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들어보니 보통 지식인이 아니라 무척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내촌감삼의 특징이 성경을 원어로 공부하며 깊은 지식으로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고 그 복음으로 나라와 인류를 구원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관파가 운영하는 교회의 말씀도 굉장히 지적인 설교로 이뤄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현필은 관파교회에서 첫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저렇게 학문과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도 종교를 갖는구나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이현필의 생각으로 종교는 지적 수준이 모자란 사람들을 미혹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 현대 학문을 배우면서 종교가 미신이라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당시에 시골 마을에서 병이 나면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곤 하였는데 무당의 굿으로 병이 낫는다는 것은 미신이라고 배웠다. 또 당시 도암 중촌에는 운주사라는 큰 절이 있어서 많은 승려들의 왕래가 있었다. 그래서 중들이 모이는 시장이라 하여 중촌이 된 것이다. 중촌에서 중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린 것이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난 이현필에게 불교는 미신에 불과하였다. 조선왕조 5백년 내내 불교를 박해하던 전통이 굳어졌던 당시 스님은 거지와 다름없는 중이요 하층민으로 멸시를 받고 있었다.
둘째는 내촌이 교회를 운영하면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촌은 대서소를 하면서 번 돈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일요 예배에서 사람들의 헌금을 받았다. 일요예배를 보면서 중간에 잠자리채 같은 주머니에 헌금을 넣어야 했다.
이현필은 처음 당하는 생소한 일이요 돈이 없었던 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공개적으로 헌금을 요구하는 것 같아 내심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촌처럼 학식이 많은 사람이 자기의 돈을 들여서 교회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처음 출석한 관파교회의 영향은 이현필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남게 되었다.
기독교를 접하고 새벽마다 참석하면서 그 목적이 처음에는 인격과 학문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차츰 기독교 신앙에 익숙해질 무렵 다른 사람의 전도로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광주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광주로 가서 사경회에 참석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