27일 06: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선봉에 선 제3대대는 222명 전사에 64명의 손실을 입으며 백병전으로 진지를 공격하여 884고지를 점령하였다.(4차 점령) 이대 예비인 제2대대도 602고지와 591고지를 점령하여 884고지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적은 계속하여 9월 초까지 역습을 시도했으나 연대는 격퇴하였고, 수도사단도 924-751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사단은 남강 남쪽의 884-591-600-작은 까치봉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확보하여 군단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2,3차 역습시 한번에 100여 명의 손실을 입었고 마지막 목펴탈취시는 200명의 큰손실을 입었다. 물론 이 전투에서 적 제45사단도 포로 31명에 사살1,252명으로 추산되는 큰손실을 입었다.
(1-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참전용사 김형길 증언(제11-20-2대대) : 제주도에서 훈련받고 제11사단으로 배치받아 884고지와 휴전임박해서는 철원 북방 602고지 전투에 참여했다가 좌측팔 관통상으로 후송되었다. 602고지 전투시에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수류탄으로 맞섰지만 대부분 전사하여 시신처리는 어덯게 되었는지 모른다.
884고지 백병전은 사실 동해안의 함포지원이 없었으면 단 1m도 진격하지 못한다. 워낙 산이 가파라서 포복하기도 힘들었다. 모두 기어서 돌격선에 도달했고 적도 쏟아지는 포화에 정신못차리고 뒤로 물러났지만 짧은 돌격을 몇번 반복한기억이 난다. 얼마나 죽었느지는 모른다. 전우가 죽어도 처리할 방도가없다.
(나) 참전용사 한철수 증언(제11사 군수행정병) : 884고지 전투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화장처리업무를 담당했다. 제대로 화장이 되었는지 아니면 신원확인은 이루어졌느지 사실 곤란하다. 얼마나 비가 오고 또 폭염이 내리쬐는데 화장업무도 힘들다. 엄청 피해가 난 것은 사실이다.
(다) 참전용사 김창언 증언(제11-9연대) : 나는 제주도에서 교육받고 제11사단에 배속되어 지리산에서 공비토벌작전을 하다가 구룡포에서 LST에 승선하여 주문진에 상륙하여 고성-간성지역 전투에 참여하였다. 884고지에서는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른다. 워낙 지세가 험하여 기어서 전투했다. 다 죽었다.
(라) 고경율 참전용사(제11-20연대) : 나는 '49. 1월에 들어왔다. 제11사단 소속으로 884고지를 공격하는데 여명에 아군 포탄이 낙하하여 소대원 주에 5~6명만 살고 다 죽었다. 적이 완강히 저항하여 동료전우들이 많이 상했고 진지강호ㅓㅏ 중에 7~8부 능선에도 수습되지 못한 유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마) 오윤봉 참전용사(제131-9-수색중대) : 884고지 전투에서 약 1달간에 중대장이 3명이 교체되었고 중대원도 180명중 30여 명만 살아남았다. 당시는 유해수습은 생각도 못하는 상태였다.
(바) 바람의 언덕, 884고지 전사면(철책에 있다.878고지다)
이곳에 가면 저멀리 북한의 금강산댐이 어렴풋이 보인다. 산의 경사가 60도는 되어 보이는데 지금은 활엽수가 무성하다. 산속이 훤하게 다 들여다 보이는데 군데군데 철모흔적도 있다. 비행기 폭격에 포격 사격으로 탄흔이 수없이 있는데 능선상으로 진출입이 가능한 지역만 제한적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철책 보강공사등 수시로 유해는 목격되었다는 제보는 많다. 철책에 연하여 있고 남북으로 종격실 능선이며 당시에 동에서 서로 측방공격을 감행하였다.
(2) 월비산전투('51.10.12)
고성
*122 적벽산
*201
*146
고봉리
*95
*350 *148
*187 포운리
사랑리 *459 월비산 *351
정월리 *208
*339
남강
*240 대강리
*203
독산리 기갑연대
26연대
국군 제1군단은 8월 18일부터 8월 27일가지 924고지와 884고지를 점령한 다음 9월 8일 군의 전선 조정에 의거 군단 서측의 방어선이 2km 축소됨에 따라 향로봉-건봉산-까치봉-송현리(동해안)를 방어하게 됨에 따라 사단을 재배치하였다.
군단 좌익의 전선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한 수도사단을 동해안으로 이동시켜 제11사단과 수도사단으로 주저항선을 편성하고 제3사단을 예비로 전환시켰다. 이때 수도사단은 9.13~15일 사이에 제3사단 지역을인수하고 제3사단은 양양으로 이동하여 야전훈련소에 입소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도 제2군단이 해안분지 일대에서 대타격을 받자 국군 제1군단과 대치중이던 제3군단으로 교대하고, 동해안에는 서부전선에서 재편성한 제6군단을 투입하여 제19사단을 남강 동안에, 제9사단을 고성으로부터 통천까지, 제18사단을 예비로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중 동해안에 수도사단과 대치하게된 북한군 제19사단은 까치봉 서북능선-월비산-351고지 부근에 주력을 배치하여 강력한 거점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제9사단은 적벽산-146고지-고봉리선에 배치하였다.
국군 제1군단장은 10월에 접어들어 군이 전개하고 있는 제한된 종심의 전선 "밀어올리기"작전의 일환으로 월비산을 확보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획득함은 물론 동해안의 적을 남강 북쪽으로 구축하기 위해 수도사단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1) 수도사단의 월비산 . 고성 탈환(1차 전투 및 탈환)
당시 동해안으로 이동한 수도사단은 제1연대와 기갑연대를 전방으로, 제26연대를 예비로 하여 554-고항봉-36-강정을 연하는 선을 방어하였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월비산의 적과 대치한 기갑연대로 공격하기로 하고 10월 3일에 월비산 공격의 사전 포석으로 351고지(월비산 동쪽 2km)-148(고성 동남쪽 3.5km)선을 확보하라고 명령하였다.
기갑연대는 10월 10일에 사단포병과 군단을 지원하는 미 제196포병대대 1개 포대의 지원과 동해안 함포지원을 받으며 351-148고지 선을 탈취하였다.
기갑연대는 기세를 몰아 10월 12일 06:00시에 월비산 공격을 개시하여, 주공인 제2대대는 350고지를 점령하고 주봉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350고지로 철수하고. 조공인 제1대대도 261고지를 점령하고 월비산을 동측에서 공격했ㅎ으나 역시 실패하여 261고지로 철수하였다.
연대는 다시 10월 13일에 재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백병전 속에서도 물러나지않은 적의 저항으로 다시 물러났다. 이날의 전투에서 포로 14명 사살 355명의 전과를 기록한 반면 아군도 전사 18명, 부상 77명의 손실을 입었다.
연대장은 기필코 월비산을 탈환하기 위해 예비인 제3대대를 투입하여10월 15일 연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다행히도 날시가 청명하여 함포와 항공폭격을 지원받으며 3개 방향에서 목표로 진격하여 한때 오폭으로 주춤하였으나 결국 월비산을 탈환하여 사단장이 직접 월비산에 직접 올라와 훈장을 수여하고 격려하였다.
이후 기갑연대는16~17일의 적의 역습을 격퇴하고, 17일에 고봉리~146고지선, 다시 19일에는 201~적벽산까지 확보하여 적을 모두 구축하였다.
2) 제11사단의 월비산 피탈(제2차 월비산 전투)
추계공세작전으로 월비산을 탈취하고 남강가지 진출한 수도사단은 11월 16~17일에 방어지역을 좌인접 제11사단에 인계하고 후방지역 공비토벍을 목적으로 새로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호남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제11사단장은현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수행주인 제13. 20연대는 그대로 두고, 예비인 제9연대로 수도사단의 주저항선을 인수하도록 하는 한편, 대전차 공격대대(2개 중대 결)에 사단 수색중대를 배속시켜 월비산과 남강 이남의 전추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1개 사단지역을 1개 연대가 맡고, 1개 연대지역을 1개 대대가 맡는 상태였다.이에 군은 11월 16일부로 군예비로 야전훈련소에서 교육중인 제5-36연대를 제11사단에 배속 조치하였다.
한편 북한군도 제6군단 에하 제19사단이 물러나고 제9사단이 새로이 전방에 투입되어 18일 부터 월비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전투(제2차 월비산전투)에서 제11사단은 월비산과 구선봉까지 제9연대 정면의 모든 전초를 상실하였으며 한대 351고지가지 피탈되었다가 역습으로 351고지는 회복하였으나 월비산은 회복하지 못했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참전용사 강석호( 수도사 제26-3-10중대) : '51. 9. 15일에 소대장으로 월비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우리 중대장도 전사하고 중대원이 30%정도만 생존햇다. 연대 장교의 2/3가 전사할 정도로 아군 피해가 컸다.
나) 참전용사 정배봉(제5-36연대-11중대-화기소대) : 본인은 '50. 12. 3일 입대하여 대구훈련소(동인국민학교)에서 14일간 교육받고 제5사단에 배치되었다. 우리는 제11사단 제9연대와 진지교대했는데 351고지와 261고지 사이의 무명고지에 주둔했는데 최전방이다. 제11사단이 우리와 교대하기전에 월비산과 261고지가지 빼앗겼다.
진지교대후 수색정찰을 나갔는데 아래 계곡에 70~100여 명으로 추산되는 국군 유해가 스러져 있고 부패 직전에 악취가 심했는데 유해의 호주머니를 조사해 보니 전부 제11사단 제9연대 대언이엇고 군번이 030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유해를 그대로 놔누고 왔고 그 후로도 유해처리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제11사단 참전용사님들은 월비산 전투에대해 언급이 없었다. 왜일까?
다) 지역탐사는 제한됨 : 북한지역
철책을 연하여 남강을 끼고 탐사 (투기꾼의 야릇한 유혹)
1)) 귀달린 용이 산다는 오소동 일대 탐사
2)) 건봉령의 비밀(건봉사 주지 스님과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