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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상(李弘相)
[문과] 효종(孝宗) 3년(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6위(09/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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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제경(濟卿)
호(號) 동곽(東郭)
생년 기미(己未) 1619년 (광해군 11)
합격연령 34세
본인본관 연안(延安)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619년(광해군 11)∼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제경(濟卿), 호는 동곽(東郭).
조부는 이정귀(李廷龜)이고 부친은 이소한(李昭漢)이며 모친은 이상의(李尙毅)의 딸이다.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결혼하였다.
1652년(효종 3)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에 을과(乙科) 6위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이르렀다. 부인 강씨에 대한 의리로 평가받았다.
[참고문헌]國朝文科榜目 肅宗實錄 朝鮮人名辭書
[진사]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21위(2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통덕랑(通德郞)
관직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문과시제 책문(策問):성변(星變)
타과 1633년(인조 11)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21위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주2)【補】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소한(李昭漢)[文]
증직 :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사 세자부(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春秋館事世子傅)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 형조참판(刑曹參判)
겸직 : 겸 세자좌부빈객(兼世子左副賓客)(주3)【補】
[조부(祖父)]
성명 : 이정귀(李廷龜)[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계(李𡹘)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상의(李尙毅)[文]
본관 : 여주(驪州)【補】
[처부(妻父)]
성명 : 강석기(姜碩期)[文]
본관 : 금천(衿川)【補】
[안항(鴈行)]
형(兄) : 이은상(李殷相:異元相)[文]
제(弟) : 이유상(李有相:異匡相)[文]
제(弟) : 이익상(李翊相)[文](주4)
[주 1] 거주지 : 『임진10월24일증광별시급제방목(壬辰十月二十四日增廣別試及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6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 구존 : 『임진10월24일증광별시급제방목(壬辰十月二十四日增廣別試及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6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모 구존을 추가.
[주 3] 부관직 : 『임진10월24일증광별시급제방목(壬辰十月二十四日增廣別試及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6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주 4] 안항 : 『임진10월24일증광별시급제방목(壬辰十月二十四日增廣別試及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64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十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소한(李昭漢)
[문과] 광해(光海) 13년(1621) 신유(辛酉) 정시(庭試) 병과(丙科) 1[探花]위(03/11)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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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도장(道章)
호(號) 현주(玄洲)
생년 무술(戊戌) 1598년 (선조 31)
졸년 을유(乙酉)(주1)【補】 1645년 (인조 23)
향년 48세
합격연령 24세
본인본관 연안(延安)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진주목사, 예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서울 출신.
부호군 이순장(李順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이계(李啓)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이며, 어머니는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한다.
1612년(광해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나가 벼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함께 승문원주서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승진되면서부터 풍부한 학식이 정부 관료들간에 널리 인정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환도한 뒤에는 전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절용애민(節用愛民)의 정치를 펼 것을 진언하였다.
그 뒤 다시 수찬·정언·교리 등의 문관 요직에 있으면서 상소나 혹은 왕을 모신 자리에서 정사와 왕실의 잘못을 지적해 때로는 왕의 비위를 거슬리기도 하였다.
1626년 수찬으로서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왕을 모신 자리에서 내수사를 파해 국가 공용에 보탬이 되도록 주청하였다. 1632년 신진 유신들과 함께 인조의 사친(私親)인 정원군(定遠君)의 왕호추숭(王號追崇)을 반대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충원현감·진주목사·예조참의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1643년 왕세자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세자우부빈객 동지중추부사로 호종해 보좌했으며, 이듬해 귀국해 형조참판으로 비변사당상을 겸임하였다. 아버지 이정구, 형 이명한(李明漢)과 함께 3소(三蘇)라 일컬어졌다.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가 깊었으며, 20여 년간 관계에서 활동하면서 『동사록(東槎錄)』·『진양록(晉陽錄)』·『심관록(瀋館錄)』·『방축록(放逐錄)』 등의 시를 남겼다. 시문집으로는 『현주집』 7권이 있다.
[문과] 인조(仁祖) 4년(1626) 병인(丙寅) 중시(重試) 을과(乙科) 2[探花]위(03/08)
[진사]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6위(6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1명 [甲1‧乙1‧丙9]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형조참판(刑曹參判)
관직 호당(湖堂)
문과시제 전(箋):의본조훈련도감진충렬록(擬本朝訓鍊都監進忠烈錄)
타과 1612년(광해군 4)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35위
본인문과 1626년(인조 4) 병인(丙寅) 중시(重試) 문과(文科) 을과(乙科) 2위[探花]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정귀(李廷龜)[文]
[조부(祖父)]
성명 : 이계(李𡹘)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순장(李順長)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극지(權克智)[文]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이상의(李尙毅)[文]
본관 : 여주(驪州)【補】
[가족과거]
자(子) : 이은상(李殷相)[文]
자(子) : 이홍상(李弘相)[文]
자(子) : 이유상(李有相)[文]
자(子) : 이익상(李翊相)[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九(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정귀(李廷龜)
[문과]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0위(30/4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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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성징(聖徵)
호(號) 월사(月沙)
시호(諡號) 문충(文忠)
생년 갑자(甲子) 1564년 (명종 19)
졸년 을해(乙亥)(주1)【補】 1635년 (인조 13)
향년 72세
합격연령 27세
본인본관 연안(延安)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 보만당(保晩堂) · 치암(癡菴) · 추애(秋崖) · 습정(習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현령 이계(李𡹘)이고, 어머니는 김표(金彪)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이정귀는 문장으로 이름 높던 가문에서 출생해 가문 내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주3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했다고 전한다.
1577년(선조 10)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1585년(선조 18)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設書)가 됐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해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후에 『대학강어(大學講語)』로 간행됐다.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에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다.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켰다.
이정귀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1601년(선조 34)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귀국한 뒤에 대제학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했다.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 장(章)의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조판서 · 예조판서와 우의정 · 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이정귀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치군택민(致君澤民)주8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주9의 관인문학을 성실히 몸으로 실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주10을 보였다.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 · 이식(李植) · 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주11로 일컬어지게 됐다. 이정귀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浩蕩)주12하고 표일(飄逸)주13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문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장유도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칭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주14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사대부가 마땅히 해야 할 순수한 문학을 창작으로 실천하면서도 「무술변무주」등의 외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실용문을 써 이름을 알린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정귀의 문학은 한편으로 이웃 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를 위한 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쓸모를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있다는 평가도 아울러 받고 있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月沙集)』이 전한다.
[진사]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7위(77/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40명 [甲3‧乙7‧丙30]
전력 종사랑(從仕郞)
관직 문형(文衡)
관직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문과시제 표(表):송조보청물선하태원(宋趙普請勿先下太原)
타과 1585년(선조 18)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47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계(李𡹘)[進](주3)
[조부(祖父)]
성명 : 이순장(李順長)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혼(李渾)[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표(金彪)(주4)
본관 : 광산(光山)【補】
[처부(妻父)]
성명 : 권극지(權克智)[文]
본관 : 안동(安東)【補】
[가족과거]
자(子) : 이명한(李明漢)[文]
손(孫) : 이익상(李翊相)[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을유8월사마방목(乙酉八月司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532])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부 :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 내의 급제 기록과 『을유8월사마방목(乙酉八月司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532])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부를 "이계(李㬖)"에서 "이계(李𡹘)"로 수정.
[주 4]외조부 : 『상촌집(象村集)』 제28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삼등현령 증영의정 이공신도비명(三登縣令贈領議政李公神道碑銘)]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1441년(세종 23)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 이어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직전(直殿)·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응교로 재임한 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했으며, 왕명으로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로 학문에 진력하였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 뒤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6년 6월,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전해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겨서, 치죄하자는 대간의 여론이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묵살되고 오히려 예조참의에 올랐다.
1457년 판공주목사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원사로 잠시 한직에 있었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이 되었다.
1460년 세조의 특명으로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의 서쪽 지방 순행을 도와, 세조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한다. 이듬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고, 1462년 호조참판을 거쳐 판한성부사에 7년 동안 재임하였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를 겸해 호패법을 철저히 고핵(考覈: 조사해서 밝힘)해 정리하였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70년(성종 1)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지성균관사를 겸해 주문(主文)의 위치를 맡았다.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필법이 신묘하고,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고려사』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 때에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의 구결을 주관하였다. 만년에는 성균관 서쪽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시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21권과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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