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山西) 오바오현(五寶縣) 출신 왕영강(王永强)은 명나라 말기 변방봉기에 참여했다. 이후 명군을 위해 화평을 모집해 연안 지역에 주둔했다가 대순군에 항복했다. 청군이 그를 죽이러 왔을 때 그는 패배하여 청나라에 항복하고 계속해서 연안을 수비했다.
1. 초기 경험
청나라 초기의 "오바오 현 연대기"에 따르면 왕영강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일찍 죽었고, 그와 그의 남동생 왕영진과 그의 어머니는 서로 의지했습니다. 두 자녀를 둔 과부의 우여곡절과 고난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주위로부터 자주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왕영강과 그의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자주 싸웠고, 어머니를 지켜야 했습니다.
나중에 왕영강의 먼 친척은 두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자주 싸우는 것을 보고 사립학교에 데려가 공부했습니다. 2년 동안 간신히 공부한 끝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됐다. 첫째, 학업을 친절히 지원해 주던 친척이 강도들에게 도둑맞았고, 둘째, 공부보다 창과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곧 산시성(陝西省) 농민봉기가 오바오현(吳寶縣)까지 번졌다. 이때 산시성 북부 국경 주민들도 굶주림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고 오바오현을 공격했다.
아직 10대였던 왕영강 형제는 20명이 넘는 가난한 형제들을 불러 국경봉기 대열에 합류했다.
왕영강은 전투에 용감하고 몇 가지 단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팀 리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곧 왕영강은 혼자서 수백 명의 팀을 이끌었습니다.
충진 5년(1632), 명군이 닝샤를 공격하자 왕영강의 상관인 반란군 지도자는 패하고 항복했다. 지도자는 왕영강을 불러서 다른 농민 반란군들한테 관군(명군)한테 항복하라는 편지를 써야만 했고, 이를 본 왕영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명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충진 9년(1636), 왕영강이 영하(寧夏)의 초대 장군으로 임명되어 농민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산시(陝西)와 산시(山西)를 공격하고 여러 도시를 회복했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그와 함께 국경봉기에 참여하고 공적투쟁으로 그와 적의를 품은 마을 주민 왕정지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군대를 곧장 오바오 현으로 이끌었지만 왕정지는 이미 가족과 함께 떠났다. 그는 어머니를 오바오현에 묻고 왕정지 가문의 묘를 도굴해 복수를 한 뒤, 군대를 이끌고 닝샤로 돌아갔다.
2. 연속 항복
충진 15년(1642년), 왕영강은 명나라로부터 연안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와 그의 남동생 왕용전은 군대를 이끌고 연안성을 방어했다.
2년 후, 이자성은 서안(시안)시에 대순 정권을 수립하고 연안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왕영강은 이자성의 조카 이과한테 항복했으며, 대순 정권으로부터 연안시의 방어를 지원하는 참모 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대순영창 원년(1644년) 겨울, 이자성의 대순군은 청군과의 전투에 실패했고, 청군은 연안을 직접 겨냥했다. 이과는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섰으나 병력 부족으로 많은 공격이 실패했다.
왕영강은 대순의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인 청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고,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가라는 이과의 명령을 어기고 청군에 항복했습니다.
곧 청군은 연안을 점령했고 이과는 탈출했다.
왕용강은 스스로 항복했기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연안대장으로 임명되어 청나라를 위해 연안성을 계속 수비했다.
3. 어차피 죽는다
순치 5년(1648) 8월, 청나라에 항복한 왕정지는 청나라 연수목사로 임명되어 위림에 주둔하여 왕영강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왕영강 형제는 어머니를 죽인 적이 이제 그의 상사가 되었고, 어머니를 죽인 원수는 아직 갚지 못했습니다.
왕정지는 왕영강이 자신의 조상의 무덤을 도굴하여 자신을 모욕했기 때문에 왕영강을 싫어했습니다. 왕정지는 첫째로 왕영강을 경계하고, 둘째로 적을 제거할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 위린에 군대를 파견했다.
왕영강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시간을 내서 군대를 모아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자들을 군대에서 제거하고 3000여 명의 군대를 자신과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했습니다.
올해 음력 12월,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 장군 강우가 대동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용강은 매우 흥분했다. 곧 산서성 각지에서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명나라를 재건하려는 왕영강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왕영강은 먼저 대동시에 사람을 보내 강우한테 그와 함께 일할 뜻이 있다고 알렸으며 강우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 후 반청군은 위린을 향해 진군했다.
왕정지는 왕용강이 반청군과 연합한 사실을 모르고 왕영강이 반청군과 싸우고 죽게 놔둘 계획이어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반청군과 싸우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왕영강은 너무 기뻐서 즉시 군대를 도시 밖으로 이끌고 의심 없이 위린시에 직접 들어갔습니다. 그는 왕정지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어쨌든 명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남동생 왕영진(王永珍)도 연안에서 청나라 연안현사 송종신(宋宗信)을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왕용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유력한 고유재도 신목현에서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선언하고 왕용강과 협력하여 단기간 내에 산시성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강우와 협력하였다.
순치 6년(1649년), 청나라 군대가 항복한 명나라 장군인 오삼계 등을 데리고 산시성 북부에 진입했다. 왕영강의 군대는 서안을 향해 진군해 왔고, 부평현에서 오삼계를 만나 격전을 벌였다. 왕영강은 불행하게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남동생 왕영진은 계속해서 군대를 이끌고 싸웠으나 패하고 도망쳤다.
4월, 청군이 부성을 함락시켰고, 왕영진은 군대를 이끌고 전사했다. 고유재는 순치 7년(1650년) 11월 패하고 자살할 때까지 복고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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