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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14)】 ‘예수는 갑자기 나온 것 아니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4
예수는 갑자기 나온 것 아니다
흙이라는 말, 지금말로 하면 물질이라고 그러야하겠는데, 옛날사람 물질이라는 말 상기도 쓸 줄을 몰랐고, 정도가 이제 흙이라고 그런 거니까, 그래 흙이지만, 거기 어찌해 그런지 이 생명이 물들어 있어. 하나님이 처음부터 예수셨기에 그렇지. 영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 그렇게 말한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그게 나오는 것은 그 정도를 따라서 이것만은 종교를 믿거나 안 믿거나 간에 우리가 하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것도 그렇지만, 생명에 있어서는 계단적으로 된다, 어쩔 수 없이 역사적으로 되는 거지. 그러니까 예수라는 이는 툭 튀어서 뭐 갑자기 나오는 거 아니고 모세로부터, 엘리아로부터 사무엘, 차차차차 이렇게, 이렇게 오다가 예수가 나왔지. 그전에 과정이 아무 것도 없이 쑥 이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져. 이것 참 그렇게 내려오려면 하필 마리아의 태집을 빌릴 것 뭐 있어요? 하나님이 마리아의 태집을 빌어서 나게 했다 하는 데는, 사람의 일은 어디까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전시대가 없이 후시대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걸로 하면 시간 공간을 초월해서 영혼불멸하는 진리지만, 그걸 체험하는 것은 이 계단이, 사람이 자기 정도로 돼. 어린애는 어린애 같은, 서울을 와 봐도 어린앤 어린애만큼 그 인상을 얻고, 중학생은 중학생만큼, 어른은 어른만큼, 철학자는 철학자만큼 얻고 가는 거.
그 자기 속이 얼마만큼 자랐나? 그 정도를 따라서 다르게 되지. 같을 수 없다, 같을 수 없어. 그 말이야. 그러니까 매양 뭔고 하니, 저번에도 그 전쟁문제로 하다 그랬지만, 전쟁문제를 얘기하면 목사님들까지도 구약의 하나님도 전쟁 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말이야. 우리 어렸을 때 젖 먹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 그러면 왜 지금 안 먹나? 왜 젖 안 먹나? 70이 됐어도 젖 먹으면 좋잖아? 그러니 그건 왜 그런가 하니 자랐으니까, 내가 이제 젖을 먹을 필요도 없거니와 젖을 내가 먹으면 안 돼. 안 먹어. 생명의 법칙이, 그게 그렇다면 정신은 어찌해서 그럼 창세기 때에는 정도가 그거니까 문제 해결하는데, 그것 밖에 못돼서 전쟁을 했겠지만 말이야. 이젠 우리가 상당히 이렇게 사람이 발달된 이 시대에서도 전쟁을 하자면 어리석지 않아? 나이 조그만 애 같으면 아버지가 잘못해 “이 자식아” 하고 귀쌈을 갈기지만 말이야, 대학교 가는 걸 아버지가 놓고 “이 자식아” 하고 귀쌈을 갈기면 문제가 안 됩니까? 그건 애비도 애비가 아니고 자식도 자식이 아니고, 그렇지 않아요? 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못 때리게 돼요. 못 때리게 되는 데가, 말 안 듣는 점은 나쁘지만, 저것이 그래도 어른이 됐어. 그래 말을 안 듣는 것 때문에 어른이 될 자격을 잃어버리게 해줘선 아들 교육을 할 수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성경도, 성경을 봐도 우리 이제 이렇게 보면, 나무 자란 것 보면 떡잎 있고 그 다음에 잎사귀 있고 가지, 이런 모양으로 구약시대 마냥 떡잎 시댄 데 말이야. 떡잎시대는 떡잎시대답게 거기 인간의 체험도 있고 성경해석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전쟁도 했고 그랬겠지. 그럼 이제 생명문제에 있어서도 말이야. 그때에는 장생불사라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 무리가 아니에요. 애급 사람만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어떻게 그랬겠나? 생각해보시오. 그랬겠나? 안 그랬겠나? 조금 생각하면 알거든. 왜 그런가 하니 집에서 아버지라든지 어머니라든지 아니라도 좋은 사람만, 어느 미운 놈이 있다면, 죽었어. 저 자식 죽었다, 아깝다, 우리 아버지 돌아갔다, 근데 언제 꿈을 꾸니까 아버지가 천연하게 살아왔어. 그게 지금 우리는 심리학이 다 발달을 해서 그건 꿈이다, 꿈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지만, 단순했던 인간이 꿈을 꿨는데, 우리나라는 상기도 꿈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있는데 말할 거 있어? 그런데 보니까 그럼 아이 죽은 줄 알았는데 안 죽었구나! 안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음 직 합니까? 안합니까?
사망과 생존의 경계선이 어디냐?
필시 영혼불멸이란 이런 따위, 지옥이란 생각도 그래 났을 겁니다. 아, 그러면 꿈을 꾸면 어느 구덩이에 빠져 그놈이 죽을 거니까 평상시에 그놈 미워했었으니까, 나쁜 놈 고생하는 꿈꿀건 정한 일이거든. 그럼 맨 날 그 자식이 죽어서도 좋은데 못 갔다더라, 그랬을 거예요.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뭘 지금까지 그걸 고정을 시켜 가지고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갈 거다, 지옥이 없는 거는 아니지. 지옥이라고 말하고 싶은 여기 어느 생명에 지경이 있지만, 그것이 옛날은 지옥이라는 걸 빌어가지고 왜? 그때 시대엔 그것이 사람의 현실살림이야. 그러니까 그걸 빌어가지고 나왔지만, 이제 지옥이라는 거는 지금 과학을 배우는 사람한테는 넌센스가 된 이상엔, 그것보다는 조금 알기 쉬운 걸 빌어 말을 해야지. 지금도 그 소릴 하면, 대학생을 놓고 상기도 과자 사다줄게 공부 잘해, 그러는 거와 마찬가지 아니냐? 나는 답답한 소리 늘 반복합니다만 이점이 참 답답하다 그 말이야. 그게 무슨 종교에 어그러질 건 뭐있냐? 반드시 새로운 거지. 그러니까 이제 우리나라 종교에도 옛날에 올라가면 장생불사 하자는 게 이 우리나라 고유종교지. 선도, 불교 종교의 거 아니요? 그래 중국 사람도 해동에 나가면 삼신산이 있다, 동래 방장 영주가 있다, 삼신산에 불로초가 있다, 우리나라 불로초라는 것, 인삼 가지고 그랬을 겁니다. 모르긴 모르지만 먹으면 굉장하게 효력이 있고 아휴, 이것 먹으면 죽지 않는다, 불로초라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 건 뭐 때문에 그랬냐하면 거의 신화적인거지만, 인류의 마음 가운데 장생불사 하자는 그거, 이거 아무래도 소중해. 이거 다야? 죽어 놓으면 처음에 아까 말씀대로 죽은 다음에도 거 죽었나? 안 죽었나? 알 수가 없어. 죽은 줄 다 알고 파묻었는데, 꿈에 살아오면 어이쿠 죽지 않았더라, 그러니까 사망과 생존의 그 경계선을 몰라서 그랬겠지만, 차차차차 수만 년 살아오는 동안에 보니까 죽은 놈 파묻은 다음엔 별 수 없더라, 못 돌아오더라, 그러니까 확신을 가졌어요. 그 점이 달라요.
그런데 지금이라는 거는 이 시대는 어떻게 됐냐? 그 말이야. 인제 시대가 변천, 처음에는 그렇게 단순하게 알았어. 이 생각이라면 영혼 불멸이라, 이다음에 육체가 도로 되살아온다, 마리아의 생각도 아직도 그 정도를 못 면했는지 몰라요. 그건 나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그 비슷한 건 글쎄 이집트에도 있었고 바벨론에도 벌써 있었다, 그 말이야.
아까 하던 말 미루었습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혼이 붙을 몸이 있어야 된다, 그래 몸을 보존해야 된다하는 의미에서, 이제 신체를 잿물에다 담가 가지고 썩지 않게, 왜 그런가? 혼이 와도 어디가 붙을 데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몸을 보존해야 된다, 그러니까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재산을 다 들여서라도 이 몸을 보존, 그래도 이놈의 거 썩을 런지 몰라. 그러니까 만일을 위해서 이거 썩어진다면 대신하자, 그래 흙으로 허재비를, 많이는 열 개도 스무 개도 있어요. 굉장히 많이 만들어서 그걸 넣어요. 그렇게 해서 비로소 어느 하나에 붙어서라도 이다음에 혼이 돌아와요. 그러는 아주 유치한 것 같지만, 우리가 거기서 싹을 봐야 돼요. 지금은 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과의 무슨 줄이 가 닿는 데를 발견해야지. 그 유치하던 시대에 그랬다, 과학자는 그렇게 돼서 신앙을 내 버렸어요. 또 이 사람들은 뭔가 하니 옛날 하던 그 생각대로 고집을 하고 과학을 배격을 해. 그러니까 현실살림에 맞지를 않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 사람의 개인의 자격의, 개인으로서의 이렇게 깨기 시작한 다음에는, 그래 내세라 하는 생각, 이거 허망한 세계라, 허망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허망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겁니다. 근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지라, 주의하지 못하고 허망하다, 허망하다, 그런 허망이라는 생각은 그건 신앙 없는 생각이야. 시간 공간 완전히 지배 받는데 허망이 무슨 말이야. 다른 말로 하면 덧없다, 그 말이야. 왜 요렇게까지, 이제까지 요렇게 말하고 그러던 말하고, 더구나 그 마음 내가 알고 내 마음 그가 알고 그랬는데, 죽으니까 다르구나.
아, 인생이 허망하다. 꽃이 돼서 꽃이 예쁜 꽃이지만 이제까지 있었는데 똑 떨어져. 떨어지면 다야. 허망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괜찮아. 왜? 그건 본래 물질은 다 그런 거야. 그러니까 단념이 되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념이 되지를 않아. 그럼 이제 말할 순서가 자꾸 또 바뀝니다만, 뭐 그러냐? 꽃이 아까워. 이때까지 있던 요렇게 예쁘던 꽃이 떨어지면 다르구나. 아 아깝고 덧없다, 덧없는 것을 말할 때 꽃을 비유로 들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그래도 괜찮은 것, 사람이 죽으면 아주 참 허망을 느껴. 그건 왜 그러냐? 이제 다른 것은 뭐 다르냐? 그러면 다른 거 아니고 꽃은 말을 못하고 사람은 말을 하는 데가, 말이라고 했습니다만, 생각이라고 해도 좋고, 언제나 우리가 죽음은 왜 죽음대로 무서우냐? 그러면 죽으면 생각을 못해. 몰라. 죽으면 모른다고 하는 데가, 그 다른 것도 이 죽음이 뭐 무서우냐 하는 요소가 있긴 있습니다만, 죽은 다음엔 영 모른다고 하는 게 그게, 영 다시 돌아올 수 없다하는 데가 무서운 거야.
꽃은 물건이니까, 그건 본래부터 말하지 않던 거니까, 그저 본래 그런 거 떨어지면 떨어져 그래. 아마 이것은 살아서 말하던 건데, 암만 찾아도 대답이 없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 네가 왜 이 꼴이냐? 그래 그리고 나면 한걸음 나가서 아이쿠, 하나님도 무정하다, 그래.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지. 전혀 신앙 없는 소리, 신앙을 만일 가졌을 진대 그럴 리가 없잖아? 허나 우리가 여기를 오려면 이게 쉽게 오는 게 아냐? 인간의 상식이라고 할 만큼 여기를 왔습니다만, 인류가 어린시대에 게까지, 거기 가기가 대단히 어려워.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해서 그때는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현상적으로,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 그러는 사람들이니까 죽었다면 이 몸이 죽었다면 큰 문제야. 산다면 이걸로만 생각해. 그런데 거기 와서 혁명을 일으키신 것이 누구냐? 그게 예수야.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살았다고 할 때에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어. 육신이 산 것도 살았다고, 그 의미로 쓰는 때도 있습니다만 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땐 이 속에 정신적인 생명을 두고 말하는 거지. 이게 아냐. 이게 아냐. 그래 메시아라 하는 종교, 여러 번 말씀하는 겁니다만, 메시아에 관련을 두고선 메시아라 하는 건 여기도 그러지 않았어요? “네가 믿느냐.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인줄 압니다.” 그러면 무슨 소리냐 하면 종래의 신앙대로 이스라엘 나라에 이렇게 형편이 없지만, 이게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면 그 메시아가 오면, 외국 대적을 다 물리쳐 보내고 말이야. 아주 우리가 다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아주 그 현실적인 이상, 이상적인 임금이라 할까, 지도자예요. 그걸 믿었어요. 그랬는데 예수님에게로 오면 그게 없어져요. 그게 없어지는 데가 예수님이 예수님 되는, 소위 그가 십자가에 달리는 까닭이 그 때문이에요. 몰라. 모르겠습니다만 유다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로 뽑혔다가 예수님을 팔게 되는 것도 그런데 낙망을 해서 그런 거 아닌가? 자기 생각에 기대했던 그 메시아와 예수에게서 보는 것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래 그런 거 아닌가하는 그런 추측을 많이 합니다만, 그런지 몰라요.
가지가지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
그래 열둘 중에 뽑혔는데 아주 얼마나 했겠소? 사람도 똑똑했기에 회계 맡지 않았어요? 그래도 회계 맡긴다면 똑똑한 청년이 아니면 안 맡기는데, 전대를 가지고, 요샛말로 경리 맡아 봤는데, 그러던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데는 상당히 깊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야. 까닭이 있었을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저 그런 걸 전부 모두 그따위 관계로 해석을 하고 싶은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를 중 가운데 엮어서 무슨 서로 사랑관계 하니, 그것은 모르는, 난 예수님은 그 레벨을 훨씬, 우리는 못생겨서 상기도 거기서 이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인간입니다만, 예수님은 그 점에선 인생이 아니 돼서 그런 거 아니라, 그 점엔 훨씬, 그러니까 그런 따위가 저와 같은 종류인줄만 알고 소설을 그렇게 쓰지만, 그건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심각한, 더 큰 문제가 아마 유다에게 있어서 뭐 그렇게 됐을 것인데, 그런 문제가 그 현실적인 메시아 또 영적인 메시아, 그 물론 다 이렇게 완연히 선을 그어 구별할 수 없습니다만, 선을 긋는 거 아닌데, 아까 말씀대로 자랐다, 자랐다, 자라고 나면 근본은 같은 건데 그 나타나는 모습은 달라요. 그건 왠고 하니 우리 있는 이 현상계란 가만있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야. 인간의 역사는 더구나 변하는 거기 때문에 변하는, 자라는 거. 자라는 정도에 따라서 다시금, 다시금, 근본이치로 하면 영원불멸하는 생명이요 진리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체험이 돼서, 더구나 체험이 된 다음엔 그 체험된 건 반드시 이렇게 표현이 되게 마련입니다. 표현 안 되면 안돼. 반드시 표현되기 마련이고 표현해야 돼요.
이제 오늘은 여기 처음오신 분들이 계시니까, 또 이다음에 만나겠는 지, 못 만나겠는 지, 그래서 두 주 전에 반드시 제가 드린 말씀인데, 또 다시 반복을 하렵니다.
저는 요한복음에 있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참으로 예배해라” 하는 건 그 의미를 취합니다. 이다음엔 그보다 더 깊은 해석을 얻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도 수십 년 오면서도 마음에 시원치 않던 것이 근래에 오다가 그렇게 생각하는 고로 얼마쯤 많이 풀렸어요. 하나님은 영이니까 영으로 예배하라는 건 알겠어요. 참이란 소리는 왜 갖다 붙였는가? “영과 참으로 해라,” 그럼 참은 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였는데, 근래에 오다가 뭐라 하는가 하니, 그거는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 된다. 무슨 말이, “말씀이 육이 돼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런데 육이 돼야 참이야. 하나님이 하나님대로 계심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알 수 없어.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게 어떤가 하니 어느 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만,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게 돼있다 해요. 우리가 이력으로 아는 것 아니라 이 세계가 그렇게 돼 있어요. 이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야. 한 가지 백 가지로 가지가지로 하는 게 아냐? 하나님이 계시를 우리 마음에 이성이라는 것이 고렇게 됐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알지를 못하니까 요렇게도 알아보고, 요렇게도 알아보고. 그래서 가지가지로 계시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 히브리서 처음에 하나님 이때까지의 자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가지 경우를 따서 나타내셨지만, 이 마지막 날에는 자기의 아들을 통해서 단번에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있지 않아요? 그럼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체험한 것은 그겁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 이렇게 이렇게, 가지가지 여러 가지 모양을 여러 가지, 한 가지가 아니에요. 그렇게 하여간 자기를 나타내시는 그 하나님, 그럼 나타내시니까 하나님이지. 나타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우리에게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아닌 우리라는 거 우스운 말입니다만,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았다면 내가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예수 같은 인격이 또 날 수 있습니까?
뭐 이런 문제는 지금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상당히 들었습니다. 그 전엔 어쨌어요? 그 전에 처음에는 사람이 발견된다면 거기만 알아요. 그래서 그 생각이 모두 신화적으로, 신화 전설적으로 되지 않아요? 그래서 또 그 다음에 내려오면 철학적으로 되니까 어떤가 하니, 이 현상계는 이건 허망한 거다, 이건 가짜다, 불교에도 그 사상이 있고, 동양에도 그 사상이 있습니다만, 속에 정신은 참된 거지만 이거는 한 꿈이다, 한 환상이다, 그렇게 불교에선, 나 잘 모릅니다만, 많이 그렇게 말 듣지 않아요? 그렇게 한 고로 그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깼어.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이걸 환상이라 그럴 수가 없어요. 이건 물론 실제 우리 정신이라 하는 게, 실제라 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의미로 실제는 아니지만, 이것도 결코 꿈이 아니에요, 꿈이 아니냐? 꿈이라고 해도 어떤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으로 가지는 꿈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게 근래에는 아마 조금 생각을 똑똑히 하는, 철학이라면, 신학이라 한다면, 이것을 꿈같은 세상이라고. 우리 저 찬송가에도 꿈같다고 그랬습니다만, 꿈같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꿈은 그럴 수가 없어요. 왠가 하니, 이게 꿈이고. 뭔가 하면 이것 내놓고는 몰라, 이것 없이 하나님, 이제 다른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알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런 거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게끔 해 준 이가 있어. 그전에 그건 어느 부분씩을 조금 그렇게 했어. 엘리아에서도 조금 느꼈지, 예레미야에게서 조금, 이사야에서 조금 느끼고 했지만, 예수에게서 사람들이 느낀 건 이거는 뭐 어느 부분 어느 정도가 아니다, 이건 정말 참 아주 완전히, 이 이상 더 할 수 없이 아주,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은 “나를 본 자 하나님을 본 거다.” 자기 말씀도 그랬지만, 저이를 보면 하나님을 우리가 본 거다, 그렇게 믿게끔 됐다는 데가 그 놀라운 곳입니다.
그러면 이건 또 거기 따라 여담이 됩니다만, 그러면 이다음에는 예수 같은 인격은 또 날 수 있습니까? 그럼 못납니까? 그건 또 딴 문제가 돼. 그런 의심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만, 그건 부득이 이다음에 어느 기회가 있으면 토론을 하기로 하고, 하여간 “영과 참으로 예배하라.” “영으로만 예배를 하라.” 영으로만 그러지 않았어? 영으로 하는 예배지만 영이 영만 돼가지곤 막연해. 뭐 이제 우리 아까 저기 다른 데서 예배를 하고 왔습니다. 우리가 앉아 예배하면, 근래에 인제 다른 것 아무 것도 않고 가만 고요하게 앉아 예배합니다만, 고요히 앉아서 예배를 하면 곧잘 잠이 와요. 졸아요. 그게 왜 졸음이 오겠나? 그래서 내가 소감이 무슨 소감이 생겼나 그러면 나쁜 짓을 안 하기만 하면 선한 것처럼,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나쁜 짓 안 하는 게 무슨 선한 일이냐? 이 현대에는 대부분 그런 생각이 있어. 나쁜 짓 안하면 나도 어지간히 착하다 그러지? 나쁜 짓 안 하는 것만 가지곤 선이 아니에요. 선은 적극적으로 해야 돼. 그건 왜 그러냐? 악이라는 게 본래 선의 부정만이 아니야. 악이 이 세상에 실존해 있어요. 내가 수년전에 글을 쓸 때에 ‘참말로는 죄는 없다’ 그랬습니다만 그건 지금도, 그거 잘못이라고 내가 취소하거나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게 말하는 데가 또 있습니다.
그건 토론할 거지만, 결코 그것 쓸 때에도 이 세상에 죄악이라는 게 실재해 있지 않다고 하는 의미로 쓴 거 아니에요. 이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죄악에 대한 것은 기독교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도 다 죄악 실재해 있는 거지. 선은 못하는 부정정도만이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으로 살자고만 하면 어차피 싸움이 있게 마련이야. 육체적으로만 속에서 이거냐? 이거냐? 적극적으로 싸우게 생겼는데, 왜 예배한다고 하는데, 고요한데, 고요하다고 하는 거를 그저 소리도 안내고, 말도 하지 말고, 뭘 만다고만 하는, 네거티브로만, 부정으로만 생각을 하니까 이게 그렇게 돼. 그런 거 아니야. 아무 것도 안하는 대신에 맹렬하게 활동을 해.
지식하고 종교 신앙하고 혼동하지 말라
안식일이라면 도대체 무슨 안식일을 겉껍데기로 취하니까, 말이 자꾸 딴 데로 나가서 미안합니다만, 안식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식일은 쉬는 날, 쉬는 날이라면 쉰다 하는데, 물론 의미가 있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의 뜻을 생각하면 뭐냐? “내 아버지는 지금까지 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해석하신 것은 안식일이야 말로 굉장히 활동하는 날이야. 그래 육체는 쉴런지 모르지만 정신은 모두 다 아닌 게 아니라 정신이 맹렬하게 활동하기 위해서 그날 육체가 쉬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잘못 생각하면, 그럼 이러면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하게만 생각을 하면 대단히 소극적으로 생각이 돼서, 말하자면 중성적인 마음 중성적인 마음에 태도만 가지고는 선은 없다, 그 말이야. 이것이 현대에 유심리에 무심리에 다 빠져 있는 생각입니다.
크리스천까지도 나쁜 짓 안하면, 나도 그래도 완전은 아니겠지만, 꽤 선한 사람이지?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요. 허나 그렇지 않아요. 우리 강조하고 싶은 거, 이 세상에 존재해 있는 악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거, 그런 게 선인가 말이야. 그저 나쁜 짓 안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중성적인 그런 지경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게 이제 사는 문제, 거기도 이 세상은 꿈이라고 생각 했어. 그건 그때 사람의 지식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런 점이 현대 사람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건 제가 다 지내봤던 거니까, 저로서는 다 많이 고통이 있긴 합니다만, 뭐 그리 또 높은 정도는 그러겠어요? 허나 이 지식의 세계에 이 지식을 어떻게 하냐?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자꾸 자꾸 이런 말이 나옵니다만, 지식하고 기독교의 종교 신앙하고 혼동하지 마시오. 그게 서로 직접 반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혼동하는 생각이에요.
가령 쉽게 말씀드리면 말이야. 창세기의 말, 하나님이 창문을 열어놓고 비를 내리 쏟았다, 40일 동안 내리 쏟으니까 홍수가 나서 사람이 다 죽었다, 창문을 열어 놨다, 그것이 그때 사람의 상상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아주 그게 그때의 지식이에요. 그래 처음 창세기 맨 처음에도 하나님이 이것 만드는데, 이 하늘 있고 위에 올라와 궁창이라 하는 걸 두어서 하늘 위엣 물과 하늘 아랫물로 구별했다 그러지 않아요? 그건 저기 은하수를 보고 저걸 정말 물로 생각했어요. 아닌 게 아니라 물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거든. 어디 있다 올까? 저거 아마 하늘 위에 있는 강일 거다, 그래 은하라고 해. 동양에서도 은하라고 하고 서양 사람도 우유를 먹기 좋아하니까 밀키웨이(Milky Way)라고 해서 우유라고 그럽니다만, 저거 물이라고 그랬어요. 그 물이 있다가 어떻게 안 떨어질까? 평상시에는 문을 닫고 창문을 잠가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열어놓으니까 내려온다, 그때 단순하고 유치하던 사람의 유치가, 마음이 유치가 아니라 지식적 과학으로 하면 유치해. 그건 할 수 없어요.
자꾸 하는 말입니다만, 그럼 뭐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 처음부터 왜 그렇게 안 만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 이 자라는 걸 보고 사랑하는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 이렇게 자기 생각으로만 들으려고 그러지 않아요? 제가 되기를, 제가 자라서 되기를 기다려. 그래 이 현대에 있어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좀 도움이 되자. 저는 좌우간 그걸로 인해서 어느 막혔던 걸 뚫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점에 관해서만은 제 딴으로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점엔 관계없어. 그때 지식으로 하니까 궁창에 물들어, 요새 과학으로 궁창이고 문이고 아무것도 없다, 있긴 뭐가 있어? 올라가야 공기층 있을 뿐이지. 구름이 식어서 된다, 그래도 조금도 하나님의 죄도 아무 것도 될 것 없어. 허나 뜻을 생각을 하면 뜻의 세계를 말한다면 뭔가 하니,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 그래 그 정도가 그럼 옛날 것 뭐 차차차차 신앙이라는 게 과학 발달로 인해서 쫓겨서 갔다, 그렇게 생각할는지 몰라.
갈등 없이 인류역사 없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저 산에 와 계시더니, 조금 발달이 되니까 조금 피해서 저 하늘에 올라가 있더니, 이제는 하늘에도 못 있고 어디 다 쫓겨가고 말았다, 하나님이 뭐 죽어 없다더라. 그래도 아무 말도 못하는 이 할아버지, 그게 뭐 산거냐? 죽은 거냐? 그럭하면 과학에 의해서 이 종교가 점점 쫓겨 가. 하나님의 영토는 점점 줄어져 없어진다고 내가 그래요. 하나님 거기가 잘못이에요. 하나님이 본래 영토를 가지지 않았느냐? 영토를. 이 세상에서 비유를 하니까 만왕의 왕이다 그러지. 뭣이 부족해서 왕 같은 거 하겠다고. 너는 부족하니깐 왕이 잘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왜 무슨 왕은 무슨 왕이냐? 그런 점쯤 좀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뭐 옛날에 가난하던 때니까 황금,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주면 좋다 그러지. 이제 차차 금은 무슨 그 뭐 요샌 금보다도 더 좋은 거 차차 나오고 있지 않아요? 그러면 그런 모양으로 그때 지식으로 하니까 그런 거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땐 그대로 본거에요. 이제 발달이 되면 지금껏 대로 말이 같은 뜻은 같은 뜻인데 달라지지 않습니까? 이래 이런 점 있는 거를, 이건 신앙도 아니고 신앙 설명해 가는데 초보 되는 말입니다만, 제가 지내봤으니까 마찬가지로 현대 사람들도 그런 고민들이 다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 있을 때 ‘아이, 내가 신앙이 부족해 그럴 거야. 이게 신앙이 잘못돼서 그럴 거야.’ 그렇게 덮어둬도 일시는 덮은 것 같지만, 요놈의 싹이 또 나오지 안 나오지 않습니다.
예, 그러기 때문에 종교의 역사를 봐서도 이제 옛날과 보는 거야. 그전에 한 땐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싸워. 그건 누가 난 거 이름도 잘 몰라. 어느 편이, 그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이라 하고, 어느 편은 사람이라고. 아타나시우스가 사람이라고 하는 편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잊어버렸는데, 그때 종교회의에서 그 사람이 이기고, ‘어, 신앙에 승리했다’ 그러지만 그 사상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지. 안 나오나요? 이 앞으로도 지금도 나와 있고 또 나올 겁니다. 요샌 들내놓고 비종교화하자, 기독교는 종교 아니다, 세속화하자, 뭐 이러고 있지 않아요? 그런 모양으로 한번 문제가 되는 거면 또 나오게 마련이야. 그런 게 그 이기고 졌다하는 거기 있는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에 생명의 단계가 자꾸 높아가요. 그 점을 주의해야 돼요.
그러니까 옛날 모양인데도 사람이 뭐 죽어서 저승이라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염라대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토론해도 그건 옛날사람에겐 그게 형식적인 사실로 생각된 것이지만, 과학이 있어. 지금은 그런 것 없어지면 그것과 달라. 다르지만 그 대신에 지금은 그것과 다른 형식으로 또 이렇게 싸우고 있어. 그럼 그때 말하자면, 그 천당 지옥이 싸움을 하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그랬듯이 말이야. 지금도 또 역시 이러지만, 문제는 거기 어느 신학이 이기냐? 어느 철학이 이기냐? 하는데 있는 거 아니라, 그 싸움을 하는 동안에 생명의 정도가 높아져. 이웃집 아이하고 과자 하나 줬다고 싸우고 때리고 코집이 터지고 그러지만, 그랬다고 선한 것도 아니고 그랬다고 악한 것도 아니야. 그러는 동안에 우리집 애도 자라고 옆집 애도 자라서, 그거 없이는 못 자라요. 없이도 자라면 좋겠지만. 이 인간 세계가 그렇게 된 세계예요. 선악의 판단을 하는 걸 하나님이 넣어 주어 가지고 된 이거기 때문에, 창세기 첫마디가 그걸 말하는 겁니다.
선한 것 있고 악한 것이, 이 갈등 없이 인류의 역사 없다, 종교조차도 없다, 하나님조차도 알 수가 없다, 그걸 말하는, 그러니까 그걸 바울 식으로 말하면, ‘야, 죄가 깊은데 은혜도 많다.’ 그렇게 말합니다만, 그것은 그 이원적인 걸 어떻게 극복을 해 가지고 참 믿는데 갔나?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요컨대 이원적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이원론을 극복하나? 하는데, 이원이 없어진 이원적으로 돼있는 거니까 전연 없어질 순 없어요. 그 순간순간 어떻게 우리가 극복을 해서 한 단계 한 단계 높아가. 지금 된 것 같아도 올라가면 또 새 잎 위에 또 가지가 나와요. 그럼 또 올라가고 이러는,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게 하고 현대 있는 사회문제와 과학문제를 한번 대결을 해. 그러면 아까 말씀한대로 제가 네 하나님이 이쪽으로 밀쳐도 안 돌아가고 안 죽고, 이쪽으로 밀쳐도 안 넘어 간다, 걱정이 없다는 얘기.
그런데 오늘 이 죽음 문제도 이때 아마 생각이 서로 예수님의 생각과, 도대체 인생관에 생명관에서 차이가 있어. 뭣이 예수님이 살았다는 것과 바리새교인이 살았다 하는 거,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았다 하는 거, 말은 같은 말인데 같지를 않아. 또 죽었다고 하는 것도 같은 죽었다고 하는데 같지 않아. 그것 때문에 복잡하게 그걸 어떡하면, 그럼 하나 단위가 없으면 안 돼. 그것 안타깝지. 요걸 어떻게 단번에 해서 얼마나 하면 먼저 번에 말이 “여보시오, 당신이 메시아면 메시아라고. 아니면 아니라고 제발 밝히 말해 달라.” 사람의 마음을 요렇게 졸이게 그러지만, 그걸 고렇게 말하는 재주가 없어. 안타깝게 그렇게 되는 데가, 그걸 통해서 사랑을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연한 데 불행이 있는 것도 아니야. 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해보고, 우린 그게 목적인 것 같아서, 울고불고 하지만 말이야. (녹음14, 3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