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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0년 3월 15일 주일오후설교
“예배란 무엇인가” 주제설교
성경낭독 : 시95; 롬5:1-11
본문 : 출24:1-11; 느8:5-12
제목 : “예배란 무엇인가 4 : 예배와 언약 갱신”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44편 1,2,6
성경낭독 후 찬송 – 시52편 5,6(고정)
아멘찬송 - 시107편 1-5
폐회찬송 - 시20편 1,4(고정)
예배란 무엇인가 4 : 예배와 언약 갱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전 설교를 통해서 예배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또 그 때의 교제라는 것은 무엇보다 ‘언약적 사귐’,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와 복과 거룩을 주시고, 우리 편에서는 그 받은 것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배는 그야말로 ‘언약적’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은덕과,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복과 거룩을 주시는 자리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것을 받은 은혜에 감읍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언약 교제’라고 받을 때, 이 때 예배에는 이 언약에 대한 ‘지속적 갱신’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거나, 그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 역시, (성경을 새로이 기록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우리, 백성들 간에 일어나는 언약 갱신의 현장이라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예배와 언약 갱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오전의 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입니다. 오전에는 예배가 언약적 교제라는 사실을 배웠는데, 이제 조금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하나님께 예배할 때, 거기에 언약 갱신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들음으로, 우리들의 예배가 매주 매주 새롭게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는 자리임을 깨닫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약 갱신의 사례들
노아의 예배
예배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만 되어 있고 그 내용이 잘 나타나지 않는 본문들을 대강 제하고, 어느 정도 예배의 모습들이 드러나 있는 것들을 살피다 보면, 성경에서 가장 먼저 예배의 모습이 어느 정도 기술이 되어 있는 곳이 노아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도 예배의 모습이 나오기는 하지만 예배 자체의 성격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기 때문에 노아를 제일 처음으로 잡게 됩니다.
노아 홍수가 끝나고 배에서 나와 노아가 한 첫 번째 행동으로 기술된 것이 창세기 8장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창8:20)
“단을 쌓고”, “번제를 단에 드린” 것은 아주 전형적인 예배 행위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아의 이 행위는 아주 전형적인 예배 행위입니다.
나중에 레위기에 가서는 이것이 제대로 법으로서 규례들이 주어지지만, 사실 제사를 통해 예배하는 것은 애초에 처음부터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방식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대로 성경에 처음 나오는 예배에서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태우는 등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물들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노아가 드리고 있는 예배의 방식 역시 자기가 창안한 방식이 아니라 오래된 방식, 즉 조상으로부터 쭉 전해 내려오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아가 예배를 드리자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흠향하다”(히. 루아흐)는 것은 말 그대로 “냄새를 맡다”라는 뜻입니다. 노아가 제물들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께서 그 냄새를 맡으셨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6장 31절 같은 곳을 보면 제사 전체를 “향기로운 향을 흠향하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노아가 예배 행위로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향기를 맡으셨다.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까?
1)
당연히 일차적으로 여기에는 노아의 제사와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 사이에 ‘교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주고 받음’이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맡으셨습니다. 즉 예배라는 것은 언약의 한 편만이 개입된 ‘일방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지요. 한 편에서 주기만 하고 다른 한 편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는 쌍방이 다 등장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인 하나님께서 여기 보이도록 임재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라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받으시는지 안 받으시는지 확신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아이들이 예배 태도가 좋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어떻게 그런 태도로 드리느냐!”라고 혼을 내지만, 아이들이 예배 태도가 좋지 않은 이유는 쉽게 이해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실감이 나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태풍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울리면서 하나님이 예배 자리에 눈에 보이도록 임재하신다면, 아마 우리 아이들 중 누구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배할 때 비록 실감나지 않아서 한 편만 예배에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노아 역시 우리처럼 하나님이 눈에 보였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노아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예배도 역시 하나님께서 항상 받으심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구약시대의 ‘제사’에서도 역시 ‘내 편에서 하나님을 위한 어떤 퍼포먼스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배자 간의 상호 교통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예배는 노아의 시대 때부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교제였습니다.
2)
그리고 이 뿐 아닙니다.
이 노아의 예배에는 조금 더 ‘언약’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해 주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계속해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라는 말씀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
아멘!
노아가 예배를 드리고, 또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여기에 덧붙여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는데, 이런 내용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네! 이것은 ‘언약 갱신’입니다. 특히 구속역사에서 창세기 8장에 나오는 이 노아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우리는 보통 ‘보존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전에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셨지만, 앞으로 다시는 세상을 멸망시키시지 않겠다!” 이런 내용이기 때문에 ‘보존 언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면서 노아, 곧 인류와 언약을 새롭게 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정황’을 통해서, 즉 노아와 언약적인 교제를 하는 한가운데에, 이 ‘새로운 언약적 맹세’를 노아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노아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중요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우리가 오늘 오전에서 배웠듯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언약적 교제입니다”라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동시에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은 이 예배를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들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특히 노아의 때에는 이전에 도입되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으로 언약이 갱신되었습니다. 전에는 물 심판이 가능했는데, 노아가 예배드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앞으로 물 심판은 없다. 땅은 항상 보존될 것이다”라고 언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 그것을 언제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께 백성들이 예배드릴 때, 그 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갱신의 방편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하여 자기 언약을 갱신하시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바로 “예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동시에 ‘언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언약 : 희생 제사
이러한, 예배를 통한 언약 갱신은 발견하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예배를 통해 언약을 갱신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족장 시대의 예로 아브라함에게서도 이 사실을 한 번 찾아봅시다.
먼저 ‘언약’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려 놓고 생각해 보겠는데요.
우리말로는 언약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동사가 주로 “맺는다”나 “체결한다”입니다. 통상 우리 표현은 “언약을 맺다”, “언약을 체결하다” 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처음 언약을 체결할 때는 “언약을 수립한다”라고 하기도 하고, 언약을 새롭게 할 때는 “언약을 갱신한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모두 언약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말이 사용하는 동사들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동사로는 언약을 맺는다는 것을 말할 때 조금 다른 용어를 씁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언약을 ‘자른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언약이 히브리어로 ‘베리트’인데, ‘자르다’가 ‘카라트’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다’라고 하면 히브리어로는 ‘카라트 베리트’, 곧 ‘언약을 자르다’가 됩니다.
이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왜 언약을 ‘자른다’라고 말할까요? 아마도 이것이 고대의 언약 체결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 15장에 보면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하나님께서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자, 땅을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을 주시고, 아브라함이 이에 대해서 “제가 이 땅을 업으로 얻을 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창15:8)라고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제물들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언약을 맺자는 것이지요. 이 때 아브라함은 짐승들을 반으로 쪼개 놓고 양쪽으로 벌려 놓습니다. 당시 언약 체결 의식은 동물을 반으로 쪼갠 뒤에 그 사이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계약을 할 때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데, 고대 근동에서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행위가 바로 동물을 반으로 쪼개 놓고 그 사이로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이 짐승들처럼 쪼개지겠다”라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 ‘쪼개짐’이 언약을 맺는 전형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언약을 ‘맺는다’는 단어는 ‘자른다’가 되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기다리는 장면에 희생제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언약 체결 의식’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였음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구약의 여호와 신앙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의식은 ‘예배 의식’이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 믿음의 족장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제사를 드리는 일을 통해서’, 곧 ‘예배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 창세기 15장 말씀에서도 이렇게 쪼개 놓은 고기 사이를 횃불 모양을 한 하나님께서 통과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갱신하십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폈던 노아 언약에서의 언약 갱신은 ‘보존 언약’, 즉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망치 않겠다’라는 내용이었는데, 창세기 15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에는 이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큰 나라를 이루고 애굽 땅으로 갔다가 객이 되고 400년 동안 섬기다가 나올 것이 미리 말씀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통해 언약 갱신이 일어났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내산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또 다시 새로운 언약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과 공적인 언약을 새롭게 체결함으로써 이전의 단계와 전혀 다른 언약의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 체결 의식을 위해 온 백성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시내산에서의 예배 장면은 장엄합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공적인 언약의 체결 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행하고 있는지가 상세히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장엄한 예배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간의 언약 체결의식은 출애굽기 24장에 나옵니다. 대단히 멋지고도 장엄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말씀을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아멘!
여기에는 예배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다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모세가 백성에게 읽어 들리고(말씀낭독 혹은 설교),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목소리로 응답합니다(예배에서 회중의 응답도 중요한 예배의 구성요소입니다). 장차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되게 될 희생제물이 드려집니다. 속죄의 피가 뿌려지고, 백성들은 “이제 너희는 깨끗하여졌다”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죄 사함의 선포지요. 그리고 직분자들이 나옵니다. 모세와 대제사장인 아론과 나답, 아비후도 있고, 칠십 장로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도 있습니다. 언약을 체결한 후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여기 모든 예배 요소들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 갱신, 즉 새로운 구속역사의 단계로 접어드는 언약의 진전을 겪게 되는데, 이 때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이 언약 예식을 진행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내산에서의 언약 체결 의식을 보면서 가장 압권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이 장엄한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과 언약이 체결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전체 장면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이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슬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 의식, 하나님과의 언약 갱신, 그 언약을 새롭게 하는 자리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일 수가 없고, 보는 이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회중을 대표하는 직분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발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그조차 청옥과 같은 모습, 하늘같이 청명한 모습......이런 것으로 유비적으로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 하나님이 실재로서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나 여러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일개 사람에 불과한 칠십 장로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먹고 마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실 때에, 우리와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에, 그 때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모든 시대에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하는 활동이고,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모세와 대제사장, 장로들의 역할들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만인 대제사장이 됨으로, 우리 모두가 저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에는 직접 들어가 보지 못하고, 시내산의 기슭에서 보이지 않는 천둥이 치는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지만, 신약의 백성들인 우리는 예배에서 ‘친히 하나님을 뵈옵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히브리서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18-2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참여자가 된 우리들은 이제 저 무서운 산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장자들의 총회 속에서 하나님을 친히 뵈옵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배를 통하여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내산의 언약 갱신과, 또 그것이 신약 시대에 새롭게 되었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예배는 언약갱신이다’는 주제의 증거구절로 갖고 있습니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
한 본문만 더 봅시다. 예배가 어떻게 언약의 갱신이 되는지를 포로기 이후에 볼 수 있는 한 본문입니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 장면입니다. 매우 전형적인 예배 장면이면서, 동시에 예배를 통해 어떻게 언약 갱신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느헤미야 8장 말씀을 읽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역함으로 약속의 땅을 잃고 온 땅으로 포로로 끌려 갔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본토로 돌아왔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이들을 통해서 예배 재건 운동을 하고 있던 그런 상황입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엘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느8:5-12)
아멘!
언약 갱신 : 우리의 예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합니까?
제가 최근에 글을 하나 쓰면서, “현대의 세계란 암암리에 유물론에 정복된 세계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융성하면서 이전 역사의 어떤 시대들보다 잘 살게 된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은 쪼그라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던 우리의 영혼은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지저분한 것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고 탐구하는 종교이므로,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대단한 적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느샌가 보이지 않는 사이, 하늘을 소망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바알을 더 좋아하는 체질을 갖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세계이므로 제가 “현대의 세계란 암암리에 유물론에 정복된 세계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잠재의식까지 돈과 물질에 정복당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예배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 갱신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하고 무모한 일로 보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10년 후에 지금보다 마음이 더 자랍니다”와 “1개월 뒤에 10억을 받게 됩니다”라는 선택지가 있으면, 아무런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배라는 것이 “당신의 눈에 보이는 삶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라고 말해 주지 않고, “예배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입니다”라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지요!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로 이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항상,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강력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경의 우리 선조들은 모두,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언약적 교제를 나누었으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다시 갱신하거나,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거나, 혹은 부숴지고 파괴된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할 때 언제나 여기에 ‘예배’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질문이 틀렸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냐는 것은 부차적인 질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예배는 무엇입니까?”이고,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예배란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곧 언약 갱신”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배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드려야 하는 것”, 즉 ‘태도’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100 퍼센트 그 사람의 예배는 우상숭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교제요 언약 갱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예배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성경을 기록하는 시기에는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언약 갱신이 방금 살폈던 성경의 기록들처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예배를 통해 언약을 갱신합니다. 우리에게는 완성된 언약과 그 다음의 신자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새로 쓰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언약을 이제 ‘우리의 삶에 구현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에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브라함처럼은 아니지만 저와 여러분 역시 매 주일 우리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매 주일 하나님과 함께 언약을 갱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령주의자들은 말씀을 따르려는 이들을 향하여 ‘죽은 문자를 맹신하는 이들’이라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문자’를 맹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멈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자’, 곧 완성된 계시가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형상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들에게 예배가 있습니다. 언약 갱신, 그래서 새로운 언약이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언약이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주어진 언약을 내 삶에 비추어 볼 때, 매일 매일, 매주 매주, 새롭게 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언약이 모두 완성되고 성취된 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야 할 언약 갱신의 새로운 과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언제나 언약 갱신입니다. 하나님과 친히 대면하면서! 시내산의 직분자들조차 누리지 못했던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하나님과 새롭게 다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우리 예배의 본 모습입니다. 이 영광스러움을 깨달으시고, 하찮은 육의 껍데기들과 바꾸는 우를 범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보여주는 예배의 또 다른 특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덧붙일 한 가지 사실만 더 살피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살필 예배는 우리가 지난번에도 보았던 가인과 아벨의 제사인데요, 이 부분을 살피면서 말씀을 정리하도록 합시다. 창세기 4장을 보시겠습니다.
3절에 보면 예배의 시작 부분이 나옵니다. 3절 첫 문구는 우리말로는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되어 있지만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입니다. 그래서 이 문구는 창조의 날들의 마지막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과 연관해 보면 안식일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흔히들 여기에서 아벨이 ‘피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가 잘못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제사에도 곡식 제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 보시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음에 반해, 가인은 “땅의 소산의 첫 번째 것”을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둘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가장 살진(기름진) 양의 첫 새끼”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양들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가인은 ‘그냥 땅의 소산으로만’ 드렸습니다(레2:14에 의하면 소제에서 곡식은 첫 곡식이어야 한다). 곡식이냐 짐승이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인은 제물을 대강 드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벨은 ‘최선을 다해 예배’했다면, 가인은 ‘예배의 의무를 다 하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잘 아는 그 다음 사건들이 일어나지요. 가인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이후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이 때 제사/예배의 특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예배에서 무엇을 유의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1)
첫째, 아담의 경우에서는 성전 에덴에서 그가 어떤 예배를 드렸는지 우리가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아담의 아들들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예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예배의 형태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예배는 바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형태’로서의 예배였습니다. 즉 우리는 아담의 시대에나 그 아들들의 시대에나,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범죄 이전의 상태나 범죄 후의 상태나 예배의 공통된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치는 행위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신과 섬김이 됩니다.
2)
그런데 바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죄가 개입된 세계’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곧바로 발견하게 됩니다. 가인은 이 헌신과 섬김을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예배에 ‘형식만을’ 드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언약 갱신이라는 말의 의미는 예배를 드리는 이쪽 편의 자세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저 복을 내려주시고, 그저 언약을 갱신시켜 주시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죄가 개입되자 예배는 찌그러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갚진 것을 준들, 우리가 죄로 어그러져 있으니까 그 예배도 모양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어땠습니까? 수많은 유대인들의 예배가 겉모습만 갖춘 예배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만든 ‘자신들의 관습’이 거의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것’과 ‘손을 씻지 않는 것’ 같은 것이 거의 동등한 범죄로 인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즉시 폐기처분 하셨습니다.
가인의 예배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일 수 있음을 명심합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언약적 교제이고 언약 갱신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배할 때 예배의 다른 한 편 언약 대상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어도 우리가 가인처럼 예배한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싫어하실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3)
이런 예배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예배에 죄가 개입되자 예배는 언약의 복을 실어나르는 방편이 된 것이 아니라 ‘언약 저주를’ 실어나르는 방편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정죄 받았고, 예배 자리를 나가서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난 것의 시발점은 예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약의 양면성’을 기억하십시오. 예배가 참으로 ‘언약 교제’, ‘언약 갱신’이라면, 이 예배는 언약의 마지막 측면도 함께 가집니다. 그것은 언약에는 ‘복도 있고, 저주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엉망으로 만들 때, 언약의 복 대신, 언약 저주가 내릴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언약 갱신으로 이해할 때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예배의 태도’ 문제는 다음 주일에 좀 더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