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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가 주는 것은 단순히 차이의 발견과 인정만이 아니다. 서로의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즐거움뿐 만도 아니다. 소통의 진정한 힘은 다름과 같음을 넘어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갈 때, 그리하여 고이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흘러갈 때에 생기는 그 무엇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새 연재 <이웃종교의 향기>는 그러한 소통을 위한 발걸음이다. ‘참 진리의 발견’이나 ‘인류 평화 도모’와 같은 거창한 목적은 없다. 다만, 닮은 듯 다른 이웃종교의 이야기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고자 한다. 은은한 향기에 젖어 있다 보면, 어느새 그 좋은 향기가 스스로에게 깃들기도 하는 법. 이웃종교의 낯선 듯 친숙한 향기를 찾아가보자. -편집자 주- |
원불교는 1916년 “물질이 개벽 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 아래 제1대 종법사인 소태산 대종사가 창시한 종교다. 소태산은 20여년의 수행 끝에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임을 깨닫고, ‘물질세계의 급격한 발달로 정신세계가 피폐해 질 것’을 예견하며 정신세계를 일깨워야 함을 설파했다. 원불교의 모든 신앙과 수행의 대상은 일원상(一圓相)인데 이는 우주의 궁극적 진리, 인간의 참 마음자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원불교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쳐왔다. 교화와 더불어 교육과 자선(복지)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간 원불교는 원광의료원을 비롯한 양·한방 병원과 다수의 사회복지관을 설립해 의료와 복지 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한편 원광대학교와 10여개의 중·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 활동에 힘쓰고 있다. 탈북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한겨레 학교, 헌산 중학교 등의 대안학교도 원불교에서 만든 학교들이다. 가출 청소년, 소년원 퇴원생 등 탈학교 청소년들을 위해 작년에 설립된 ‘은혜 학교’도 두 명의 원불교 교무로부터 시작됐다. 그 중 한 명이 강해윤 교무다.
▲ 강해윤 교무 ⓒ문양효숙 기자 |
“쉽지 않더라고요.” 강 교무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생활에서는 “오랜 시간 견디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은혜학교에서 함께 지내는 22명의 학생은 소년원 퇴원생이거나 보호관찰처분을 받은 학생, 혹은 소년법에 따른 6호 처분을 받은 이들이다. (법원에서 6호 처분을 받은 청소년들은 일정기간동안 지정된 시설에 위탁된다.) 강 교무는 1990년대부터 소년원 교화 활동을 해 왔다. 그런데 한번 학교와 가정의 테두리 바깥으로 나간 아이들은 반복해서 소년원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강 교무는 학력이 인정되는 ‘느슨한 형태의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의 틀을 넓히는 거예요. 세상도 학교이고, 가정도 학교죠. 공교육에서는 학교라는 틀이 공고하고 그 틀을 벗어나면 문제아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학교라고 생각하면 그 누구도 문제아가 아니에요.”
은혜학교 학생들은 월요일 낮 12시부터 금요일 낮 12시까지 학교에서 지내고 주말은 집에서 보낸다. 교사가 소재파악을 할 수 있다면 정확한 시간을 지키지 못해도 규제하지는 않는다. 물론 연락이 닿지 않아 교사가 학생을 찾으러 나가기도 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 당연한 학생들에게는 공동생활 자체가 쉽지 않다. 교사와 학생들은 함께 룰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도록 서로 독려한다. 강 교무는 “청소년기는 지나가는 순간이며 이 시기를 함께 건너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도 문제 학생이었는데요, 뭐. 원불교학과에 들어가서 교무가 되려면 다른 교무가 저를 추천해줘야 하는데 당시에 아무도 저를 보증해주지 않았을 정도였어요. 청소년기에는 지지하고 보호해줄 누군가가 필요한데 학교 밖 아이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없는 거죠. 그래서 외롭고 어른들에게 분노하고 그러는 거예요.”
은혜학교의 시작은 1990년 ‘은혜의 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해윤 교무와 헌산 길광호 교무는 교무가 되자마자 도시 빈민 교화를 위해 서울 신림10동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은혜의 집’을 열었다. 원불교에서 교당이 아닌 ‘현장’으로 교무를 파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강 교무는 “감사한 일”이라 했다. 그러나 신림동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공간은 두 교무가 지내는 단칸방이 전부였고 주민들과 똑같이 공동화장실을 썼다. 강 교무는 “노동을 엄청나게 했다”며 웃었다. 주거 환경이 열악한 달동네에서 두 교무는 모래 지게를 지고 주민들의 보일러와 지붕을 수리해 주곤 했다.
이후 재개발로 지역이 철거되던 1997년까지 두 교무는 컴퓨터 교실을 열고 방과 후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돌보는 등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당시, 도시 빈민 활동과 더불어 두 교무가 관심을 쏟았던 것이 ‘소년원 교화’였다. 그들은 청소년쉼터를 운영하면서 소년원 출신 청소년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던 중 함께 동고동락했던 헌산 길광호 교무가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발견했을 당시 이미 말기였다. 강 교무는 “정말 고생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라며 가슴 아파했다. 그의 뜻을 기리고자 1000여명의 후원자가 조금씩 기금을 내어 만든 대안학교가 2003년에 개교한 헌산중학교다.
강해윤 교무는 지난해까지 한겨레학교, 헌산중학교, 은혜학교가 속해있는 학교법인 전인학원의 상임이사였다. 올해부터 내려놓았다.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강해윤 교무는 원불교환경연대 대표이자 사회개혁교무단 공동대표다. 원불교 교정교화 협의회 지도교무를 맡아 일주일에 한번 교도소를 방문해 교화활동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올해에는 34명으로 구성된 원불교 최고의결기구인 수위단에 선출됐다. 많아도 너무 많다.
“올해 마라도에 가서 시골사람으로 1년간 쉬는 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일이 많아졌어요. 수위단이나 교도소 교정교화 업무도 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핵발전소 문제나 강정 해군기지문제, 정리해고 문제 등이 연일 계속되고 있어서요.”
▲ 지난 10월 17일 단식 중인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을 방문한 강해윤 교무 (좌), 12월 4일 종교환경회의가 주관한 '탈핵후보에게 투표합시다' 캠페인에 참여한 강해윤 교무 (우) ⓒ문양효숙 기자
그러나 그에게서 지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언제나 자유롭다”고 말한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진보라고 하고 싶어요. 자기 개혁을 계속 해 내지 않으면 삶의 참 의미가 없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이 정말 중요한 활동이지만 오늘이라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면 아무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어요. 어렸을 때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여행이랑 책을 좋아하는데 빈민 지역에 가면 내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무 문제 되지 않았어요. 막상 내려놓으면 그로부터 오는 자유로움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체험을 해보지 않아서 자꾸 눈앞에 보이는 숫자들에 현혹되게 돼요.”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 원불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종경 요훈품> 1장에 쓰인 소태산의 가르침이다.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히고 머리로 무엇인가를 배우더라도 결국 가장 중요한 배움은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하는 문제에 있다는 것이다. 강해윤 교무는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살피는 것이라 말했다. 그런 그에게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물었다. 강 교무는 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들을 바라보며 더 자유롭게, 모든 이들이 가치 있게 사는 삶을 향해 함께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게 돼요. 종교인들이 욕을 먹고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종교를 더 걱정하는 것은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죠. 가르침의 뜻이 무엇인가 귀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충실하게 살려고 하면 욕심이 사라지고 시간적 · 공간적으로 더 멀고 깊게 볼 수 있죠. 물질에 메이면 자기 앞에 있는 것만 보이지만 종교인은 더 먼, 지고한 하늘을 보는 사람들이니까요. 절대자를 향한 신앙, 그로부터 힘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예요. 연연할 것이 없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